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8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112) 독립을 향한 선렬들의 가시밭 행군 - 산당의 조직기구화(좌우분열에서 좌우합작에로)

산당의 조직기구화

- 좌우분열에서 좌우합작에로 -

 

19468북조선 공산당과 북조선 신민당이 합당하여 북조선 노동당이 결성됐다. 사실인즉, 북조선 신민당은 북조선 공산당의 탄압과 흡수공작 때문에 자연해체 또는 소멸된 것이고, 자유의사에 의한 합당은 아니었다.

194694남조선 노동당이 결성되었다. 남한에서는 박헌영 등 교조주의, 또는 좌익적 모험주의자로 불리우는 콩구루가 남조선 노동당 창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했으나 공산당 자체내의 부조화를 가져왔다. 진짜 과격파여서 전략적으로 융통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청에서 체포령이 내리자 박헌영 등은 지하에 숨었다.

194694조선공산당과 인민당과 신민당의 비주류가 합류하여 남조선 노동당을 결성했다. 창당준비위원회에서의 강령은 (1) 근로인민의 이익을 보장하는 민주, 자주, 독립국가를 건설한다. (2) 인민공화국 건설을 위하여 인민위원회가 권력을 장악한다. (3) 토지개혁을 위하여 봉건적 잔재를 청산한다. (4) 친일분자, 민족반역자의 소유재산과 기업체는 국유화하고 그들의 공민권은 제한한다. (5) 민주적 노동정책, 인민의 기본권, 남녀평등권 위에선 민주주의 제도를 확립한다. 등등이다.

19461123남로당 결성대회가 열려서 위원장에 허헌, 부위원장에 박헌영, 이기석[1]이 선출됐다. 그 무렵에 광주에서 수인 900명이 폭동을 일으켜 15명이 사망했다. 각처에서 공산주의자들과 관련된 폭동과 살인사건이 빈발하고 학생들은 미군정의 국립대학 종합안에 반대하는 데모도 일으켰다. 좌익의 폭력혁명운동에 격분한 우익학생 민중들도 폭력대열로 각오하고 나섰다. 특히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모든 소유를 빼앗기고 이남에 넘어온 서북청년단[2]은 이남에서의 공산당과 그 활동에 복수적인 반발을 일으켜 제주도를 점령하다시피한 공산당을 무자비하게 섬멸했다. 지리산에서도 그런 종류의 토벌이 치열했다.

 

민전산하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全評)에서는 322일 전국적으로 24시간 제너스트’(총파업)을 지령했다. 남로당원 2,776명이 검거되었다.

 

19473131절 기념집회를 가 따로따로 개최했는데 서울, 부산, 영암, 순천, 제주에서 두 편이 충돌하여 경관의 발포로 유혈극이 벌어졌다.

공산폭동이 격심하게 되자, 우익청년단인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3], 민족청년단[4], 광복청년단 등이 일체가 되어 폭력 대 폭력으로 대결하였다.

 

좌익계열의 정당도 난립상태였다.

 

조선인민당 건국동맹세력

사회노동당 인민당의 여운형, 신민당의 백남운[5], 공산당의 강진[6] 등등의 합동

근로인민당 공산당계의 후퇴로 여운형이 진출한 것인데,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백남운과 강진이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719일에 여운형이 암살됨에 따라 궤멸됐다.

민주독립당 민주통일당 창당준비위의 홍명희, 조헌식, 유석현, 조선국민당의 안재홍, 박용희[8], 건민회[9]의 이극로, 박기출[10], 이경석, 재미한족연합회의 김호[11], 김원용[12], 전 한국민주당의 김병노[13], 민족자주연맹산하의 주요 정당과 사회단체가 중심이 되어 민주독립당 창당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19471020민주독립당이 결당되어 당대표로 홍명희를 선출하고 정강으로는 (1) 자주, 민주, 통일 조선정부 수립, (2) 사대주의적 매판행위와 반민주적 독재행위 배격, (3) 계획성 있는 경제체제를 확립하고 조국의 경제적 사회적 후진성을 극복한다 등등이었다.

민주독립당은 민족자주연맹의 중심역할을 담당했다. 홍명희와 이극로가 이북정권에 참가했기 때문에 이 단체의 조직 활동은 자연히 쇠퇴되었다.

