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5일 월요일

[범용기 제4권] (60) 細語錄(세어록) - 소리와 말

소리와 말

 

그게 1972년 쯤이었던가? 기억이 희미하다. 나는 워싱턴에 들러 그 당시 미국의 소리한국분과 방송책임을 맡은 황재경[1]을 찾았다. 그가 내게 무슨 멧시지비슷한 걸 방송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와 허물없이 지내던 터이기에 나는 불쑥 말했다.

황 목사는 이제 나이도 불혹’(不惑)에서 지천명’(知天命)에로 들어갈 계제고, 타고난 재사이기도 한데 미국의 소리를 듣노라면 이랬다저랬다 하니 거 왜 그러시우?”

그는 껄껄 웃는다.

내가 맡는 직무는 미국의 소리지 내 말이 아니잖소?”

그건 소리이 아니라는 것, 소리라도 내 소리가 아니라 미국의 소리라는 것이다. “그자들이 내가’ ‘내 말을 하라고 여기 앉히고 월급 주는 줄 아시오?”

들어보니 그럴 듯 했다. 궤변 같기도 하지만 진담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진실한” “이 필요하다. 기계적인 소리는 그 정도로 족하다.

카톨릭 소장 신학자 한스 큉[2]은 그의 교회의 구조라는 저서에서 역사가 하나님 뜻을 역행할 때, 교회가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그 교회의 믿음이 약한 탓이라고 단언했다. 특히 한국과 같은 정황에서 교회가 잠잠할 수가 없다. 그런데 너무 말이 없다고 실망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메아리 없이 사라지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라 하더라도 예언자에게 침묵만이 있을 수는 없겠다.

그러나 소리없는 것이 곧 없는 것이랄 수는 없다. 소리 없는 말이 소리 없이 넘쳐 퍼진다.

공자하늘이 어찌 말하리오. 그러나 사시(四時 - , 여름, 가을, 겨울)가 행하고 만물이 화육한다고 했다. 시편 19편 기자는 방언도 없고 말씀도 없으니 그 소리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소리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 땅 끝까지 이른다했다. 소리 없는 말이 땅 끝까지 들린다는 것이다. 빌라도 앞에서 예수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말 없는 말이 더 두려운 말이었다.

한국의 예언자가 말이 없다고 너무 실망할 것은 없다.

그들의 말이 일시 카타콤에 숨은 것뿐이다. 펴는 말이 로마를 뒤집었다.

한국의 예언자들은 으로 말한다. 그 몸을 건드리면 그 말이 더 커진다. “이기에 말이 몸으로 움직인다.

우리는 침묵의 예수를 생각한다. 할말을 다했기에 몸으로 말씀을 대신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몸을 죽였다. 무덤에 넣고 인봉했다. 역시 침묵이었다. 그러나 셋째 날에 그 몸이 영의 몸으로 나타났다. 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 몸이어서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살아서 비참한 인간들을 방문한다.

나는 한국에 그리스도가 방문오셨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가 말씀하고 계심을 안다. 대제사장, 바리새인, 빌라도는 언제 어디에나 있다. 한국에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리스도가 일러주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이는 복이 있겠다.

 

[1976. 3. 3.]


[각주]

  1. 황재경(黃材景, 1906~1984) - 해방 이후 미국 워싱턴의 한인교회에서 목회한 목사, 아나운서, 음악가. 함경남도 안변군 출생. 아버지 황찬식은 후에 안변교회 장로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남대천에서 연어를 잡은 어부였다가 뒤에 교회의 가수원을 가꾸는 일을 하였다. 1892년경에 캐나다 토론토 출신의 제임스 게일(1863~1937) 선교사가 나귀에 마가복음을 싣고 안변에 들러 황재경의 할아버지에게 전도하였는데, 황재경이 목사가 된 먼 배경이 되었다. 1934년 연희전문 영문과를 졸업하고, 이화여전에서 동양음악을 강의하다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기독교 신학대학을 졸업하였다. 1947년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미국에 건너가 1949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의 소리(VOA) 방송국에서 한국어 아나운서로 활동하였다. 1977년까지 워싱턴 한인교회 목사로 활동하다 사임한 이후 미국과 캐나다 지역의 한국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2. 한스 큉(Hans Küng, 1928~) - 스위스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이자 저명한 기독교 신학자로,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는 작가이다. 독일의 튀빙겐 대학교에서 가톨릭 기초신학을 가르치던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기존의 카톨릭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과연 무류인가?(Infallible?)라는 책을 내서 교황 무류성 교리를 비판하는 등 교회의 교도권과 계속 마찰을 빚다가, 결국 19791215일 교황청 신앙교리성에서 공표문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가톨릭 신학을 가르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한스 큉의 사제직은 아직까지 유효한 상태로 남아 있다. 1979년 그는 가톨릭 교수직을 박탈당했지만, 튀빙겐 대학교에서 여전히 교회 일치 신학 교수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1996년부터는 명예 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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