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5일 월요일

[범용기 제4권] (55) 군정독재에서의 김대중은… - “저주”를 마시는 흙

저주를 마시는 흙

 

아담의 후손 가인이 질투하여 동생 아벨을 때려 죽였다. 아무도 본 사람 없고 아는 사람 없었지만, 하나님은 채근하신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사람인가요? 내가 알게 뭐예요?”

아주 당당하다.

이에 하나님의 말씀은 준엄하다.

네가 무슨 일 저질렀느냐? 네 아우의 피가 소리 질러 땅에서 내게 호소하고 있다. 땅이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받았으니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았다. 네가 이 땅을 아무리 갈아번지고 농사하노라 애써도 소출이 없을 것이고 너는 결국 유랑민이 된다”(창세기 4:11-13).

한반도는 금수강산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훑어보면 이 강산은 너무 많은 억울한 피에 절어 땅 자체가 저주의 흙이 된 것 같다. 뭐 될 것 같다가도 안되고, 되던 것이 갑자기 망가지고, 다 됐다고 좋아하는 순간에 비극이 벌어진다. 의인들 피를 마셨기 때문이 아닐까? “그거야 열강의 바둑판이 됐으니 의례 그럴 거지한다. 그러나 열강의 각축장이라는 발칸반도[1]도 우리 같지는 않다.

어떤 때,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에 비겨, 고난받은 의인이 나라와 민족의 영광이라고 설교한다. 그들이 몸으로 심는 씨앗이 역사의 미래를 꾸민다고 믿고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심은 대로 거둘 것임에도 불구하고하나님의 자비가 여유를 주시는 것뿐이지, 의례 그렇다는 법칙은 아니다. “저주는 저주대로 남은 것이지만, 몇 사람의 의인을 보아 집행이 어느 정도 늦춰지는 것뿐이다.

나는 한국의 흙이 억울한 피에 절었다고 했다. 사육신, 생육신은 오래전 일이니 더 거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근세사에 있어서 김옥균을 죽이고, 최제우[2], 최시형[3] 등 탁월한 종교 창시자를 죽이고, 동학농민혁명의 총수 전봉준[4]을 일본군대에 청들어 죽였다.

이승만 시대에는 어떠했는가? 송진우, 장덕수, 여운형, 김구, 조봉암 등등 쟁쟁한 지도자들이 암살당했다. 이런 애국자들의 피를 마신 강산이 영광받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피가 아직도 신원[5]되지 않았다.

그뿐인가? 419 , 의로운 학생들의 피, 박정희가 죽인 조작된 인혁당 사건에 죽은 원혼들, C.I.A.의 고문에 죽은 최종길[6] 교수, 바로 얼마 전에 부산서 고문에 죽은 임기윤[7] 목사, 그리고 악형에 몸이 뒤틀리고 뻐그러지고 부서지고 골병들어 평생 산송장으로 지낼 수천 명 의인들, 광주학살에 희생된 수백 명 억울한 학생과 시민들, 그리고 마감에는 전 국민의 정치적 희망이고 심볼인 김대중 씨에게 법대로의 재판도 없이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문익환[8], 이문영[9] 등 의로운 성직자와 민주정치인과 교수들 이십여 명에게 대부분 20년과 15년 징역을 선고했다. 그들은 이제 50 지나 60을 넘어 70을 향한 고령들인데 이 얼음으로 통조림 된 겨울 감옥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그건 또 하나 억울한 피로 나라 흙을 물들이는 살인행위다.

이미 받은 저주도 견디기 어려운데 이 카인의 후예는 어쩌자고 형제 도살에 쌍불 켜고 드는지 알 수 없다. “멸망의 날을 위해 악의 분량을 채우는것일까?


[각주]