민족자주연맹[14] 은 한국민주당의 친미세력, 박헌영 등의 공산주의 세력, 김구 등의 임시정부 우파, 김규식 등의 임시정부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 홍명희 등 민주통일당 창당준비위원회관계자, 안재홍 등 조선국민당 관계자, 이극로 등 건민회 관계자, 장건상 등 근로인민당[15] 관계자, 조봉암 등 민족자주적 사회주의 관계자 등이 총망라되어 김규식을 정점으로 상호유대를 갖고 발족한 것이다.

이리하여 민족자주연맹은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는 14정당, 50개 단체의 진보적 민족주의 세력으로 결집하였으나 민주독립당[16], 민중동맹, 신진회, 신한국민당, 건민회가 중심 멤버였다.

19471220일에 창당대회가 열렸고, 근로인민당, 조선인민공화당, 천도교청우회, 사회민주당, 농민당, 조선공화당 등 관계인사들도 개인자격으로 참가했다.

연맹 총재에 김규식이 취임했다.

채택된 정강은 (1) 사대주의 매판자본세력을 배제하고 자주, 통일, 민주적인 조선중앙정부를 수립한다. (2) 조선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의 다양성을 바르게 파악하고 조국과 민족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다양한 계획을 추진한다. (3) 계획성 있는 경제정책을 추진하여 생산수단의 현대화를 도모한다. 등등이었다.[17]


[각주]

