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0일 수요일

[범용기 제4권] (7) 상한 갈대 - 空(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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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장공(長空)이라고 자타 없이 부르는 것 때문에 그 뜻이 뭐냐고 묻는 분이 적지 않다. 사실, 내게 있어서 란 것은 일종의 펜네임[1]이고 별 거창한 뜻이 바다 밑 신비처럼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나 자신이 생각해 낸 이름이 아니라, 내 선배친구 한 분이 나에 대한 인상의 부서진 조각들 틈에서 줏어낸 선물이었으니 나는 고맙게 받은 것뿐이다.

내가 20, 이상과 공상이 뒤섞여, 무지개 타고 하늘에 오르는 동화의 세계가 생각의 테두리에 맴돌고 목가적인 낭만이 자연과 인간 사이에 감미로울 무렵에 그리스도가 찾아 오셨고 아씨시 성 프란체스코가 손잡아 주었다. 두 분 다 인간사랑때문에 철부지소년을 불러 주신 것이다. 그때 내 나이는 스물이었지만 정신 연령으로 따진다면 소년이하였을 것이다.

아씨시의 성 프랜시스는 부요한 상인의 아들로서 기사”(Knight)로 출세할 작정이었고 아버지도 그걸 원했었다. 그러나 기사로 아씨시 성주를 위해 출전했다가 상이군인[2]이 되어 돌아온 프랜시스는 허무했다. 어느 이른 봄날 그는 아씨시 성 밑에서 고독을 되새기며 파랗게 싹트는 작은 풀을 만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자기 모습대로의 돈 욕심과 이름 욕심에 묶어 마몬의 제단에 바치려 든다. 나는 탈출해야 하겠다. 아주 벗은 몸만으로 도망쳐야 한다. 그래서 그는 집을 나왔다. “아비를 거역한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네게는 한 푼의 유산도 주지 않는다하고 아버지는 그를 재판소에 데리고 가서 금치산자[3]로 신고했다. 프랜시스는 거기서, 입은 옷들을 홀랑 벗어 팽개치고 이제부터 내 아버지는 하느님만이다외치며 나왔다. 그는 거지 틈에 끼어 거지 옷을 걸치고 평생 무소유방랑성자로 지냈다. “아버지의 사랑을 단념한 그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작은 형제들의 사랑, 새와 이리와 물고기와 벌레들의 사랑 속에 살았다. “형제 태양이여”, “자매인 달이여!” 하고 하늘을 우러러 사랑의 찬가를 영탄한다.

무소유의 빈 마음() 속에 몰려드는 사랑의 회리바람에 쌓여 엘리야처럼 하늘에 올랐다. 그의 무소유는 사랑을 위한 공간이었다.

내가 장공이란 를 쓰게 되자, 내 형님은 네가 중이냐? 무슨 호가 그래!” 하고 언짢아했다. 불교에서는 공즉실”, “실즉공이어서 ()()이 있고 ()()이 있다니까 불교적이랄 수도 있을 것 같다. 시인이 본다면 구만리 장공이란 펼쳐진 하늘이기도 할 것이다. 이태백이 푸른 하늘 한 장 종이에 내 뱃속 시를 적으련다”(靑天一張紙, 写我腹中詩) 했다는 것도 장공과 통한다 할까. 그래서 아마 만우형이 나에게 장공이란 를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랜 후일에 나는 서폭에 이런 글을 써 벽에 걸어 둔 일이 있다. “万里長空(만리장공)片雲(편운)浮動(부동)터니 晩雨一過後(만우일과후)秋陽(추양)可愛(, 가애)로다.” 백영렵[4] 목사가 보구서 재미있는 교우록이라고 했다. “片雲(편운)”은 채필근[5], “晩雨”(만우)는 송창근[6], “秋陽”(추양)은 한경직[7]이다. 모두 같은 시절의 선후배다. 그들 삶의 모습이 요약돼 비친다. 그러나 더 쓰지 않으련다.


