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8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113) 독립을 향한 선렬들의 가시밭 행군 - 미군정하의 정치단체들

미군정하의 정치단체들

 

(1) 인민위원회 건준은 미군 상륙 후 맥아더포고 제1[1]로 기능을 상실했다.

(2) 민주의원 좌익계가 초청을 거부했기 때문에 우익만의 의회가 됐다.

(3)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남한단독정부 수립에의 포석(?)

(4) 김규식 등의 좌우합작은 여운형 등의 불참으로 전면 우익화 했다.

(5)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 친미 인사 등용, 친미 반공정책 추진

(6) 이승만계는 신탁통치 반대와 반공단독정부 수립을 추진(“독촉” - 독립촉성중앙위원회)[2], 미국과 일본 이용.

(7) 이승만은 115일에 하지 중장은 좌익에 호의를 갖고, 미군정은 공산당에 원조를 계속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스스로 반공운동에 앞장섰다. 분단을 전제로 하는 이 정책에 반대하는 자는 용공으로 몰아, 암살 또는 추방, 투옥 등등으로 견제했다. 여운형, 장덕수, 송진우, 김구 등등이 그 희생자였다고 국민은 듣고 알고 있었다.

 

1947114미국의 트루맨 대통령은 남조선에 친미반공세력을 부식[3] 강화함과 동시에 국련 총회에서 국련 임시 조선위원단 감시하에 남북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안을 가결시켰다.

38선 이북 입국이 북조선 측에 의하여 거부되자 226일에 국련 소총회에서 국련 임시조선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지역내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미국안이 가결되었다.

허다한 곡절을 거쳐 남한단독정부가 성립되고,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을 배경으로 반공국시를 천명했으나 친일은 싫어했다. 그는 반공통일을 염원하여 태극기를 백두산 꼭대기에 세운다. ‘북진통일이다 하며 국민을 격려했다.

 

19178신규식[4] 등을 중심으로 한 한국사회당이 결성되어 스톡홀름에 있는 국제사회주의자 회의에 접촉을 시도했다.

19181이루꿋구 공산당[5] 안에 이루꿋구 공산당 한국지부를 결성했다.

1919년 말 하바로프스크 한인사회당[6]은 본부를 블라디보스독(해삼위)에 옮기고 이름을 고려공산당으로 고쳤다. 이동휘는 레닌’(Lenin)을 만나 그 승인을 얻었다.

19205고려공산당 본부를 상해에 옮겼다.

19206임시정부는 레닌의 볼쉬비키 정부와의 사이에 아래에 기록한 조항들에 합의를 보았다.

 

(1) 한국정부는 공산주의를 채택할 것.

(2) 한국독립군은 볼세비키군 사령부의 지휘 아래 둔다.

(3) 볼세비키 정부는 한국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

(4) 볼세비키 정부는 한국정부에 200만 루불의 원조금을 제공한다.

 

1920볼세비키 정부가 한국임시정부에 제공한 200만 루불이 고려공산당 안에서 행방불명이 되자, 이동휘를 반대하는 여운형, 최창식[7], 조동우, 김단야(金丹冶)[8] 등이 이루꿋구 공산당 한국지부에 연락하여 반고려공산당 운동을 전개했다. 그래서 고려공산당은 제3인터내슈낼의 승인을 취소당했다. 그리고 본부를 치타에 옮겼다.

1920박중화[9], 박이규, 고순흠[10] 등이 서울에서 노동공제회를 조직하고 반제국주의 운동을 기도했다.

1920여운형, 김단야 등은 이루꿋구 공산단 한국지부와 연결하여 고려공산당을 치타에 추방하는 데 성공한 셈인데 그 후에 그들은 국제공산당의 지령을 얻어 상해에서 조선공산당을 조직했다.

19216러시아의 고려공산당은 볼세비키군과 충돌해서 흑룡강사건을 일으키므로 해서 궤멸상태에 빠졌다.

192110국내에서 조봉암, 김약수[11] 등의 신인연맹과 원종린, 황석우[12], 임택룡 등의 흑양회(黑洋會)와 박렬[13], 정우영 등이 합동할 흑조회’(黑潮會)가 발족되었다.

19224조선청년연합회 안의 좌파와 이영, 김영국, 조봉암, 김약수 등은 서울청년회[14]를 조직하고 고려공산당과 접촉했다.

1922홍명희, 박헌영 등은 화요회[15]를 조직하고 상해의 조선공산당과 접촉했다.

1922년 김두희 등은 북풍회[16]를 조직하고 김한원, 원무관은 무산자동회를 조직하고 박숭병은 갈돕회[17]를 조직했다.

19231박렬, 백무(百武) 등 무정부주의자는 풍운회를 조직하고, 김찬[18], 김약수 등 사회주의자는 북성회’(北星會)[19]를 조직했다. 후에 일월회(一月會)로 고쳤다.

19239박렬은 일본 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진행시켰다는 혐의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 무정부주의자들은 분산하여 흑색청년회, 부정()(不遑社), 흑풍회 등을 조직했다.

1923서울청년회는 노동자, 농민대회의 개최를 준비하고 있었다.

19241박원문, 허정숙, 정경명 등은 조선여성동우회[20]를 조직했다.

19244서울청년회의노동대회준비회와 북성회(北星會)의 노동총연맹준비회가 합동하여 조선노동총연맹을 조직했다.

1924북성회는 재일본노동자동맹을 조직했다.

19254조선노동총연맹은 분열되어 서울청년회계()는 적포회(赤雹會), 사회주의자동맹, 경성여자청년회로 되었고 전 북성회(一月會)계는 경성청년회, 경성여자청년동맹을 조직했다.

1925417화요회, 북풍회, 무산청년회, 노동당 등이 통합하여 조선공산당[21]을 조직했다. 주요 참가자는 화요회계의 김재봉[22], 홍증식[23], 박헌영, 조봉암, 홍남표[24], 김찬이었고 북풍회계의 김약수, 고려공산당계의 주종건[25], 유진희, 노동당계의 윤덕희 등이었다.

1925418박헌영, 김단야, 박원근 등은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당청년회를 조직했다.

192512신의주 사건으로 조봉암 등 조선공산당 간부가 검거되었다.

1926서울청년회계의 이영, 김사국[26] 등은 소련공산당 상해극동국에 연락하여 춘원공산당(春園)을 조직했다.

1926김재봉, 홍덕유[27], 강달영[28], 이준태[29] 등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192612조선공산당의 김철수, 조선공산당의 상해파인 한위건[30], 량명[31], 서울청년회계의 이정윤[32], 최창익[33], 정백, 레닌주의동맹계의 고광수[34], 김강, 이인수[35], 한빈, 일월회계의 안광천[37] 등은 조선공산당을 재조직하기 위하여 M.L.당이란 약호로 이름했다.

19282조선공산당에 대한 제3차 검거가 있었다.

19288조선공산당에 대한 제4차 검거가 덮쳤다.

192811만주지방독립군의 좌익이 중심이 되어 국민부’(國民府)[38]가 조직되었다.

1928이홍근, 박석홍, 육홍근 등 무정부주의자가 재조직을 시도했다. 일부 무정부주의자는 신간회 운동을 방해했다.

19293만주의 국민부를 중심으로 조선혁명당[39]이 조직되었다.

1929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당원에 대한 대량검거 때문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해체상태에 빠졌다.

1929안상훈[40]45명이 고려공산당을 재건했으나 검거로 끝났다.

1930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은 당원검거로 해체상태가 됐다.