  1. 이기석(李基錫, 1900~?) - 경상북도 영덕 출생. 영덕 청하(淸河)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경신학교 4학년을 수료하였다. 19252월 포항의 영일청년회가 주최한 기근 구제 음악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89월 야학 교과서를 편집한 것이 빌미가 되어 영덕경찰서에 검거된 후 10월 대구지법 경주지청에서 출판법 위반으로 금고 6월을 선고받았다. 신간회 영덕지회에 참여했고 19296월 신간회 복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9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1930년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여하여 경북 책임자가 되었고, 대구ㆍ포항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44년 여운형(呂運亨)이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에 참여하였다. 19453월 건국동맹 산하 군사위원회 위원이 되어 노농군(勞農軍) 편성을 계획하고 전국의 군사전략상 중요 지점에 책임자를 파견하여 조사활동을 하였다. 8월 서울에서 검거되었다가 해방 직후 석방되었다. 그 뒤 건국동맹 총무부를 맡아 활동했으며, 1945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고 전국인민위원회가 결성되자 중앙인민위원회 인민위원으로 선임되어 보안부에서 활동하였다. 194511월 조선인민당 중앙정치위원이 되었고, 19461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준비위원회 서기국 내의 조직부에서 활동하였다. 2월 민전 중앙위원에 선임되었으며, 이 후 사무국 재정부 차장, 재정부장을 역임하였다. 19468월 조선공산당ㆍ조선인민당ㆍ남조선신민당 3당 합당 과정에 참여하여 박헌영과 함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478‘8·15폭동음모사건으로 백남운(白南雲)ㆍ최원택(崔元澤)ㆍ장건상(張建相)ㆍ유영준(劉英俊) 등과 함께 미군정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구형받았다. 19488월 해주에서 열린 제1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남조선 대표)으로 선출되면서 북한 정치계에서 활동하였다. 19579월부터 신병으로 인해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사망 후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2.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 - 미군정 당시 조직된 대한민국의 극우 반공주의 청년 단체. 194635일 생성된 월남자 단체가 그해 1130일에 통합해 발족하였다. 이 단체는 19481219일에 조직한 대한청년단으로 통합했으며, 남은 일부는 19491018일에 단체 등록이 취소되어 소멸했다. 서북청년회 사무실은 한국 민주당 본부가 있는 동아일보 사옥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서북청년단은 이승만, 김구, 한국민주당 등에게서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승만은 1947년부터 이들을 견제했고, 지청천을 시켜 대동청년단을 창설함으로써 족청과 함께 서서히 대동청년단에 흡수되었다. 서북청년회원 가운데 일부는 대한민국 국군과 대한민국 경찰의 창설에 참여하였고, 일부는 1948년 남한 단정 반대사건인 제주도 43 사건에 남로당이 개입하면서, 남로당 토벌이라는 명분으로 43 사건 진압과 학살에 가담하였다.
  3.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 상해(上海) 임시정부의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池靑天)194512월 환국한 뒤 당시의 모든 청년운동단체들을 통합하여 대동단결을 이룩한다는 명분으로 이 단체를 결성하였다. 이렇게 결성된 대동청년단은 지청천의 개인적인 인기와 더불어 막강한 조직을 갖추게 되었으나, 반공 및 단독정부 수립의 이승만(李承晩)과 민족통일 및 남북협상의 김구(金九)에게로 민족지도노선이 갈라지자 주로 이승만 노선에 맞추어서 활동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기반 확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또 하나의 통합청년운동단체인 대한청년단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동청년단도 대통령의 명령에 의하여 대한청년단으로 통합, 흡수되어서 그 중추 세력이 되었다.
  4.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 - 194610월에 미군정의 전면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이범석이 조직한 우익청년단이다. 비정치, 비군사, 비종파를 내세우며 청년들에 대한 훈련에 치중해 100만 명이 넘는 청년들을 조직했다. 사상적으로는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내걸어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한편 좌익 출신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기도 했다. 이범석의 정치활동의 기반이 되었으며 1949년에 이승만의 지시로 해산되었지만 그 뒤에도 족청계라는 형태로 남아 자유당 창당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5. 백남운(白南雲, 1895~1979) - 전라북도 고창 출생. 수원고등농림학교와 동경상과대학을 졸업한 뒤, 19251938년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1933년에는 우리나라 원시ㆍ고대사회경제에 관한 최초의 사회경제사적 연구라 할 수 있는 조선사회경제사를 발간하였다. 한편, 1922년부터 이승훈(李承薰)ㆍ한용운(韓龍雲)ㆍ조만식(曺晩植)ㆍ허헌(許憲) 등과 함께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 19234월에는 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결성하고 중앙부에서 활동하였다.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38년에는 이순탁(李順鐸)ㆍ노동규(盧東奎) 등 동료 교수 그리고 학생 10명과 함께 조선사정연구회사건으로 일제에 피검되어 옥고를 치렀다. 815광복 직후인 19459월에는 조선학술원을 설립, 원장에 취임하고 민족문화연구소도 설립하였다. 같은해 12월에는 경성대학 법문학부 재정학 교수로 미군정의 임명사령을 받았다. 19462월에는 김두봉(金枓奉)ㆍ한빈(韓斌) 등이 북한에서 결성한 조선신민당의 경성특별위원회(후에 남조선신민당으로 발족)의 위원장을 맡는 한편, 좌익세력의 집결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의장 및 상임위원ㆍ경제대책위원 등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19475월에는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창설하여 부위원장에 취임했으나, 곧 월북하였다. 