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4일 일요일

[범용기 제4권] (54) 군정독재에서의 김대중은… - 죽는다, 죽인다는 것

죽는다, 죽인다는 것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도 식물도 살고 싶어하고 살아야 하고 살려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살고 싶어도 백년 안팎에 거의 다 죽는다. 이팔청춘의 꽃봉오리 아가씨가 차사고로 길바닥에 죽어 깔린다. 정력의 분화구가 하늘에 곧추 솟는 힘의 일꾼이 일순간에 고혈압으로 폭삭한다. 팔십 구십까지는 느릿느릿 인생을 산책삼아 구경삼아, 막힘 없이 살다가 집착 없이 가는 사람도 물론 있다. 어쨌든 모두 살기 위해 사는 것이요 죽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산다는 것은 감미로운 낭만만이 아니다. 죽어라고 대들어도 살까 말까다. 특히 권력투쟁이란 죽을판 살판이다. 돈벌이 경쟁도 수월치 않다. 더군다나 보오스자리까지 밀어 올리려면 항시 죽었다 살아야 한단다.

죽기 전에 청와대를 안떠난다던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죽고 김재규는 전두환에게 죽고 전두환은 모두모두가 죽이려니까, 광주 학살을 스타아트로 모두모두를 죽이고 살려고 발악한다. 남을 죽이고 내가 산다.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 이것도 저것도 안되면 너 죽고 나 죽고. 죽으면서도 죽을 일을 저지르면서도 죽지 않을 것으로 환상을 그린다. 죽으면서도 죽이고, 죽이고서 죽고, 미친 두 놈이 서로 물고 먹고, 종당[1]에는 꼬랑이[2] 둘만 남아 길 바닥에 딩군다!

아직도 원시림 속에는 식인종이라는 인간이 얼마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마는, “식인종이랬자 사람을 마구 잡아먹는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한 두 사람, 그것도 자기 족속 아닌, 짐승일지 모르는(그들 눈으로서는), 괴상한 것을 잡아다 먹는 정도란다. 그런데 전두환은 광주에서 천명 단위의 자기 족속을 잡아먹었고, 두고두고 먹을 식량인양, 삼천만 인간을 우리 속에 가둬놓고, 작은 생선을 큰 솥에 볶듯 한다. 지지고 볶고 하노라면 먹을 나위도 없을 것이 아닐까!

그런데 여러분은 살면서 살고, 살리면서 살고, 살리기 위해 살고, 다같이 살자고 나선다. 김대중은 그런 인간상이랄까.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광견형인간으로서는 이해 곤란이다. 저건 이북과 짜고서 이남의 공산화에 공로를 세웠다가 공산남침 때 한자리 하자는 수작일거라. 일찌감치 빨갱이로 몰아 죽여 버리자. 말랑말랑한 놈은 잡아먹고 나와 내 패거리만 살자! 전두환은 기승했다.[3]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멘탈리티는 전통이 꽤 오래고 뿌리도 깊다. 단종 때의 단종과 사육신, 사색당쟁 때, 대원군[4]의 천주교도 학살, 개화운동 때 김옥균[5] 효수, 31운동 때 일인이 학살한 만 명 대의 한국 남녀, “간도토벌때에 간도 이주 한인 부락 전면적 무차별 학살 등등은 남을 죽임으로 내가 산다는 강도 철학에서였다.

해방 후에는 어떠하였는가? 이승만 시대에 저지른 김구, 여운형[6], 장덕수[7], 송진우[8], 조봉암[9] 등등 암살, 그리고 박정희 군사쿠데타 이후의 K.C.I.A.의 만행, 인혁당 사건 조작에 따른 대량학살[10], 암흑에 흘려버린 수 모를 고문살인, 전두환의 광주 양민 무더기 학살, 거기다가 일제 강점기로부터의 사회주의 계열의 희생자, 징용, 징집, 여자정신대 등등으로 죽어간 이국에서의 원혼들 남 죽이고 제 살자는 악마의 흉계는 강줄기처럼 지금도 흐르고 있다.

요새 전두환은 김대중을 잡아먹으려고 침을 꿀꺽인다. 김대중은 모두를 살림으로 나도 산다살리는 삶의 씨알이기에 죽이는 멘탈리티인 전두환에게는 근원적인 불안과 공포와 증오의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살리는 자, 살리려는 자가 산다. 역사는 전두환의 노리개가 아니다. 심판자는 살인자를 잡는다. 바다는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다.