[각주]

  1. 조선인민에게 고함.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포고함.
    일본국 정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항복은 우 제국(諸國) 군대간에 오랫동안 속행되어온 무력투쟁을 끝냈다.
    일본 천황과 일본국 정부의 명령과 이를 돕기 위해 그리고 일본 대본영의 명령과 이를 돕기위해 조인된 항복문서 내용에 따라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
    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리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조선 인민은 점령 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자기들의 인권 및 종교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는 것을 보장받는다. 이러한 목적들을 실시함과 동시에 조선 인민의 적극적인 지원과 법령준수가 필요하다.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으로 나는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그곳의 조선 주민에 대하여 군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은 점령조항을 발표한다.
    1-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정부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나의 관할을 받는다.
    2- 정부의 전 공공 및 명예직원과 사용인 및 공공복지와 공공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의 유급 혹은 무급 직원 및 사용인과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기타의 모든 사람은 추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기능 및 의무 수행을 계속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해야 한다.
    3- 모든 사람은 급속히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부대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의 안녕을 방해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4- 제군의 재산권을 존중하겠다. 제군은 내가 명령할 때까지 제군의 정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라.
    5- 군사적 관리를 하는 동안에는 모든 목적을 위하여서 영어가 공식언어이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혹은 일본어 원문 간에 해석 혹은 정의에 관하여 어떤 애매한 점이 있거나 부동한 점이 있을 시에는 영어 원문에 따른다.
    6- 추후 포고, 포고규정 공고, 지령 및 법령은 나 혹은 나의 권한하에서 발표되어 제군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구체화할 것이다.
    194597
    태평양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2.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 -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이하 독촉)19451023일 조선호텔에서 각 정당 대표 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되었다. 독촉의 회장으로 추대된 이승만(李承晩)은 독촉이 좌ㆍ우익을 망라하는 남한 내 유일한 정치체가 되어 자신이 민족통일전선의 최고지도자로 부각되기를 의도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 지지를 내세우면서도 임정이 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임정 귀국 전까지 독촉의 조직을 완성하고 좌익세력을 독촉에 포섭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승만은 19451123일 임정 제1진의 서울 도착을 계기로 독촉의 중앙집행위원회 구성을 서둘렀다. 그러나 19451128일부터 시도된 중앙집행위원회 구성은 전형위원 선출 방식에서 갈등을 드러냈다. 여운형(呂運亨)은 전형위원 7명 중 5명이 한국민주당원이라면서 퇴장했다. 조선공산당 측 인사는 한 명도 없어 인민당과 조선공산당은 전형위원회에 불참했다. 임정 세력은 독자적인 활로를 꾀했다. 이승만은 19451213일 자신이 지명한 전형위원들을 소집하여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전형위원회를 진행했지만, 좌파세력은 독촉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임정 세력 역시 임정 인사들을 독촉에 참여시킨 후 임정을 해산한다는 이승만의 계획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별정치위원회라는 독자적인 조직화 방안을 모색했다. 탁치정국 하인 1946115일 독촉은 제2회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임정 세력 중심의 비상정치회의를 흡수한다고 발표했다. 독촉을 주축으로 비상정치회의를 흡수해서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이었다. 1946118일 독촉은 비상국민회의로 개칭하고 이승만에게 최고위원 선출권을 일임했다. 반탁투쟁을 반소ㆍ반공과 연결시키면서 임정 세력을 흡수하고자 한 것이었다. 독촉은 좌·우익 망라, 임정 포섭 등 처음 계획에는 실패했지만 최고지도자로서 이승만을 부각시킨다는 프로그램에는 부응했다.
  3. 부식(扶植) - 영향을 주어 사상이나 세력 따위를 뿌리박게 함
  4. 신규식(申圭植, 1880~1922) - 본관은 고령(高靈). 별명은 신성(申誠)ㆍ신목성(申木聖), 호는 예관(睨觀)ㆍ여서(余胥)ㆍ일민(一民)ㆍ청구(靑丘)ㆍ한인(恨人). 충청북도 청원 출신. 1895년 서울로 유학해 1898년 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에 입학하였다. 2년 뒤 육군무관학교에 진학해 재학 중 학교당국의 부정에 반발하는 모의에 참여했다가 신병으로 고향으로 내려가던 중에 모의가 실행되어 처벌을 면하였다. 졸업 뒤 임관되어 참위(參尉부위(副尉)에까지 진급하였다. 그 뒤 고향에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소식을 듣고 지방 진위대와 연락해 거사를 계획하다가 실패한 뒤 음독자살을 기도하였다. 이 때 오른쪽 눈의 신경이 마비되어 흘려보는 상이 되므로 스스로 예관이라고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는 학회를 조직해 공업계 잡지도 발간하였다. 또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 등 애국계몽단체에도 참가하였다. 중동학교ㆍ청동학교(淸東學校)ㆍ문동학교(文東學校) 등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1909년에는 대종교를 믿고 광산경영도 하였다. 1910년 망국조약의 소식을 듣고 다시 음독자살하려고 했으나 나철(羅喆)에 의해 구원되었다. 이듬 해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신정(申檉)으로 개명하였다. 손문(孫文)이 이끄는 동맹회(同盟會)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가맹해 10월의 무창의거(武昌義擧)에 참가해 신해혁명에 공헌하였다.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기여하였으며, 대종교의 포교를 통해 독립의식의 고양에도 힘썼다. 1915년 박은식과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해 만주와 노령지방의 독립운동가를 연결했으며, 잡지 진단(震壇)을 발행하였다. 19178월에는 스톡홀름 국제사회주의자대회에 한국독립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동제사를 개칭하여 조선사회당을 급조했으나 대회가 무산되자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앞서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T. W.)14개조의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만주와 각지의 독립운동가와 연락하여 길림(吉林)에서 독립선언을 하게 하였다. 이어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조직의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동제사의 지식인 청년그룹으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다. 31운동 이후 9월에 3개 정부를 통합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11월에 법무총장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국무총리대리를 겸임했고, 1921년에는 외무총장도 겸하였다. 1922년 임시정부의 내분이 표면화되어 이승만에 대한 대통령불신임안이 신규식의 불참 속에서 통과되었다. 병상에서 25일간 절식을 하다가 독립을 기원하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5.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은 191995일 이르쿠츠크주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사회주의 단체 전로한인공산당(全露高麗共産黨)을 기원으로 한다. 19199월 전로한인공산당으로 출발하여, 19201월 이르쿠츠크 공산당 고려부, 19207'전로고려공산당 중앙총회'로 명칭을 바꾸었다가, 19215'고려공산당'으로 개칭했다. 정식 명칭은 전로고려공산당이었지만, 이동휘가 상하이에서 결성한 고려 공산당과 대비시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이라 했다.