월북 후 19488월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9월에 교육상을 역임하고, 1952년에 과학원 원장, 1961년에 최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1969년에 최고인민회의 의장, 1974년에는 조국전선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6. 강진(姜進, 1905~?) - 일명 강()나후렌치, 권성만(權成萬), 김용칠(金龍七), ()와시리, 백인석(白仁錫), 술리모프로 불렸다. 본적은 함경북도 회령이다. 러시아 국립소학교(1913~1920), 하바로프스크의 국립고등소학교(1922년 졸업), 니콜리스크ㆍ우스리스크의 러시아 국립 제1중학교를 졸업하였다(1924). 1922년 재학 중 러시아공산청년동맹(콤소몰)에 가입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교양과 훈련을 받았다. 1924년 가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러시아 국립 원동대학(遠東大學) 공과(工科) 1학년에 입학했으나, 11월 학자금이 부족해 학교를 그만둔 후 야학 교사 등을 하면서 계속 면학의 길을 모색하였다. 19251월 조선인의 공산주의 운동을 통일할 목적으로 연해주에서 당과 공산청년동맹 내의 청년들로 비밀결사를 조직했는데, 그것이 종파로 간주되어 러시아공산청년동맹에서 제명되었다. 그후 간도로 건너가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에 가입,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7월 간도 용정(龍井)에서 안재규(安在奎)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가입, 천수일(千水一)을 책임자로 하는 제3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그 해 10월경 1차 간도공산당 검거사건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하였다. 19291월 길림(吉林)에서 고광수ㆍ박문병ㆍ최덕준(崔德俊) 등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ML) 중앙위원회를 재결성하고 임시 선전부 부원이 되었다. 1935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던 중 이재유(李載裕) 등과 함께 옥내(獄內)공산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그 총책을 맡아 활동하여 추가로 징역 26개월을 언도받아, 1945815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해방 직후 옥내공산주의자동맹을 모태로 하여 즉시 출옥동지회를 조직,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610월 신민당 당수 백남운(白南雲)을 중심으로 한 사회노동당 준비위원회 발족에 참가하고, 백남운과 함께 38도선 이북을 방문하였다. 11월 사회노동당이 결성되자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507월 이후의 행적은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7. 유석현(劉錫鉉, 1900~1987) - 충청북도 충주 출신으로,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아 같은 해 11월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건너갔다. 19207월 중국 톈진[天津]에서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해 19222월 군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국내로 들어왔다. 19233월 황옥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일본경찰은 황옥의 정보 제공으로 계획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일거에 전원을 붙잡아 투옥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뒤 만기출옥해 1941년 다시 동삼성으로 건너갔다. 광복 후 광복회(光復會)의 고문과 광복회장을 역임하였다.
  8. 박용희(朴容羲, 1884~1959) - 서울 출신. 1908년 이명헌(李明憲) 등과 함께 동양선교회에 가담하여 동양선교회가 운영하는 동경성서학원에서 수학한 뒤 귀국, 1911년 경기도 용인의 장평리교회 에서 원세성(元世性) 등과 함께 농촌선교에 힘썼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승훈(李昇薰)ㆍ함태영(咸台永) 등과 만세운동을 모의하고 경기도 및 충청지구 연락책임자로 활약하였다. 3·1운동 이후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 만주 용정(龍井)으로 건너가 교원ㆍ전도사ㆍ기자로 활동하면서 교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1년 귀국하여 이상재ㆍ윤치호(尹致昊)ㆍ박승봉(朴勝鳳) 등이 일으킨 기독교창문사 창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21년에 장로가 되었고, 1925년에는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음에도 특별가결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7년부터 경기노회장ㆍ신간회 안성지부장ㆍ예수회연합공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2년에는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의 신흥우(申興雨)를 중심으로 한 적극 신앙단에도 참여하였고, 경기노회원 중에서 비서북계(非西北系)가 중심이 된 경중노회(京中老會) 창설에 주도적인 구실을 하였다. 신사참배반대운동을 벌이다가 19391942년에 걸쳐 옥고를 치렀으며, 광복 이후에는 과도정부 입법위원ㆍ기독신민회 초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953년 예수교장로회에서 기독교장로회가 분립될 때 기독교장로회에 속하였으며, 총회장과 한국신학대학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9. 건민회(健民會) - 1946616민족의식을 앙양하여 완전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기하며, 민족문화의 향상을 도모하여, 세계문화 진전에 공헌함을 표방하며 조선건민회가 결성되었다.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46-5에 임시사무소를 두었고, 고문에 권동진·윤세복, 위원장에 이극로(李克魯), 부위원장에 이경석(李景錫)ㆍ윤치형(尹治衡)을 선임하였다. 1947년 중간파의 3전선운동을 주도하다가 19475월 말에는 중간파 67개 단체를 포괄한 미소공동위원회대책 각정당사회단체 협의회’(약칭 共協)의 결성을 주도했다. 같은 해 10최대계파라고 할 수 있는 이극로계가 민중동맹의 김병로계, 신한국민당의 안재홍계, 신진당의 재미한족연합회계와 함께 민족독립당을 창당하였고, 1220일 중간파 통합기구로 출범한 민족자주연맹의 결성에 참여함으로써, 사실상 와해 국면에 접어들었다.
