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1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37) 내 백성 내 민족 - Soil

Soil

 

“Soil”이라면 토양(土壤), 인데 이 흙이 나라로서는 국토가 되고, 개인으로서는 자기 이나 집터”, “마당”(뜨락)이 되고, 나무와 풀에게는 뿌리 내릴 어머니젖가슴이 된다. 도대체 우리 자유한다는 동물들도 우주인처럼 바닥에 발붙일 데가 없다면 어떻게 걸을 수 있겠나! 그래서 나라의 국토어느 한 모새기 단 몇 평이라도, 어느 작디작은 무인도 하나라도, 어느 다른 나라에 점령된다면 몇 만 명 국민의 목숨이 오가는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왜 그럴까? 단순한 자연의 흙일 뿐 아니라, 이미 인간화, 국민화한 흙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몇 천 년 전부터 조상들이 살았고, 그 삶의 터전을 지키노라고 침략자들과 싸웠고 대대손손 물려주고 물려받으며 애지중지 간직해 온 유산이기 때문이다. 한 덩어리 바위, 한 그루 나무 한 포기 꽃이라도 우리 겨레의 손때 묻고, 정과 한이 감싸인 흙이요, 산이요, 바위요, 시내요, 나무요, 풀인 것이다. “국토는 이제 내 의 한 부분이요, 의 외연(外延)이다. 국토를 잃으면 애기나 잃은 듯 가슴 아프다. 한ㆍ일 합방 때, 얼마나 많은 선비들이 자결했던가는 박은식[1] 선생의 한국독립혈사[2]를 읽는 것만으로도 짐작이 갈 것이다.

필자는 지금부터 약 40년 전 하와이에 처음 들렀을 때, 거기 친구들이 저녁 후에 아름드리 큰 나무 밑에로 나를 데려갔다. 거기서 하와이 원주민들의 훌라댄스를 구경했다. 댄스 자체도 특이했지만 일루미네이션으로 휘황찬란한 한 그루 거목이 내게는 더 흥미로웠다. 그 나무는 가지가 내리 드리워 그 끝이 땅에 닿자마자 뿌리를 박아 또 하나 딴 그루의 나무가 된다. 그것이 줄래줄래 숲을 이룬다. 진짜 한 숲이 한 나무다. “가 한 핏줄을 돈다.

오랜 후일에 듣기로는 그 종류의 나무가 여기저기 있어서 시가 계획을 다시펼 때, 그 나무를 파내 버리자고 시에서 손대려 했다가 시민들의 항거로 길을 돌려 냈다 한다. 그래서 길 가생이[3]에서 그 나무는 여전하다고 했다. 나도 흐뭇했다. 몇 백 년, 몇 천 년, 이 겨레를 지켜보며 뿌리를 지심(地心)까지 내린, 그리고 그 뿌리가 2030리의 넓이에 뻗은 경기도 양주(揚州)의 은행나무를 어느 누가 감히 톱질할 수 있을 거냐? 속칭 원효대사[4]가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다.[5] 어느 작고 가는 가지 끝 하나 마르거나 시들은 데가 없다. 그런 나무는 진정 국토의 수호목이다. 성균관 대성전 뜨락에도 그런 거목 느티나무들이 아직껏 싱싱하다. 연령으로는 이조”(李朝)와 비슷하겠지만, 목숨은 이조를 한 토막 과거에 묻고 미래를 자기 몸에 잉태하며 끝없이 산다. 흙의 자랑이고 시냇물의 자랑이고 민족 생명의 자랑이다.

퍼얼 벅[6]의 노벨상 대표작인 대지(大池)에 그 주인공(농민)이 기아선상(飢餓線上)에서 가족을 흩고 유랑하면서도 자기 밭에서 쥐고 간 한 줌이 그의 투사같이 싸울 수 있게 했다는 얘기가 있다. 결국 그는 자기 흙, 뿌리내릴 자기 Soil을 되찾고야 말았다. 인상적이다.

 

[1981. 7]


[각주]

  1. 박은식(朴殷植, 1859~1925) - 본관은 밀양, 자는 성칠, 호는 겸곡ㆍ백암. 황해도 황주 출생. 17세까지 아버지의 서당에서 정통파 성리학과 과거시험을 공부하였다. 과거공부에 회의를 느껴 고향을 떠나 당시 황해도 일대에서 이름나 있던 안태훈과 교우하면서 문장을 겨루어 황해도의 양 신동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1880년 정약용이 저술한 정법상의 학문을 섭렵하면서 실사구시 학풍을 가지게 되었다. 1898년 개화사상으로 전환하여 독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04년 양기탁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주필을 지냈다. 1906년 이후 애국계몽운동에 주력하였으며, 한일합방 이후에는 독립운동과 국혼이 담긴 역사서를 쓰기 위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독립운동에 종사할 때에는 박기정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했고, 태백광노(太白狂奴) 또는 무치생(無恥生의 별호를 쓰기도 했다.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등을 저술하였으며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도 하였다.
  2.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 1920년에 박은식이 갑신정변 때부터 1920년 독립군 항일 무장 투쟁까지의 항일 투쟁의 역사를 기록하여 펴낸 책. 상권에는 일본의 한국 침략 경위를, 하권에는 국내외의 무장 투쟁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의 전말을 서술하였다. 7권이다.
  3. 가생이 - ‘가장자리의 방언
  4. 원효대사(617~686) - 신라 십성(十聖)의 한 사람. 속성은 설()이며, 시호는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이다. 해동종(海東宗)을 제창하여 불교 대중화에 힘썼으며, 불교 사상의 융합과 실천에 노력한 정토종(淨土宗)의 선구자이다. 저서에는 화염경소(華嚴經疎),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등이 있다.
  5.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에 있는 은행나무로 천연기념물 제30. 높이 42m, 수령은 1,100년으로 추정된다. 나무의 나이를 추정하는 근거는 용문사의 창건연대와 관련하여 산출하고 있다. 용문사는 649(신라 진덕여왕 3)에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따라서 은행나무는 절을 세운 다음 중국을 왕래하던 스님이 가져다가 심은 것으로 보고 있다. 옛날 이 나무를 베고자 톱을 대었을 때 톱자리에서 피가 나오고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이 쳤기 때문에 중지하였다는 이야기와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절을 불살라버렸으나 나무만은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와 나라에 큰 이변이 생길 때마다 큰 소리를 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6. 펄 벅(Pearl Buck, 1892~1973) - 미국의 소설가(1892~1973). 중국의 한 빈농과 그 처가 대지주가 되기 위하여 살아가는 과정을 그린 대지의 작가이다. 193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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