  6.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 - 1918년 모스크바에 있는 제3국제공산당에서는 극동 방면의 공산주의 선전위원으로 그레고리노프를 파견, 하바로프스크를 활동 근거지로 하여 공산주의 선전을 펴게 하였다. 이 무렵 오랫 동안 독립운동에 전념해 온 이동휘는 항일독립운동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볼세비키 정권의 원조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레고리노프의 원조 아래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고, 연해주와 흑룡강 지방에 8개의 지부를 설치하게 된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민족주의를 배격했던 볼셰비키 정권이, 한인사회당을 원조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눈앞에 닥칠 일본군의 출병을, 한인들의 항일민족운동으로써 막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결성된 한인사회당의 창당 간부로는 위원장 이동휘(李東輝), 부위원장 박애(朴愛, 마다베이), 선전부장 전일(全一), 비서부장 박진순(朴鎭淳, 미하이 ), 정치부장 이한업(李漢業, 李漢榮의 잘못), 교통부장(연락책) 김립(金立) 등이 선출되었다. 그들은 기회를 보아 독립을 선언하고, 레닌 정권의 원조를 얻어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425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한인사회당의 대표자대회를 열어, 박진순ㆍ박애ㆍ이한영의 3명을 사절단으로 뽑아 소련의 코민테른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 3명은 모스크바에 가서 한인사회당의 코민테른 가입을 선언하고, 한인사회당의 당원 명부를 코민테른당국에 제출함으로써 막대한 독립운동자금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 이동휘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상해로 왔으며,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던 박진순 등의 사절단은 이르쿠츠크에서 자금피탈사건을 겪고 상해로 와 다시 모이게 되었다. 상해에 모인 한인사회당 간부들은 민족 진영의 일부 독립운동자들까지 규합, 19215월 고려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7. 최창식(崔昌植, 1892~1957) - 서울 출신. 일찍부터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펴다가 191612월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18년 오성학교(五星學校) 교사로 있을 때 학생들에게 민족의식ㆍ독립주의ㆍ주인의식을 고취하다가 문제가 되어 금고 1년형을 선고받았다. 1919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그뒤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업무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의 초대 경기도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45월 제10대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어 1926818일까지 임시의정원에 참여하다가 국무위원(內務長)에 임명되었다. 19274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193011치안유지법위반으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8. 김단야(金丹冶, 1901~1938) - 본명은 김태연(金泰淵). 경상북도 김천 출신. 출생연도는 1899년과 1900년 설이 있지만, 김단야 자전(自傳)나는 1901116일 남한의 한 중농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적혀 있다. 1906년 서당에서 2년 동안 한문을 수학하였다. 19084월 고향에 있는 기독교 계열 학교인 개진학교(開進學敎)에 입학하였다. 19094월 진명학교(進明學敎)로 옮겼고, 19104월에는 영진학교(永眞學敎)에 들어가 1914년에 졸업하였다. 19153월대구 기독교 학교인 계성학교(啓聖學敎) 고등보통과에 입학, 191612월 일본인 교사와 미국인 선교사인 학교교장에 반대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을 당하였다. 이 일로 기독교를 믿던 가족들과 심하게 다툰 끝에 19171월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서 6개월 동안 공부하였다. 그 해 9월 서울의 배재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상해로 망명하여 공산당 활동을 하였다. 19224월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국내로 이전하기 위해 입국하다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신의주지법에서 징역 16월을 선고받았다. 19241월 출옥하여 잠시 고향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와, 박헌영(朴憲永)ㆍ임원근(林元根)과 함께 동아일보조선일보기자로 활동하였다. 일제 경찰의 탄압을 피해 192912월 서울을 떠나 1930년 중반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근무하였다. 또한 19307월 무렵 상해에 근거지를 두고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지도하였다. 1934년 박헌영의 전()부인 주세죽(朱世竹)과 결혼하였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과장으로 근무하였다. 소련에 사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사회주의의 위대한 승리(외국노동자 출판부, 1933)·어떻게 콜호즈원은 유족하게 되었는가(외국노동자 출판부, 1934) 등의 팸플릿을 만들었다. 193711월 일제의 밀정이란 혐의를 받고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법정에 의해 1급 일제 밀정으로 판결받았으며 1938년 사형을 당하였다.
  9. 박중화(朴重華) -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 교장을 역임하였다. 19074월 양기탁(梁起鐸)ㆍ안창호(安昌浩)ㆍ전덕기(全德基)ㆍ이동휘(李東輝)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신민회의 합법적 청년단체로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발기인이 되고, 청년학우회 한성연회(漢城聯會)의 회장을 거쳐 청년학우회 제2대회장이 되어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1909년 신민회의 비밀 청년단체로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에 김명식(金明植)ㆍ박이규(朴珥圭) 등과 함께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를 조직하여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0. 고순흠(高順欽, 1893~1977) - 제주도 출신.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제1기로 졸업하였다. 1912년 서울로 유학, 19143월에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다. 19204월 서울에서 조선노동공제회가 창립되자 서무책임자로 활동했는데, 특히 조선노동공제회 내의 볼셰비키파에 반대해 이들을 폭행하고 회관 간판과 서류를 불태웠다. 이 사건으로 19228월에 검거되어 2주간 구금되었다. 이즈음 제주도에서 제주해녀조합 설립운동에 참가하였다. 1924년 대판에 가서 최선명(崔善鳴)이 조직한 남흥여명사에 참여하였고, 대판의 사카이시()에 살면서 조선일보 사카이지국장도 겸하였다. 19462월 재일본조선인연맹 대표자로서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석하였다. 그 뒤 재일거류민단 제2대 단장을 지냈다.
  11. 김약수(金若水, 1890~1964) - 부산 동래 출생. 두전(枓全) 또는 두희(枓熙)라는 별명을 쓰기도 하였다. 서울의 휘문의숙과 경성공업학교를 졸업하였고, 1918년에 국내에서 활동하기 위해 김원봉(金元鳳)ㆍ이여성(李如星) 등과 함께 만주ㆍ상해를 거쳐 난징(南京)에서 진링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였다. 31운동의 소식이 중국에 전해지자 김원봉과 헤어져 이여성과 함께 귀국하였다. 19209월에는 박중화(朴重華)ㆍ박이규(朴珥圭) 등과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를 창설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회과에 적을 두고 192111월 무정부주의자 박렬(朴烈)ㆍ장상중(張祥重)과 함께 흑도회(黑濤會)를 결성하였으나, 사상적 대립으로 따로 북성회(北星會)를 조직하여 기관지 척후대대중시보등을 발간하는 한편, 조선고학생동우회에도 관계하다가 1922년 귀국하여 국내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하여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에 반대하는 한국민주당의 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6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 무기휴회로 들어가는 상황에서 한국민주당이 좌우합작위원회의 토지정책을 반대하는 보수적 성향을 보이자, 194610월 탈당하여 김규식(金奎植)을 총재로 한 민중동맹(民衆同盟)의 창설에 참여하여 상임위원직을 맡음으로써 중간파노선을 취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 지명되었다. 19475월에는 나승규(羅承奎) 등과 분쟁이 생겨 민중동맹에서 탈퇴, 조선공화당을 창당하고 서기장에 취임하였다. 1948510총선거 때 경상남도 동래선거구에서 출마하여 제헌의원에 당선, 초대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국회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소장파 의원의 지도적 구실을 하다가, 19496월 남로당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복역하던 중 625전쟁이 일어나자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1955년에는 북한의 인민경제대학 특설반에 입교하였고,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겸 집행위원을 역임하였으나 1959년 반당반혁명분자로 숙청되어 평안북도 벽지로 추방되었다.