  10. 박기출(朴己出, 1909~1977) - 본관은 밀양(密陽). 부산 출신. 동래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일본 히로시마[廣島]의 고등공업학교를 마친 뒤 동경의학전문학교(東京醫學專門學校)를 거쳐 1942년구주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부산에서 병원을 개업하였고, 광복 뒤, 민족자주연맹과 통일독립연맹 경남위원장 등으로 정치에 관여하면서 1956년 조봉암(曺奉岩)과 진보당(進步黨)을 결당, 부위원장이 되었다. 진보당의 사회민주주의 정치노선이 제1공화국의 탄압을 받으면서 이른바 진보당사건에 연루, 징역 20년의 구형을 받았으나 제1심에서 무죄선고를 받고 6개월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2공화국 때 입후보자 난동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516군사정변 뒤 민정당(民政黨)ㆍ국민당ㆍ신민당(新民黨)에 가담하였으며, 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민당 공천으로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1년 국민당의 대통령후보로 나섰으나, 43753표로 낙선하였다. 1973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벽촌의 보건소 의사생활을 하다 귀국하였다. 대한의학협회 회장ㆍ경상남도의사회 회장직 외 경상남도체육회장ㆍ한글동학회 회장ㆍ새한학회이사장ㆍ민족통일문제연구원이사장 등을 지냈다.
  11. 김호(金乎, 1883~1968) - 본명은 정진(廷鎭), 호는 한사(漢槎). 서울 출생. 관립 소학교를 거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고, 그 뒤 모교 교관으로 재직하다가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에서 교직에 종사하였다. 1914년 미국에 건너가 캘리포니아주에서 농장을 경영하여 재정기반이 확고해지자 재미동포들과 유학생을 위한 육영사업과 문화사업에 전념하였다. 리들리(Reedley)에 로스엔젤레스한인센터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할 청년 역군들을 후원하는 한편, 신한민보(新韓民報)를 발행하여 재미한인들의 생활향상과 독립운동 고취에 역점을 두었다. 1937년 대한인국민총회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942년에는 재미 한족연합회를 결성하여 위원장으로 재미 동포사회의 중추 원로가 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김원용(金元容)과 함께 30년 만에 귀국, 김규식(金奎植)을 지원하며 정부 수립에 관여하는 가운데 이듬해 입법의원(立法議院) 초대 관선의원으로 선출되어 국내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그의 활동은 김규식계의 민주독립당과 민족자주연맹의 결성으로 구체화되었지만, 1948년 이승만(李承晩)의 집권은 그의 정치적 소외를 초래하여 다시 도미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캘리포니아주에서 10대 농장 가운데 하나인 리들리농장을 지키며, 재미 동포사회의 원로로 19593월 김원용 저술의 재미한인 50년사를 발행하였다. 1962년 일시 환국하여 국군의 날 행사를 참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19681월에 죽었다.
  12. 김원용(金元容, 1896~1976) - 서울 출생. 19175월 중국 망명 중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콜로라도주 중남부에 위치한 프에블로(Pueblo)의 탄광에서 일하였다. 임금이 높았던 탄광에 한인 노동자들이 몰려들자, 19184월 김호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 프에블로지방회를 설립하고 재무를 맡았다. 1920년 학생총회결성발기자회에 오하이오주 학생대표로 참석하여 각지의 한인 학생과 학생회를 통합하였고, 중서부와 동부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한 지방조직을 결성하였다. 1930년 하와이로 이주하여 대한인교민단에 입단하였고, 1931년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의 기관지 국민보(國民報)의 편집인이 되었으며, 교회재산과 교민단 회관을 매각해 동지회의 재정을 충당하려는 이승만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1932년에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를 복설시키고 1933년 총무가 되어 한인단체의 통합과 한인사회의 부흥에 앞장섰다. 1932년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비밀리에 후원하는 하와이애국단에 가입하고, 1936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국민보주필이 되었다. 1941년 호놀룰루(Honolulu)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 참석하여 독립전선 통일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봉대 등이 담긴 대회의 선언문과 해외 한족대회 결의안을 작성하였다. 이어 조직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의 비서 겸 행정위원이 되었다. 1944년 임시정부의 지시로 동지회 계열의 단체를 제외하고 개최된 13개 한인단체 대표회에서 주미외교위원부의 외교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해방 후 10월 조국의 재건을 후원하기 위해 구성된 재미한족국내파견대표단의 부단장으로 28년여 만에 귀국하였다. 1946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법제ㆍ사법분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1년 간 활동하면서 조국의 건설에 이바지하였다. 1948년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북미대한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 1957년 한인재단의 총무 겸 재무 등으로 한인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1959재미한인50년사를 발간하였다.
