2021년 3월 18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109) 독립을 향한 선렬들의 가시밭 행군 - 조선 자유독립에의 공약

조선 자유독립에의 공약

 

벌써 전, 1920년에 레닌의 볼세비키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총리인 이동휘에게 공언했다. “조선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 노예에서 해방되어 자주독립국이 되는 것을 지원한다.

중국 국민당 정부도 1942년에 임시정부 김구 주석에 대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적위치를 승인하고 조선국 독립을 약속했다.

 

194311,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연합국의 세 수뇌인 미국의 F. 루즈벨트,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개석이 이집트의 카이로에 모여 카이로 선언[1]을 발표했다.

 

전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조속한 시일내에 조선을 자유독립국가로 한다.”

 

1945726일에 소련도 이 카이로선언에 참가하면서[2] 일본에 선전포고를 공표했다.

 

일본정부는 1945815, 포츠담 선언을 승낙하고 무조건 항복했다.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 , , 소는 조선(물론 전체로서의 조선)을 자유독립국가로 인정하여 즉시 국제공약의 의무를 이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본연태.

그런데 여기에 변태가 또 먹어들었다. 미국은 언제봐도 우리켠이 아니었다.

1905년 포츠마스에서 열린 일노강화조약[3] 때에 미국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단독지배를 인정했다. 그것은 1910년 일한합방의 신작로를 닦아준 것이었다. 1917년 란싱-이시이 비밀협정[4], 미국은 극동에서의 일본의 기득권을 재확인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적당한 시기’, ‘그리 오래잖은 날조선을 자유독립시킨다고 했다. 뭔가 소련과의 밀약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일본 주둔군 무장해제를 이유로 38도선 이북은 소련이, 그리고 이남은 미국이 그 임무를 분담하게 했다. 이것은 미소가 남과 북에 각기 자기 세력권을 구축한다는 묵계[5]가 이미 성립돼 있었다는 암시라 하겠다. 여기서 분단은 온전히 외세에 의하여 그들 이익에 맞추어 우리 몰래 만들어진 변태로 들어갔다.


[각주]

  1.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 - 19431127일 미ㆍ영ㆍ중의 3개 연합국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모여 발표한 공동선언이다. 5일간에 걸친 회담에는 루스벨트ㆍ처칠ㆍ장제스 등이 대표로 참가했으며, 회담 결과 발표한 선언에서 연합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최초로 일본에 대한 전략을 토의했다. 이 회담에서 연합국은 승전하더라도 자국(自國)의 영토 확장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 후 타국으로부터 약탈한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유독립국가로 승인할 결의를 하여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을 받았다.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포츠담 선언에서 재확인됐다
  2. 1945726일의 선언은 포츠담 선언(Potsdam Declaration)이다. 포츠담 회담에 참석한 소련의 스탈린은 서명하지 않았고 중화민국의 장제스 국민정부 총통은 회담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전신을 통해 선언 참가를 밝혔다
  3. 포츠머스 조약(Treaty of Portsmouth) - 190595일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의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 뉴햄프셔주에 있는 군항 도시 포츠머스에서 일본 제국의 전권외상 고무라 주타로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 간에 맺은 러일 전쟁의 강화 조약이다. 러일 강화 조약이라고도 불린다. 미국 동부 뉴햄프셔주의 항구 도시 포츠머스 시에서 회담이 이뤄졌으며, 조약 내용을 협상한 회의(810일부터)를 포츠머스 회의, 러일 강화 회의, 포츠머스 강화 회의 등으로 부른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이 조약의 주선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4. 1917112일 워싱턴DC. 로버트 랜싱 미국 국무장관과 일본 특사 이시이 기쿠지로가 협약을 맺었다. 이름하여 이시이 랜싱 협정의 골자는 중국에서의 일본의 특수이익 인정. 양국의 기회균등을 확인하되 중국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일본의 특수성을 감안한다는 내용이었다.
  5. 묵계(默契) - 말없는 가운데 서로 뜻이 통함. 또는 그렇게 하여 성립된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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