  12. 황석우(黃錫禹, 1895~1959) - 아호는 상아탑(象牙塔). 서울 출신.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에서 수학하였다. 1920폐허, 1921장미촌의 창단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28년에는 조선시단을 주재, 발행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한때 교육계에 투신하여 국민대학 교수를 지낸 바 있다. 우리 문단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19매일신보시화(詩話)(9)조선시단의 발족점(發足點)과 자유시(自由詩)(11) 등의 평론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1929년에는 그의 유일한 시집인 자연송및 무명의 여러 문학 청년들의 작품을 모은 청년시인백인집을 낸 바 있다. 시집 자연송은 제목에서도 암시되고 있듯이, 태양ㆍ달ㆍ별 등 천체나 꽃ㆍ이슬과 같은 자연물들을 주된 소재로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면을 보여준다. 그는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폐허장미촌동인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한때 그의 작품에 퇴폐적인 어휘가 많이 쓰인 것으로 인하여, 그를 세기말적 분위기에 싸인 폐허동인의 대표격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13. 박열(朴烈, 1902~1974) - 본관은 함양(咸陽). 초명은 박준식(朴準植) 또는 박혁(朴爀). 경상북도 문경 출신. 함창보통학교(咸昌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1917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京城第二高等普通學校)에 입학, 1919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퇴학당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수학하였다. 이 무렵 일본의 사회운동가인 오스기[大杉榮]ㆍ사카이[堺利彦] 등과 접촉하며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하였다. 1921년 김판국(金判國)ㆍ김약수(金若水)ㆍ조봉암(曺奉岩)ㆍ서상일(徐相日) 20여 명과 함께 신인연맹(新人聯盟)과 흑양회(黑洋會)를 통합하여 흑도회(黑濤會)를 창설하여 사회주의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2년 김약수 등 공산주의계열과 분리,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하여 풍뢰회(風雷會, 일명 黑友會)를 결성하였으며, 이 단체의 기관지로 흑도(黑濤)불령선인(不逞鮮人)현대사회등을 발간하였다. 1923년 비밀결사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였다. 9월로 예정된 일본 황태자 결혼식을 기하여 일본 천황을 비롯한 일본 황실요인을 일거에 폭살시키려고 자기의 애인인 가네코[金子文子]와 같이 거사계획을 추진하던 중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가 발생하고 불령사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붙잡혔다. 1926년 대역죄로 일본 대심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으나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222개월만에 석방되었다. 1946년 일본거류민단의 전신인 신조선건설동맹(新朝鮮建設同盟)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재일거류민단으로 개편되자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직후 귀국하여 장학사업에 종사하던 중 625 때 납북되었다. 저서로는 신조선혁명론이 있다.
  14. 서울청년회 - 31운동 후 전국에는 각종 청년운동 단체가 수없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는 청년운동 단체를 통합하는 연합회가 조직될 가능성이 높았는데, 이 경우를 대비해 연합체에 대표를 파견해 주도권을 장악하고 또한 가맹 자격을 가진 새로운 청년 단체를 조직하기 위해 이득년(李得䄵)ㆍ김한(金翰)ㆍ김사국(金思國)ㆍ장덕수(張德秀) 등이 주도하여 결성하였다. 창립 당시 주요 간부는 이사장에 이득년, 이사에 오상근(吳祥根)ㆍ김명식(金明植)ㆍ김사국ㆍ장덕수 등 7인이었다. 창립 초기는 민족주의적 경향을 가진 청년 단체였다. 그러나 점차 사회주의가 고조되어가는 사회 풍조 속에서 장덕수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계와 김사국·김한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계로 대립하였다. 1922년 가을부터 서울청년회는 이영(李英)ㆍ김사국ㆍ한신교(韓愼敎) 등에 의해 더욱 좌경화되었고, 강령을 역사적 진화의 필연적인 신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여 돌진한다. 또 계급적 자각과 단결로써 무산대중 해방운동의 전위임을 기한다라고 개정하였다. 한국사회운동사상 많은 활동과 역할을 남긴 서울청년회는 1929831, 조선청년총동맹의 중앙청년동맹에 합류하면서 발전적으로 해체하였다.
  15. 화요회(火曜會) -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가 개칭되어 성립된 단체로, 19241119일 신사상연구회 간부회는 명칭을 화요회로 개칭하고 종전의 연구단체에서 행동단체로 전환할 것을 결의했다. ‘화요회라는 명칭은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의 생일이 화요일인 데서 유래되었다. 화요회는 1925417일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창립에 주도적인 활동을 했으며, 이 단체의 김찬ㆍ김재봉ㆍ윤덕병ㆍ홍덕유 등이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김재봉은 제1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으며, 김찬은 화요회와 조선공산당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화요회는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는 데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조선기자대회(朝鮮記者大會)를 이용했고,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全朝鮮民衆運動者大會)를 계획했다. 서울청년회와 반목 관계에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북풍회(北風會)와 같은 처지였다. 북풍회와 갈등이 있었으나, 북풍회는 1925325일 임시총회에서 화요회와의 합동을 결의했다. 두 단체는 조선노동당ㆍ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와 더불어 4단체 합동위원회를 공동운영했다. 이어 1926414일에 이르러서는 정우회(正友會)로 발전적 해체를 보았다.
  16. 북풍회(北風會) - 재일 한국인 사회주의단체인 북성회(北星會)의 국내지부로서 19241125일에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운동단체. 북풍회는 창립과 동시에 코민테른의 블라디보스토크 극동기관 책임자 인데르슨에게 한국의 유일한 사회주의자 통일전선임을 과장해서 보고하였으나 승인받지 못하였다. 북풍회라는 명칭은 북풍이 한번 불게 되면 빈대나 모든 기생충이 날아가버린다.’는 속언에 근거한 것이었다. 여기서 북풍은 마르크스주의 혹은 사회주의 이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당시의 국내 군소 단체를 북풍회의 위력으로 통일한다는 의미였다. 북풍회는 한국에서의 사회주의 목표 실현을 위해서는 한일무산자계급(韓日無産者階級)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코민테른은 화요회 주도의 조선공산당을 정식 승인한 반면 북풍회와 서울청년회 등은 공산단체로서만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들 단체의 활동이 조선공산당을 능가할 때는 새로운 당을 만들 것이라는 결정이 있자 북풍회와 화요회와 서울청년회의 반목은 더욱 깊어졌다. 19255치안유지법이 조선에서도 실시되자 민족주의자들이 우세하게 되었고, 여러 차례의 공산당 검거로 사회주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동시에 민족협동전선론이 대두되자 북풍회는 1926414일에 이르러 정우회(正友會)로 발전적 해체를 보았다.
  17. 갈돕회 - 일제 강점기에 장택상 등이 가담하여 만든 고학생 자조 단체 갈돕회가 운영한 동명의 순회 극단. 근대 학생극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 김찬(金燦, 1894~?) -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중앙간부, 조선청년총동맹 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본명은 김낙준(金洛俊). 일명 정만(鄭滿), 권일수(權一秀), 서여림(徐如林), 황기룡(黃起龍), 수암(水岩). 함경북도 명천 출신이다. 한문을 배우다가 함북 경성고등소학교, 성진(城津)중학교, 명천 진성(進成)중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12년 경성(京城)의학전문학교에 입학, 1년간 다니다 중퇴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명치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1년 뒤 명치대를 중퇴하고 북간도 국자가도립중학(局子街道立中學)에 입학했으나 다시 1년 만에 중퇴하였다. 1917년 일본 동경에서 모직공장에 직공으로 취직했고, 이 시기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읽었다. 19194월 명치대학에 재입학하고, 그 해 일본 중앙대학(中央大學) 정치과로 전학하여 2년간 수학한 뒤 중퇴하였다. 중앙대 재학중 일본인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였다. 1920년 하반기 이르쿠츠크 소재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출두, 극동민족대회 일본인 대표 출석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 해 재일 유학생들로 구성된 고학생동우회에 가입하였다. 192111월 동경에서 흑도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31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간부와 국내에서의 공산당 조직에 관해 협의하였다. 1925121차 조선공산당검거사건때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망명 간부들과 함께 조선공산당 해외부를 결성하고 책임자가 되었다. 1926610만세운동을 계획·지도하였다. 19277월 북만주로 활동 근거를 옮겼다. 101차 간도공산당검거사건으로 파괴된 조공 만주총국(화요파)의 재건을 주도하였다. 19315월 국내에 잠입했다가 서울에서 검거되었다.