  13. 김병로(金炳魯, 1887~1964) - 전라북도 순창 출신. 본관은 울산(蔚山). 호는 가인(街人). 13세에 담양 정씨(潭陽鄭氏)와 혼인하였다. 17세 때 한말 거유(巨儒)인 전우(田愚)에게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 담양의 일신학교(日新學校)에서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산술과 서양사 등 신학문을 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해에 향리의 용추사(龍湫寺)를 찾아온 최익현(崔益鉉)의 열변에 감화, 190620세 때 7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였다. 1906년 창평(昌平)의 창흥학교(昌興學校)에 입학했으며,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학과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를 다녔으나 폐결핵으로 귀국했다. 1912년에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대학에 복학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 주오대학[中央大學] 고등연구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일본 유학 중에 잡지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장을 지냈고, 한편으로는 금연회(禁煙會)를 조직하여 조선 유학생의 학자금을 보조했다. 귀국한 뒤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와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의 강사로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맡았으며, 1919년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서 개업했다. 변호사 시절 많은 독립운동 관련사건을 무료 변론하였으며, 여러 방면에서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의 이사로서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김성수(金性洙)에게 인수를 알선하였으며, 신간회가 해체되고 사상사건(思想事件)의 변론에서도 제한을 받게 되자,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될 때까지 13년간을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광복이 되면서 잠시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고, 1946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을 지냈다. 1948년 초대 대법원장,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이 되어 195770세로 정년퇴임하였다. 정년퇴임 뒤에도 재야 법조인으로서 활약했으며, 1955년 고려대학교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0년 자유법조단 대표, 1963년 민정당(民政黨)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 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대표최고위원으로 윤보선(尹潽善)ㆍ허정(許政)과 함께 야당통합과 대통령 단일후보 조정작업 등 야당활동을 전개하였다. 6·25전쟁 때 다리가 절단되었으나 의족을 짚고 등원할 만큼 강인하고 강직한 성품이었으며, 세태의 변전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곧은 절개는 후인들에게 깊은 감명과 교훈을 주고 있다. 1964113일 간염으로 서울 인현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14.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 - 1947년 여러 정치단체가 합동하여 광복 후의 혼란기에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하여 발족시켰던 중도적 정치조직. 194658일의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좌우합작운동의 부진, 1947719일 여운형(呂運亨)의 피살 등은 중간파세력의 행동통일을 확대, 강화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하였다. 이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19471220일 김규식(金奎植)을 위원장으로 하여 발족한 민족자주연맹은 조선을 민주주의화할 뿐만 아니라 또한 민주주의를 조선화하여야 할 것을 내세우고,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조직체로 발족되었다. 결성준비위원회는 108일 제2차 준비위원회에서 위원장에 김규식, 정치위원회 위원장에 홍명희(洪命憙), 위원으로는 안재홍(安在鴻)ㆍ김명준(金明濬)ㆍ김호(金乎)를 위촉하고, 부서로서는 총무국ㆍ조직국ㆍ전선국ㆍ비서처를 두기로 하고, 재무위원회 위원장 김시현(金始顯) 외 위원 7명 등을 선출하였다. 결성식은 천도교 강당에서 개최되었는데, 중앙과 지방의 대의원 800여 명이 참석하였고, 선언ㆍ강령ㆍ당면정책 및 규약 등을 채택하였다.
  15.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 - 좌우합작을 정치노선으로 하여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발족하였다. 19451121일에 창당한 조선인민당과 19461112일에 창당한 사회노동당에 이어, 1947524일 여운형을 중심으로 세 번째로 창당한 정당이다. 당 조직은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백남운(白南雲)ㆍ이영(李英)ㆍ장건상(張建相), 그리고 중앙위원 72, 기타 중앙감찰위원과 상임위원 등 모두 30명이었으며, 부서로는 사무국ㆍ조직국ㆍ선전국 등을 두었다. 근로인민당은 1947719일 여운형이 암살됨으로써 사실상 와해되었다.
  16. 민주독립당(民主獨立黨) - 19471019일 중간파 세력이 결성한 정당. 19478월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될 조짐을 보이자, 중간세력 중에서 진정한 우익을 자임하는 세력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홍명희(洪命憙)가 준비위원장에 선임되었고, 918일에는 7(안재홍ㆍ김병로ㆍ홍명희ㆍ김호ㆍ박용희ㆍ이극로ㆍ김원용) 간부회의가 열렸고, 21일 정례 준비위원회의에서는 당명을 민주독립당으로 결정하였다.
  17. 우리는 새로운 민주주의 독립국가의 건국대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전민족의 정신단결을 기함, 우리는 전민족이 평화 속에서 정치·경제·문화·사회적으로 평등한 권리와 자유와 행복을 얻기 위하여, 현재의 모든 애국적인 각계 각층의 그 부동(不同)한 요구를 민주주의적으로 조화, 통일하여 그 공통한 요구로 강력히 실천하기로 함. 우리는 일체의 사대주의타성을 청소하고 민족적 자부심과 국가적 자주의식을 고취하여 자력 건설에 노력함, 우리는 동포 상호간의 친화정신을 발휘하며 일체의 종파적 아집과 독선적 태도를 버리고, 무의미한 동족상잔의 행동을 근절하기에 노력함, 우리는 민족자주ㆍ평등의 원칙하에서 연합국에 대한 친선정책을 취하기로 함 - 민족자주연맹의 강령[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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