[각주]

  1. 펜네임(pen name) - 글을 쓸 때, 본명 대신 사용하는 이름
  2. 상이군인(傷痍軍人) - 전투나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몸에 상처를 입은 군인
  3. 금치산자(禁治産者) - 자기 행위의 결과를 판단할 능력이 없어서 일정한 자의 청구에 의해 가정 법원으로부터 자기 재산을 관리하고, 처분할 수 없도록 법률적으로 선고를 받은 자.
  4. 백영엽(白永燁, 1892-1973) - 평북 의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만주 금릉대학 신학부졸업(1921).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을 지원하였다. 1922년 입국 도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만주 봉천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평양으로 돌아와 수양동우회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함.
  5. 채필근(蔡弼近, 1885-1973) - 호는 片雲(편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했다. 숭실전문학교와 조선신학교 교수를 역임한 교육자. 해방 후 친일 행위로 투옥되기도 하였음.
  6. 송창근(宋昌根, 1898~1951) - 1898년 함경북도 경흥 출생. 호는 만우(晩雨). 경흥의 북일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간도로 건너가 명동중학교와 광성중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동휘의 권유로 1916년 피어선신학교에 입학, 1919년 졸업했다. 이후 31운동에 관련되어 함태영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자, 그의 후임으로 남대문교회의 조사가 되었다. 이때 독립운동 관련 창가를 유통시킨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석방된 후 1922년 일본 도요(東洋)대학 문화학과에 입학, 1923년 아오야마(靑山)대학 신학부에 편입, 1926년 졸업했다. 같은해 9월 미국에 유학, 샌프란시스코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7년 프린스턴신학교로 편입, 1928년 웨스턴신학교로 편입하여 졸업하고, 1930년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31년 아일리프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1년 흥사단에 가입했으나, 이듬해인 1932년 귀국해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936년 산정현교회를 사임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성빈학사를 설립, 운영했다. 1937년 동우회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938년 가석방된 후 사상전향을 했다고 한다. 1938년 조선신학원설립위원회를 조직하다 김천으로 내려가 황금정교회를 담임했다. 해방 후 조선신학교 교장이 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가, 19517월경 대동군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7. 한경직(韓景職, 1902~2000) - 장로교 목사, 교육가, 육영사업가. 19021229() 평남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한도풍의 장남으로 출생. 1912년 향리의 자작교회에서 설립한 진광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과 기독교 신앙에 접하게 되었는데, 어린시절 그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는 6촌간이며 초기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생이었던 한병직 목사, 진광학교 교사인 홍기두 선생(평양 대성학교 출신), 교회 전도사 우용진 등이 있었다. 1914년 진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김찬빈(1899-1974)과 결혼하였다. 1917년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하면서 이승훈, 조만식 등에게서 민족주의적 교육을 받았으며 1922년 숭실대학에 진학하여 자연과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숭실대학 재학중 블레어(W. Blair, 邦偉良) 선교사의 비서로 일하면서 공부하였는데 1924년 여름 블레어와 함께 황해도 구미포 해변가에 갔다가 목회자로 헌신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듬해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블레어와 윤치호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캔자스주에 있는 엠포리아대학에서 1년간 인문과학을 수학하였다. 1926년 뉴저지주의 프린스턴신학교로 진학하여 신학 수업을 받았는데 그가 프린스턴에 갔을 때 박형룡, 최윤관, 백낙준이 졸업하였고 그는 최윤관, 김성락, 보켈(H. Voelkel), 윤하영, 이규옹, 김재준, 송창근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그는 프린스턴 재학중 신학노선의 차이로 신학교가 분열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다. 1929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예일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계속하려 했으나 폐결핵이 발병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뉴멕시코주의 알버커크 요양소에서 2년간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그후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다시 6개월간 요양한 후 1932년 귀국했다. 귀국직후 평양 숭인상업학교의 성경 교사로 부임했으며 숭실대학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의 청빙을 받아 부임하였고 이듬해 의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35년 건평 3602층 벽돌건물로 교회당을 건축하였으며 1939년에는 백지엽, 김응락 등의 도움을 얻어 보린원을 개설하여 고아들을 수용하였고 후에는 양로원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인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는 미국에 유학하였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교회에서 추방당하였으며 이후 해방되기가지 보린원 원장으로 고아와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았다.
    해방이 되자 그는 윤하영, 이유필 등과 함께 평북지역 치안책임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19459월에는 윤하영과 함께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하였다.
    월남직후 미군정청 통역으로 있으면서 김재준, 송창근 등이 하는 조선신학교에 나가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당시 서울 영락동에 있던 천리교 경성분소 건물을 접수하여 1945122일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의 서울 영락교회가 되었다(194611월에 교회명칭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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