  19. 북성회(北星會) - 흑도회(黑濤會)에서 분리한 김약수(金若水)ㆍ김종범(金鍾範)ㆍ송봉우(宋奉瑀)ㆍ변희용(卞熙鎔)ㆍ이여성(李如星) 60여 명이 19221226일 조직하였다. 북성회는 회원 민태흥(閔泰興)ㆍ현칠종(玄七鍾)ㆍ이호(李浩) 등에게 1923520일 서울에 한국내 활동의 전진기지로 토요회(土曜會)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몇 달 후인 동년 828일 토요회는 별다른 성과가 없이 해체되자, 그 해 1023일 서울에서 김약수·김종범·마명(馬鳴이헌(李憲김재명(金在明) 160여 명이 모여 건설사(建設社)를 조직하였다. 일본에 남아 있던 북성회원들은 192513일 새로운 대중본위의 신사회 건설을 위해 더욱 확대, 강화된 조직체를 가지기 위해 북성회를 해산하고 일월회를 조직하였다.
  20.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 - 1924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주의여성단체. 박원희(朴元熙)ㆍ정종명ㆍ김필애(金弼愛)ㆍ정칠성(丁七星)ㆍ김현제(金賢濟)ㆍ홍순경(洪順卿)ㆍ오수덕(吳壽德)ㆍ고원섭(高遠涉)ㆍ우봉운(禹鳳雲)ㆍ지정신(池貞信)ㆍ주세죽(朱世竹)ㆍ김성삼(金聖三)ㆍ허정숙(許貞淑)ㆍ이춘수(李春壽) 등이 192454일 발기하여, 510일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그들은 무산계급의식을 고취하는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사회주의계의 파벌분쟁과 연결되어 경성여자청년동맹과 경성여자청년회로 분파되어 활동이 미진하여졌다. 1926년 민족유일당운동이 추진되는 가운데 동경유학생 황신덕(黃信德)ㆍ이현경(李賢卿)ㆍ정칠성 등이 귀국하여, 여성동우회를 중심으로 사회주의여성운동을 통합하여 활성화되어 갔다. 그 뒤 1927년 여성단일단체인 근우회(槿友會)가 조직되자, 이를 중심으로 사회주의여성운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21.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 1925417일 황금정 아서원에서 박헌영 등 19인이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다. 조선공산당은 1926610일 순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민중봉기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조선공산당은 1백여 명의 당원이 체포되었다. 조선공산당은 192511신의주사건1926610만세운동사건 등 ‘1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조직에 치명적 손실을 받았지만 파괴된 조직을 정리하고 서울파 사회주의그룹인 고려공산동맹을 가입시켜 당세의 확장을 이루어 1926126일 조선공산당 2차 당대회를 개최하였다. 2차당 대회는 민족운동(民族運動)에 관()한 방침(方針)을 통해 민족주의자의 정당을 형성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은 19272월 신간회의 결성으로 구체화되었다. 이후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에 따라 19303월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193110,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이 각각 해체되었다. 19254월 창건되어 192812월 해체된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위한 각 분파들의 당재건운동은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했지만 1920년대 말부터 1940년 초에 이르는 당재건 운동의 결과는 19458월 해방 직후 박헌영 등 과거 화요파가 중심이 된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통한 조선공산당의 재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22. 김재봉(金在鳳, 1891~1944) - 경상북도 안동 출신. 1908년 대구계성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공업강습소 염직과 3년을 마쳤다. 1920해주일보(海州日報)경성지사에서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16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다이쇼(大正) 8년 제령 제7위반으로 6개월간 복역하였는데, 이 때 민족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사상을 전환하였다. 1922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여운형(呂運亨)ㆍ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참가하였고, 11월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베르흐네우딘스크연합대회에 참가하면서 이르쿠츠크파에 가담하였다. 19235월 당과 공청(共靑)을 조직하라는 코르뷰로[高麗局]의 지시를 받고 경성으로 돌아와, 김찬(金燦)의 소개로 신백우(申伯雨)ㆍ원우관(元友觀)ㆍ윤덕병(尹德炳)ㆍ이영(李英)ㆍ임봉순(任鳳淳)ㆍ김유인(金裕寅) 등과 접촉하였다. 이후 코르뷰로 국내부에서는 대외활동용으로 19237월 신사상연구회를 조직, 9월부터 각 지방을 돌며 강연을 하면서 지역의 기존 단체들과의 연계를 통한 연결고리 확보에 노력하였다. 그 노력의 결실 가운데 하나가 19244월 조선노농총동맹의 결성이다. 한편, 김재봉 등은 19254월 경성부 황금정에 있는 중국집 아서원(雅敍園)에서 조선 공산당을 독자적으로 결성하였다. 이 때 김재봉은 비서부위원 겸 책임비서가 되었다. 김재봉이 지도하던 1차 조선공산당은 조동호(趙東祜)가 기초한 당의 강령과 규약을 토의하고, 조동호와 조봉암(曺奉岩)의 코민테른 파견, 조선노농총동맹의 분리 결정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차 조선공산당192511신의주사건으로 무너졌는데, 책임비서인 김재봉은 12월 뒷일을 강달영(姜達永) 5인의 후계 간부에게 일임한 직후 검거되어 6년간 옥고를 치렀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3. 홍증식(洪璔植) - 경기도 출생. 보통학교 졸업 후에 독학으로 공부했다. 1915년부터 1920년 사이에는 주로 북경에 체재하면서 서울, 상해 등지를 왕래하여 이시영(李始榮)ㆍ이동녕(李東寧)ㆍ조성환(曺成煥) 등과 접하며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19202월 노동문제연구회에 참가하였고, 4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창립회원으로 교육부 간사를 맡았다. 19211월 서울청년회 창립위원, 19213월 조선노동공제회 총간사를 맡았는데, 9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영업국장으로 재직하다가 19245월 이상협과 함께 퇴사하여 1925년 조선일보 영업국장을 지냈다. 그 동안인 19254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19346월 여운형이 조선중앙일보를 주식회사로 만들면서 취체역 영업국장이 되었다. 광복 후 조선인민보를 인수했는데 이 신문은 신탁통치를 찬성했다가 우익 청년 데모대의 습격을 여러 차례 받았다. 1946326일에는 일부 서울시민들이 식량 배급을 청원하는 기사를 선동적으로 다루었다가 홍증식과 편집국장 김오성(金午星)이 구속되어 95일 군정재판에서 3만원 벌금에 징역 3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그 후 월북하여 19488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576월에는 제2기 대의원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24. 홍남표(洪南杓, 1888~1950) - 이명은 유포심(劉怖深)ㆍ진덕삼(陳德三)ㆍ이극화(李克和)ㆍ김지강(金志剛). 경기도 양평의 빈농가에서 출생하였고, 서울에서 중앙학교를 졸업하였다. 19094월 항일단체 청년동지회 결성에 참여, 19191월자유단(自由團) 결성에 참여하여 자유보를 발행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하여 선전활동에 종사하다 6월 만주로 망명하였다. 8월한족신보사(韓族新報社)를 건립하고 새 배달이라는 일간신문의 책임주필로 활동하였다. 10월 재만(在滿) 독립운동자후원회를 조직, 위원장이 되었고, 12월 일제의 간도학살을 피해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였다. 19206월 비밀리에 귀국하던 중 중국 안동현(安東縣)에서 검거되었다. 19236월코르뷰로(조선공산당 중앙총국) 국내부에 가입하였고, 11월 화요회 중앙위원을 지냈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건에 참가하여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6610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검거를 피해 9월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기고 중국공산당 상해한인특별지부를 조직, 서기가 되었다. 19281월 재관내(在關內) 한국독립당촉성연합회 상해촉성회 당단서기(黨團書記) 겸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29년 조선인과 중국인 등이 모여 결성한 동방반제국주의동맹 위원이 되었고, 11월 재만조선인반일본제국주의동맹을 지도하였다. 19303월 조공 만주총국(화요파)에서 활동하였고, 19311월 북만특위 위원이 되었으며, 9월 중국혁명호제회(互濟會) 강소성위원회 범남구 한인분회에 가입하였다. 12월 중국공산당 상해한인지부 책임자로 취임하였고, 상해 한인반제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서무부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19321월부터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코뮤니스트를 출판하는 데 관여하다가 12월 체포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경기도 양주에서 농업에 종사하였고, 1943년 화요파 성원들과 함께 조선공산주의자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19447월 다시 검거되었다. 19459월 조선인민공화국 교통부장으로 선임되었고,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참석하여 의장단의 1인으로 선출되었다. 19461월 국내 정치세력의 통합을 위해 4당 회합이 열렸을 때 인공측 대표로 참석하였다.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의장단의 1인으로 선출되었고, 11월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미군정에 체포ㆍ투옥되기도 하였다. 이후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을 역임하였다. 