  1. 발칸반도 - 유럽 대륙 남동부에 있는 반도. 서쪽은 아드리아해와 이오니아해, 동쪽은 흑해, 남쪽은 에게해에 면하여 있다. 산지가 많은 지형으로, 농업과 임업이 주산업이다. 민족의 분포가 복잡하고 예로부터 민족 간의 다툼과 외부의 침략이 그치지 않아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지대이다.
  2. 최제우(崔濟愚, 1824~1864) - 조선 후기 인내천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동학을 창도한 종교 창시자.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복술(福述)ㆍ제선(濟宣). 자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水雲)ㆍ수운재(水雲齋). 경주 출신. 아버지는 옥()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1856년 여름 천성산(千聖山)에 들어가 하느님께 정성을 드리면서 시작된 그의 구도(求道) 노력은 그 이듬해 적멸굴(寂滅窟)에서의 49일 정성, 그리고 울산 집에서의 계속된 공덕닦기로 이어졌고, 185910월 처자를 거느리고 경주로 돌아온 뒤 구미산 용담정(龍潭亭)에서 계속 수련하였다. 196045일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되었다. 19637월 제자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음을 알고 미리 후계자를 정한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체포계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1120일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10일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다.
  3. 최시형(崔時亨, 1827~1898) - 조선 후기 동학의 제2대 교주.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최경상(崔慶翔). 자는 경오(敬悟), 호는 해월(海月). 경주 출신. 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철종 12) 6월 동학을 믿기 시작하여, 한 달에 3, 4차례씩 최제우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집에 돌아와 배운 것을 실천하고, 명상과 극기로 도를 닦았다. 196312월 최제우가 체포되자 대구에 잠입, 옥바라지를 하다가 체포의 손길이 뻗치자 태백산으로 도피하였고, 이어 평해와 울진 죽변리에 은거하면서 처자와 최제우의 유족을 보살피다가 동학의 재건을 결심하고, 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영양(英陽)의 용화동(龍化洞)으로 거처를 정하였다. 1880년에 동경대전(東經大全), 1881년에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하였다. 동학의 교세가 확장되면서 1892년부터는 교조의 신원(伸寃)을 명분으로 한 합법적 투쟁을 전개하여 나갔다. 처음에는 무력적인 봉기를 반대하였으나 1894110일 전봉준(全琫準)이 고부군청을 습격한 것을 시발로 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신도들의 뜻에 따라 4월 충청도 청산(靑山)에 신도들을 집결시켰고, 9월 전봉준이 다시 봉기하자 적극 호응하여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189412월 말 동학운동이 진압되자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진력을 다하였다. 1897년 손병희(孫秉熙)에게 도통을 전수하였고, 18983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2일 교수형을 당하였다.
  4. 전봉준(全琫準, 1855~1895) -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명좌(明佐). 초명은 전철로(全鐵爐). 별명은 전영준(全永準). 호는 해몽(海夢)이다.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겼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고창군 죽림리 당촌이 유력하다. 아버지는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전창혁(全彰爀)이며 어머니는 광산김씨이다. 1890(고종 27)경인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 그 뒤 얼마 안 되어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1894년 정월, 전봉준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만행에 항의하여 봉기하였는데, 이때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켜서 동학농민전쟁으로 전환되었다. 1894427일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고 조정과 협상을 벌이게 되었는데 폐정개혁안으로 전주화약이 성립되어 전라도에 집강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하였다. 그러나 현대식 무기를 갖춘 일본과 조정의 연합군에 의해 우금치(牛金峙)싸움에서 패하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金溝)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전봉준은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5. 신원(伸冤) - 원통한 일이나 억울하게 뒤집어 쓴 죄를 풀어 버림
  6. 최종길(崔鍾吉, 1931~1973) - 대한민국의 법학자. 중앙정보부에서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조사받던 중 고문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충남 공주 출생. 인천중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뒤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1958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를 거쳐 1958년 서독 쾰른 대학교 박사학위 과정을 밟아 민법과 국제사법의 대가 게르하르트 케겔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1962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하다가 1970년 하버드 대학교 교환교수를 지냈으며 1971년에 귀국하여 1972년 서울대학교 법대 정교수가 되었다. 1973년 중앙정보부에서 유럽 간첩단 사건의 수사 협조를 요청하자 1016일에 중앙정보부에 근무하고 있던 최종선과 함께 출두하였으나 1019일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 김치열은 최종길이 간첩혐의를 자백하고 중앙정보부 건물 7층에서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타살을 사인으로 제시했으며, 1975년 쾰른대학교의 게르하르트 케겔 교수 등이 외무부에 진상규명을 촉구하였다. 당시 고인의 막내동생인 중앙정보부 감찰실 요원 최종선이 남긴 유언기록이 함세웅 신부를 통해 보관되다가 1988년 세상에 공개되었다.
  7. 임기윤(林基潤, 1922~1980) - 1922년 평남 용강 출생. 1951년 중앙신학교 신학과, 1961년 중앙신학교 사회사업과를 졸업하고 1966년 기독교 대한감리회 목사 안수를 받았다. 유신치하인 19752월 범교단적으로 40~50명의 목회자가 조직한 <사회정의구현 부산기독인회>의 회장으로 취임하여 함석헌 선생, 서남동 목사, 문동환 목사 등의 초청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반유신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이를 이유로 국군보안 사령부 부산분실(속칭 삼일공사)에 참고인으로 불려간 1980719일 이후 3일만인 21, 통합병원으로 옮겨졌다가 26일 순교하였다.
  8. 문익환(文益煥, 1918~1994) - 목사, 신학자, 시인, 사회운동가. 호는 늦봄. 만주 북간도 출생. 목사인 아버지 문재린과 어머니 김신묵의 32녀 중 장남이다. 31운동을 전후하여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북간도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만주의 한인들이 세운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 북간동의 용정광명학교를 다녔다. 일본의 동경신학교로 유학을 갔으나 학병 거부로 퇴교되어 만주의 봉천신학교로 전학하였고 그 뒤 한인교회 전도사로 일하였다. 1947년에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에 유학,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에서 구약을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개신교와 천주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성서의 구약 번역 책임자로 8년 동안 일하였다. 1976년 명동 ‘31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민주화투쟁에 나섰으며, 1980년 내란예비음모죄로 다시 복역하였다. 출옥후 민주ㆍ통일국민회의 의장(1984)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1985), 전국 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1989), 범민련 남측본부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1991), 4차 범민족대회 대회장(1993)을 역임하면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매진하였다. 1989년 방북하여 김일성을 면담하고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92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며, 같은 해 3‘4월혁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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