[각주]

  1. 종당에 뒤에 이르러 마침내
  2. 꼬랑이 - ‘꼬리를 속되게 이르는 말
  3. 기승하다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을 만큼 굳세다
  4.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 조선 고종 때의 정치가(1820~1898).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고 호는 석파(石坡)이다. 고종의 아버지로, 고종이 즉위에 오르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섭정하였다. 서원 철폐와 당파를 초월한 인재의 등용 등으로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려 했다. 무리한 경복궁의 중건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으며, 통상 수교의 거부를 고집하였다.
  5. 김옥균(金玉均, 1851~1894) - 조선 말기의 정치가(1851~1894).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 고우(古愚)이다. 근대 부르주아 혁명을 지향했던 급진 개화파의 지도자로 갑신정변을 주도하였으며, 우리나라 개화사상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1894(고종 31)년에 중국 상하이에서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살해되었다. 저서로 기화근사(箕和近事), 치도약론(治道略論), 갑신일록(甲申日錄)따위가 있다.
  6. 여운형(呂運亨, 1886~1947) - 호는 몽양(夢陽). 경기도 양평 출신. 1908년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Clark. C.A.) 목사의 조수로 있으면서 당시 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승동교회를 출입하였다. 1911년 강릉에서 남궁억의 후원으로 운영되던 초당의숙의 교사가 되어 청년 교육에 힘썼다(1911년부터 2년간 평양신학교에 다녔다). 1914년 난징의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1917년부터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힘썼으며, 1920년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5년 쑨원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여 중국혁명운동에 참여하였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직에 취임하였고,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44년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고,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주도하였다. 혼란한 정국 속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면서 통일정부 수립에 노력하다가 1947719,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7. 장덕수(張德秀, 1894~1947) - 호는 설산(雪山).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1916)하고, 귀국하여 상해로 건너가 여운형 등과 독립운동을 논의하였다. 1918년 신한청년단 결성에 참여하고, 1919년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주거제한 처분을 받았다. 1920동아일보부사장이 되었다. 1923년부터 미국으로 건너가서 허정과 함께 삼일신보를 발간하기도 하였으며, 1936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친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하였다. 해방 이후 송진우와 함께 한민당 창당을 주도하고, 우파 활동을 하였다. 1947122, 자신의 집에서 현직 경찰과 학생에게 암살당하였다.
  8. 송진우(宋鎭禹, 1890~1945) - 본관은 본관은 신평(新平). 호는 고하(古下). 어렸을때 이름은 옥윤(玉潤). 전라남도 담양 출생. 송훈(宋壎)의 넷째아들로, 어머니는 양씨(梁氏)이다. 1915년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환한 후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메이지 대학 유학 중 김병로 등과 함께 학지광(學之光.)을 펴냈다). 31운동으로 1년 반 옥고를 치렀다. 1926년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사장에 취임, 이후 30여 년 간동아일보를 이끌었다. 1945811일 일본총독부측과 해방 후 치안권 위임 등을 제안 받았으나 그의 정세 판단에 따라 거부하였고, 이후 조선총독부는 여운형과 접촉하였다. 광복 이후 한국민주당이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회 수석총무에 추대되고, 동아일보가 복간되어 제8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451230일 한현우(韓賢宇) 6명의 습격을 받고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74번지 자택에서 죽었다.
  9. 조봉암(曺奉岩, 1899~1959) - 호는 죽산. 일제시기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하였으나,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였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42대 대통령 선거에서 11.4%로 낙선하였고, 19583대 대통령선거에서 신익희 후보가 사망한 상황에서 30%의 득표로 2위를 기록하여 이승만의 눈엣가시가 되었으며, 1958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597월 사형이 집행된다(이후 20111월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복권되었다).
  10. 인민혁명당사건(人民革命黨事件) - 19648월과 19744월 북한 지령을 받은 인민혁명당이 한국의 국가반란을 기도하였다고 발표된 사건. <1차 인혁당 사건> 19655292심 공판에서 도예종에게 징역 3, 양춘우 등 6명에게 징역 1, 김금수(金錦守), 이재문, 임창순, 김병태, 김경희, 전무배 등 6명에게 징역 1, 집행유예 3년을, 박중기, 박현채, 정도영 등 3명에게 징역 1년을 각각 선고하였다. 1965921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2차 인혁당 사건> 19741월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에 의해 설치된 비상보통군법회의는 19747월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등 8인에 대하여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들의 항소는 모두 기각되었고 197548일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이 확정되고 다음 날 49일 비상보통군법회의는 8인에 대한 형을 집행하였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는 등 이 사건은 유신체제하의 대표적인 인권침해사건으로 기억되었다. 2002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 사건이라고 발표하였고, 국정원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도 200512월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가혹행위와 인민혁명당구성 및 가입 등에 대한 조작 사실을 인정하였다. 마침내 2007123일 서울 중앙지법은 도예종 등 인혁당재건위사건희생자 8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 또한 20103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1차인혁당사건당시 불법구금 등에 대해 규명한 바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