남로당 출신 가운데 가장 오랜 공산주의 활동 경력을 가졌던 그는 195063일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25. 주종건(朱鍾建, 1895~?) - 함경남도 함흥 출신. 1912년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17년 동경제국농과대학(東京帝國農科大學) 실과(實科)를 졸업하고, 같은 해 귀국하여 1년간 함남도청에서 직원으로 일했다. 191812월 퇴직 후 상업에 종사하였다. 19215월 상해파 고려공산당 대표자회의에 국내대표 자격으로 참가해 중앙위원이 되었다. 192211월에는 동경으로 가서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다. 시대일보사에 입사한 뒤 19242월 조선공산주의운동의 통일을 위해 열린 ‘13인회의에 상해파를 대표해 참석하였다. 4월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서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고, 7월에는 오르그뷰로에서 국내로 파견된 이성(李成)과 회견, 해외 공산주의자들이 국내 당조직 건설작업에 간섭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19254월 조선공산당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12월 신의주경찰서에 검거되어 신의주지법과 경성지법에서 심리를 받았다. 19273월 이후 병보석으로 출옥한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1927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선공산당후원회를 조직했고, 그 후 모스크바로 가서 국제 혁명자후원회(모플)에서 활동하였다. 이 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26. 김사국(金思國, 1892~1926) - 충청남도 논산 출신으로, 별명은 해광(解光)이다. 1907년 아버지를 여의고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한학을 공부한 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0년 일제에 나라가 강제로 합병되자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였으며, 1919년 국민대회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11월에 창립된 서울청년회 결성을 주도하고, 4월부터 조선청년회연합회위원, 조선노동대회의 간부로 활동하다 10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건너간 직후 오일신보(五一新報)를 발기하고 흑도회(黑濤會) 결성을 주도하였다. 12월에는 재일유학생 중심의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를 조직하였다. 1922년 봄 일본에서 귀국하자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노동자ㆍ농민의 사상단체를 조직하며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192211월에 일어난 신생활사(新生活社) 필화사건이 계기가 되어 아우 김사민은 투옥되었고 김사국은 만주로 건너갔다. 서울파 공산주의그룹은 19232월 고려공산동맹 창립을 위한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고 김사국ㆍ김영만ㆍ이영ㆍ임봉순ㆍ장채극ㆍ김유인ㆍ강택진 등 17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하였다. 김사국을 대표로 선임하여 블라디보스톡 코민테른집행위원회 원동부에 파견하였다. 김사국은 블라디보스톡에 파견되었다가 19233월 용정(龍井)에 동양학원(東洋學院), 영고탑(寧古塔)에 대동학원(大同學院)을 설립하고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중국 관헌의 탄압으로 재차 러시아로 망명하였지만 폐병이 악화, 귀국하여 19245월 통일적 당 건설을 위해 ‘13인회를 주도하였다. 12월 사회주의자동맹 창립에 참여하였다. 이를 계기로 1920년대 우리 나라 사회주의운동의 양대산맥이 형성되었다. 이후 1924126일에 결성된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 19254월 전조선노농대회 준비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조선사회운동자동맹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달 고려공산동맹 대회가 개최되었고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활발히 활동하는 등 선두에서 조선공산당과 대립하는 파벌투쟁을 전개하였다.
  27. 홍덕유(洪悳裕, 1887~1947) - 이명은 홍소죽(洪蘇竹), 경기도 수원 출신. 1910년대에 시베리아와 만주일대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귀국하여 1920조선일보경리부장, 공무국장을 지냈다. 192211월 민립대학기성준비회가 결성될 때 여기에 참가하여 준비위원이 되었다. 19237월 사상단체 신사상연구회 결성에 참가하였다. 19249월 조선기근대책강구회 준비위원이 되었다. 192411월 사상단체 화요회에 참여하였다. 192632차 조선공산당의 검사위원회 책임자,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달 조선공산당 경성부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19266610만세운동을 계기로 촉발된 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30년 출옥한 이후 중앙일보사에 입사하여 경리부장, 공무국장을 역임하였다. 1943년 화요회그룹 출신자들의 비밀조직 공산주의자그룹의 결성에 참가하였다. 19459월 서울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5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참석하고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46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 때 상임위원 및 조직부장이 되었다. 194611월에 결성된 남조선노동당의 중앙감찰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7625일 사망하였다.
  28. 강달영(姜達永, 1887~1942) - 경상남도 진주 출생. 6세때부터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31운동때 농민과 청년의 선두에서 지도하다가 투옥되어 16개월간 복역하였다. 1921년 조선노동공제회 창립에 참가하였으며, 19244월 조선노농총동맹 결성과 함께 중앙위원에 피선되었다. 19254월에는 조선공산당 결성과 함께 당원으로 가입하였으며, 11월에 일어난 신의주사건으로 제1차조선공산당이 와해되자 1926년 초 제2차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강달영이 속한 당의 정치목표는 공산당의 영도하에 사회ㆍ민족 진영을 통합하여 국민당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강달영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만의 대회를 만주지방에서 소집하여 국민당을 조직하고, 그 본부를 해외에, 지부를 국내에 두고 공산당원을 이 조직체에 투입, 운영하는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을 구상하였다. 강달영은 순종의 인산을 기하여 제231운동을 일으키려는 610만세운동을 은밀히 주동적으로 진행하다가 계획이 탄로되어 제2차조선공산당은 와해되었다. 19267월 서울본정(本町)에서 아이스크림·바나나 장사꾼으로 변장하고 다니다가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옥중에서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이상증세를 일으켜 1934년에 출옥하였으나 끝내 회복 하지 못하고 죽었다.
  29. 이준태(李準泰, 1892~?) - 본적은 경상북도 안동(安東). 이명은 권혁(權赫) 또는 권철(權哲). 호는 일봉(一峰). 19198(음력) 고향 사람인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북 교통부장 안상길(安相吉), 만주일보신문기자 김재봉(金在鳳)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집운동에 가담하였다. 19221월 김한(金翰), 신백우(申伯雨) 등과 서울에서 사회주의사상단체인 무산자동지회 발기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3월 무산자동지회와 신인동맹회가 합동하여 만든 무산자동맹회의 상무위원이 되었고, 기관지 무산자(無産者)발행에 노력하였다. 이 무렵 김한ㆍ신백우 등이 활동하던 조선공산당(중립당)’에 가담하였다. 10월에는 조선노동연맹회에 관계하면서 지방의 노동자 농민단체를 조선노동연맹회에 가입시켰다. 19233월 전조선청년당대회에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192311월 고향으로 내려가 권오설(權五卨) 등과 함께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하였다. 19251월 안동에서 사회주의사상단체인 화성회(火星會)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그곳에서 보천교성토회(普天敎聲討會)’ 개최를 이끌었다. 19254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후보가 되었고, 10월 조선노농총동맹 내 당 야체이카, 노농부 프랙션에 배속되었다. 11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사건이 발생하자 당원 규합을 담당하면서 12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정되었다. 19262월에는 조선공산당 비서부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6‘6월운동을 계기로 발생한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검거 뒤 경찰의 고문행위를 폭로하기 위해 다른 검거자들과 함께 연명으로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고소하였다. 1928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194512월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대회에 안동군 대표로 참가,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30. 한위건(韓偉健, 1896~1937) - 가명은 이철악(李鐵岳)ㆍ이철부(李鐵夫)ㆍ이광우(李光宇)ㆍ이영식(李永植) 등 여러 가지를 사용했다. 함경남도 홍원 출신이다. 1914년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했고,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1931일 당일 파고다공원에서 학생대표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4월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해 내무위원과 함경도 의원이 되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건을 비판했으며, 10월 이후 신대한의 발간에 관여하면서 상해 임정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1920년 귀국한 즉시 일본으로 유학해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했다. 192111월 워싱턴회의 개최에 즈음해 조선유학생회 주최로 만세시위운동을 시도했다. 19241동아일보에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이 발표되자 재동경 조선인대회를 개최해 동아일보사의 사죄 및 논설 취소를 요구했다. 1924년 가을 귀국했고, 10시대일보이사가 되었다. 19253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고 가을에 이덕요(李德耀)와 결혼했다. 192611월 정우회에 가입해 안광천과 함께 정우회 선언을 발표했다. 이와 병행해 제3차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12월 선전부원이 되었다. 1927년 초 신간회 발기에 참여했으며, 2월의 창립총회에서 간사로 활동했다. 19279월에는 제3차 조선공산당 선전부장이 되었다. 1930년경 북경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고, 이후 이철부라는 중국식 이름을 사용했다. 1931년 가을부터 북평반제동맹 내 당·공청 프랙션 서기로 활동했다. 1933년 중국 국민당 정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석방된 후 중국공산당 하북성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다. 1933년 말 중국공산당 당원 장수암(張秀岩)과 결혼했다. 193512월 천진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반대하는 항일집회를 개최하고 항일시위운동을 지도했다. 1936년 봄 좌경노선이 청산되고 모택동(毛澤東) 노선이 확립되면서 유소기(劉少奇)가 북방국 서기로 천진으로 부임하자, 하북성위원회 서기 겸 천진시 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375월 연안에서 개최된 소비에트구역 당대표 대회에 국민당지구 대표로서 참석했다. 7월 대회 기간 중 건강상 문제로 섬감녕(陝甘寧) 서북국으로 배치되었다가, 대회가 끝난 후 연안의 요양소에서 사망했다.
  31. 양명(梁明, 1902~?) - 경상남도 통영 출신. 거제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93월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무렵 북경(北京)으로 가서 북경대학(北京大學) 문과에서 수학했다. 19251월 북경에서 결성된 혁명사(革命社)에 가입하고 잡지 혁명발행에 참여했다. 19258월 귀국해 조선일보사 정치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안광천(安光泉)의 소개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19263월 공산주의운동의 통일을 위해 레닌주의동맹(Leninist League)’을 결성하는데 참여했다.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대회에서 중앙위원 후보로 선임되었고 고광수(高光洙)의 뒤를 이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82월의 제3차 조선공산당검거 때 상해로 망명하여 홍남표(洪南杓)가 책임비서였던 상해 야체이카의 위원이 되었다. 19286월 코민테른 6차대회에 대표로 파견되어 10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9294월 이른바 ‘ML’(3차 조선공산당) 간부들과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여 당재건 방침을 협의했다. 상해 적색구원회(모플) 지부로 가서 운동자금을 마련할 것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대한 선언서 발표 등의 임무를 띠고 상해로 갔다. 19303월 상해에 도착한 고경흠(高景欽)과 함께 조선공산당 선전물의 근거지를 동경(東京)에 만드는 문제를 협의했다. 193112월부터 1932815일까지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1932년 모스크바에서 조선 관련 글을 써서 코민테른 간행물 민족식민지문제 자료에 실었다. 1934년 모스크바에서 외국출판사 한글 담당 직원이 되었다.
  32. 이정윤(李廷允, 1897~?) - 별명은 정두(廷斗현수(賢樹윤수(允樹). 전라북도 순창 출생이다.서울 오성(五星)학교를 졸업하고, 동경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 경도(京都) 동지사(同志社)대학 예비과, 동경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과를 다녔다. 192111월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학우회 총회에서 조선독립을 선언하는 문서를 배포하다 검거되어, 다음 해 1월 동경지방재판소에서 금고 9개월을 선고받고 11월 만기 출옥하였다. 김약수ㆍ김종범 등이 조직한 초기 사회주의사상단체인 북성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41년 말부터 정희영(鄭禧泳)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411월에는 서중석(徐重錫)과 함께 공산주의자협의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해방 직전 적기파(赤旗派)라고 불리는 조직을 배경으로 영등포, 전라남북도 등지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9453월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었다가 815를 맞아 석방되었다. 1948년 후반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 이듬해 다시 서울에 왔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625전쟁 중에 월북하였다.
  33. 최창익(崔昌益, 1896~1957) - 함경북도 온성 출생으로 이명은 최창석(崔昌錫)ㆍ최창순(崔昌淳)ㆍ최동우(崔東宇)ㆍ이건우(李健宇)이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를 졸업하였다. 일본 유학 중 학우회를 조직해 강경ㆍ전주ㆍ군산 등지에서 순회강연을 하다가 한때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236월 귀국하여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여하고, 7월 고려공산청년동맹에 참여해 위원이 되었으며, 9월 조선노동대회 발기회를 주도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19244월 조선청년총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고, 12월 서울청년회 별동조직인 사회주의자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1925년 중국 만주에서 김좌진(金佐鎭)의 신민부(新民府) 내에 공산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12월 코민테른 파견 서울파 대표(서울청년회)로 참가했다. 19263월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민족당주비회 결성에 참여했다. 1927년 귀국 후에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간부가 되었고, 192823차 공산당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1935년 출옥하였다. 1936년 중국으로 망명해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했으며, 1937년 허정숙(許貞淑)과 결혼했다. 19386월 김원봉의 지도노선에 불만을 품은 48명의 사회주의 청년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탈당해 재무한(在武漢)조선청년전시복무단을 결성하고, 7월 조선청년전위동맹으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민족혁명당ㆍ조선민족해방동맹ㆍ조선혁명자연맹의 통일전선 단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에 합류했다. 10월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군사기구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지도위원이 되었다. 1939년 무정(武亭)과 조중연대를, 1941년 산서성 태항산(太行山)에서 화북(華北) 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했으며, 1942년 김두봉(金枓奉)ㆍ무정 등과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확대 개편하여 화북조선독립동맹을 창건하고 중앙상무위원ㆍ서기부장이 되었고, 1945년 독립동맹 부주석에 올랐다. 해방 이후 194512월 평양으로 귀국한 뒤 19463월 독립동맹을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하고 부위원장이 되었고, 8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에 선임되었다. 1948년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및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재정상, 1952년 부수상ㆍ국가검열상을 지냈다. 1956‘8월 종파사건으로 실각했다.
  34. 고광수(高光洙, 1900~1930) - 강원도 횡성 출신.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19204월 간도에서 조선인 노동조합에 가입했으며, 9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 입학하였다. 192510월 조선에서 공산당 통일운동을 하려고 귀국하였다. 그 뒤 조선공산당에 입당, 전덕(全德)이 책임자로 있던 경성부 제2지구 9야체이카에 소속되었으며, 사상단체인 조선노동당에 가입하였다. 1926‘610만세운동을 계기로 불어닥친 2차 조선공산당사건을 피해 해외로 망명했다가 비밀리에 입국, 19268월 초 고려공산동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합동위원회를 열어 통합하였다. 19277월 상해(上海)로 가서 양명과 함께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청의 중앙기관을 재구성하는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 뒤 귀국했으나 검거를 피해 다시 해외로 망명하였다. 19291월 만주 길림(吉林)에서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임시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19299  함남 이원군(利原郡) 철산(鐵山)에서 광업용으로 쓰던 다이너마이트 도난사건을 수색하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면도칼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체포되었다. 그 뒤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을 받던 중 고문으로 얻은 폐결핵 때문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301 서울 가회동에 있는 대동학교(大東學敎)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25일 사망하였다. 고광수의 죽음에 대해 국제공청에서는 추도 예를 다하였다.
  35. 이인수(李仁秀, 1905~?) - 일제 관헌자료에 이인수(李仁洙)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황해도 해주 출신.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회과에 입학하였다. 19239월 간토[關東] 대지진 이후 니혼대학을 중퇴하고 귀국, 해주에서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4년 이후 해주청년회의 간부 및 해주노동동맹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2월 고려공산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410월 서울콤그룹의 지도조직인 고려공산동맹 중앙위원, 고려공산청년동맹 조직부 담당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531절을 맞아 황해도 신원청년회 및 동아일보지국 주최 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하였다. 19263월 공산주의운동의 통일을 추진할 목적으로 결성된 레닌주의동맹에 참가했고, 같은 해 8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와 고려공산청년동맹의 합동위원회에 참여, 단일한 고려공산청년회(합청)를 결성하기로 결의하였다. 19278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인 하필원(河弼源)이 중앙대회에 참석하라는 지시에 따라 이종희(李宗熙)에게 책임을 넘기고 국내로 들어왔다. 한편, 192711월에 고려공산청년회 선전부 담당 중앙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192823차 조선공산당검거사건때 검거되어 1930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 폐병에 걸려 19321월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36. 한빈(韓斌, 1901~?) - 별명은 한하미르ㆍ한페츠르. 함경북도 경원 출신이다. 4세 때 할아버지를 따라 노령(露領)으로 이사한 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살았다. 1920년 소련공산청년동맹에 들어갔고, 19238월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 속성과에 입학하여 다음해 5월 졸업하였다. 만주 지역의 사회주의운동 역량을 통일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용정(龍井)의 동흥중학교에 사회과학연구회의를 조직하였다. 1923년 박윤세(朴允世) 등과 고려공산청년동맹 간도총국을 결성하고, 192412월 조직부 책임자가 되어 이 조직을 고려공산청년동맹 만주총국으로 확대, 재편시켰다. 19259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조선공산당의 파벌을 청산하고 당을 통일하기 위해 최창익(崔昌益)과 함께 국내에 들어와 서울파 공청(共靑)의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63월 양명(梁明) 10여 명의 동지들과 3차 조선공산당의 모태가 되는 레닌주의동맹을 결성하였다. 19302월 초순경 한해(韓海)의 죽음과 고광수(高光洙)의 체포소식을 듣고 국내에 들어왔다. 3월 부산경찰서에 붙잡혀 6년 동안 복역하였다. 1936년 출감한 뒤 허정숙(許貞淑)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 난징[南京]에서 김원봉(金元鳳)이 주도하던 조선민족혁명당에 참가하였다. 19418월부터 무정(武亭)이 설립한 조선의용대간부훈련반의 교사로 활동했고, 19421월부터는 화북조선청년학교에서 정치경제학과 세계공산주의운동사의 강의를 담당하였다. 광복이 되자 194512월 평양으로 들어갔다가 남한에서 조선독립동맹 조직기반을 강화하고자 19461월 조선독립동맹 부위원장으로 서울에 왔다. 2월에는 북한에서 조선독립동맹이 조선신민당으로 개편되자 부위원장이 되었다. 경력에 비해 고급 당간부나 위원이 되지 못하고, 1956연안파 숙청때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좌천되었다고 한다.
  37. 안광천(安光泉, 1897~?) - 본명은 안효구(安孝駒). 안호우(安乎于)ㆍ노정환(盧正煥)ㆍ사공표(司空杓)ㆍ임재일(林在一) 등의 가명을 사용하였다. 경상남도 진영(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출신이다. 아버지는 구한국 시의(侍醫)를 지낸 안왕거(安往居)이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자혜병원의 의사로 근무하였다. 19231월 김해청년회를 조직했고, 8월에는 북성회 순회강연을 계기로 사회주의사상 연구를 위해 제4(第四會)를 조직하였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북성회에 가입했고, 19251월 북성회를 해체한 뒤 일월회를 창립하였다. 19272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제휴하여 민족 단일당으로서의 신간회를 결성하였다. 19282월 말 제4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정치부장이 되었다. 이 무렵 코민테른에 보고하는 국내정세에 관한 보고민족해방운동에 관한 논강을 작성하였다. 5월 부인 이현경(李賢卿)을 불법적으로 복당시킨 것이 문제가 되어 당규를 문란시켰다는 이유로 출당처분을 받았고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9년 북경에서 김원봉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으며, 1930년부터 1931년에 걸쳐 레닌주의정치학교에서 양성한 20여 명을 국내에 파견하였다.
  38. 국민부(國民府) - 19294월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항일독립운동단체. 1925년 이래 남북만주 일대에서 분산적으로 활약하던 참의부(參議府)ㆍ정의부(正義府)ㆍ신민부(新民府)3부가 통합해 요령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 흥경(興京)에 본부를 두고 조직되었다. 19285월 정의부 소속 김동삼(金東三)이 중심이 되어 길장연로(吉長沿路) 서쪽 30리에 있는 신안둔(新安屯)에 집결, 3부의 통일을 위한 유일당을 형성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1115일 정의부의 김동삼ㆍ지청천(池靑天) 계열과 신민부의 군정위원회측, 그리고 참의부의 김승학(金承學) 계열이 모여 혁신의회를 구성하였다. 이에 대해 신민부의 민정위원회측과 참의부의 심용준(沈龍俊) 계열, 정의부의 현익철(玄益哲)ㆍ고활신[高豁信, 일명 : 고할신(高轄信)] 계열이 19294월 군정위원회의 성격을 띤 국민부를 조직하였다. 1932년 조선혁명군과의 연석회의를 통해 한ㆍ중연합작전을 수립하고, 중국의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인 중국의용군과 연합해 영릉가전투(永陵街戰鬪)ㆍ흥경성전투(興京城戰鬪)ㆍ노구대전투(老溝臺戰鬪)에서 대승하였다.
  39.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 19299일본 제국주의를 박멸하여 한국의 절대 독립을 이룬다.” 는 강령하에 국민부(國民府)의 정당적 성격을 갖춘 자매기관으로 길림성(吉林省)에서 결성되었다. 조선혁명당은 그 산하에 조선혁명군을 두었다. 조선혁명군은 당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19291220일 기존 조직을 크게 개편하였다. 이 개편을 통해 조선혁명군은 총사령에 이진탁(李辰卓), 부사령에 양세봉(梁世奉), 참모장에 이웅을 임명하고 기존 10개 대()7개 대로 편성하였다. 19319월의 만주사변 이후 만주를 벗어나 국내로 남하, 193211월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 결성에 가담하였다. 그 뒤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합병되었다가 이탈, 19374월 난징[南京]에서 재건되었다.
  40. 안상훈(安相勳, 1898~?) - 일명 이중원(李重元이상기(李相基)ㆍ바또로코프. 경북 안동 출신. 1920년대에 조선공산당 경상북도 도책임자와 신간회 안동지회 간사로 활동했던 안상길(安相吉)의 동생이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며, 1923년 무렵부터 풍산소작인회, 안동 와룡청년회, 안동청년연맹에서 집행위원을 지냈다. 19254월 고려공산청년회 결성에 안동청년회의 소속으로 참여하였고, 10월경 고려공산청년회에서 모스코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졸업하지는 못하였다. 그후 연해주 농촌소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1929년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주력하였다. 서울ㆍ부산ㆍ예천ㆍ안동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조선공산주의 열성자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으나 19296월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검거되었으며, 19319월 경성복심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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