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0일 수요일

[범용기 제4권] (8) 상한 갈대 - 될 뻔하다 안 된 것도 “은혜”

될 뻔하다 안 된 것도 은혜

 

내가 바로 20대를 넘어선 때, 함북 경성도청 서기로 있는 내 이질(姨姪)[1]로부터 나진항 토지구매 교섭이 왔다. 어떤 만철”(南滿鉄道会社)[2] 이사가 나진 개발 설계도를 비밀 입수한 것을 계기로 한 몫 보자는 욕심이 생겼던 모양이었다. 그는 함북도청에 근무하는 내 이질에게 나진 토지매수를 위임했고 내 이질은 웅기에 있는 내게 부탁했다. 나는 유능한 젊은 나진 친구를 내세워 몇 주일 안에 5, 6십 만평 해변가 억새밭[3]을 헐값에 샀다. 이동증명까지 깔끔하게 마치고 거간료[4]도 톡톡히 받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뭐냐? 팔자에도 없는 토지 거간이나 한 건 해주고 나딩굴어버리느냐? “바보같이!”

그래서 어느 날 그 거간 동료 청년과 상의했다. “나진 뒷산, 널평한 완경사 초장이 유휴 국유지로 버려져 있다는데 그걸 우리 두 사람 이름으로 임대차 계약을 해두며 어떠냐?” 했다. 수속은 그 청년이 맡아서 동장, 구장, 면장 등 관계관서에 벌찐 돌아다녔다. 그래서 계획대로 다 만들어 왔다. 후일에 불하[5]할 경우에는 임대계약자에게 우선권이 있을 뿐 아니라, 그 불하료도 싸게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이미 받은 합법적인 거간료를 밑천으로 급행열차처럼 서울 향해 달렸다. 때가 31운동 다음해[6], 그 조수가 나를 밀어냈다고도 하겠다.

나는 여름 방학에 돌아왔다. 그 때, 내게는 같은 게 문제될 수 없을 정도로 고매(?)”했다. “이 아니고 이다 하는 식이었다.

나는 귀향하여 경흥읍교회[7]를 예방했다. 위에 언급한 나진청년은 그때 경흥 군청에 취직해 있었다. 그 땅 임대차 명의인을 자기 이름 단독으로 하는데 동의해 달라고 한다. 말하자면 Co-Siginer[8]로서의 내 이름을 빼고 자기 혼자 이름만으로 임대차 계약을 갱신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동안의 임대료도 자기가 단독으로 납입해왔고 그 액수도 적잖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그만한 내 몫을 단번에 추불할 능력도 없었다. “옛따, 먹어라하고 도장 찍었다. 그날 밤, 그는 푸짐한 술좌석을 마련하고 나를 초대했다. 나는 거절했다.

그 무렵 백두산 목재 관계로 일약 함북의 재벌 반열에 끼어든 청진의 김기덕[9]이 나진 땅을 매점하기 시작했다. 약삭빠른 이 나진 청년은 그 땅 임대차 권리를 상당한 고가(高価)로 그에게 넘겨줬다. 이 청년은 앉은 대로 돈벼락을 맞은 셈이다. 그 결과로는 주색잡기에 패가망신이란 패가 붙고 말았다.

오랜 후일에 나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일할 나이다. 잠시 창꼴집에 들렸다. 아버님께서 물으신다.

너 뭣 하려느냐?”

교육사업 하렵니다.”

일본놈 교육 말이냐?”

내 나름대로의 교육 말입니다.”

너 그 때, 계약했다던 나진 땅은 어떻게 됐니?”

그건 자진 포기했습니다.”

일 하겠다면서 굴러온 돈을 쫓아버렸단 말이냐? 세상 물정을 알아야 일 할 수도 있을 게 아니냐?”

그리고서는 일체 말씀이 없으셨다.

허기야,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자마자 거액의 애카운트가 무조건 내 이름으로 입금된다! 아버님 말씀대로 행운아임에 틀림없겠다. 그러나 그 행복축복일지는 의문이다. 십상팔구는 나를 빠지게 할 함정이었을 것이다. “은혜란 빈 마음에 돌입하는 하나님의 사랑일 것이다. 고생하며 일하는데 은혜가 있다.

 

[1981. 5. 4.]


[각주]

  1. 이질(姨姪) - 아내의 자매의 아들딸. 자매간의 아들딸
  2. 만철(滿鐵) -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 South Manchuria Railways Co.)는 러일전쟁 후인 1906년 설립되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될 때까지 중국의 동북지역, 즉 만주에 존재했던 반관반민(半官半民)의 특수 일본회사이다. ‘만철(滿鐵)’ 혹은 남만철도(南滿鐵道)’로도 불린다. 만철은 만주지역에서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근 40년 활동하는 가운데 많은 식민통치의 유산을 남겼다.
  3. 억새밭 억새(볏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가 저절로 나서 우거진 땅
  4. 거간료 거간비(居間費).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 사이에서 흥정을 붙인 데 대한 품삯
  5. 불하(拂下) - 국가나 공공 단체의 재산을 민간에 팔아 넘김
  6. 1920
  7. 경흥읍교회 - 1910년 함북 경흥에 설립된 장로교회. 김계언(金桂彦)이 이주하여 전도한 결과 흥명(興明)학교 교장 김태훈(金泰勳)과 교사 김문협(金文協) 17인이 믿게 되어 흥명학교 강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1915년 선교사 스코트(W. Scott ; 徐高道), 목사 이두섭(李斗燮)ㆍ이정화(李正華)가 와서 사경회를 개최하였고, 1918년 채필근 목사가 부임하면서 부흥하였다. 그후 김관식(金觀植; 1921년 부임), 김유직(金有稷; 1922년 부임), 정기헌(鄭耆憲; 1923년 부임) 목사 등이 시무하였고 22년에는 포은동(浦恩洞) 교회를 개척하였다. 1940년 현재 장로로 안기진(安基珍; 1924년 장립), 김천현(金薦鉉; 1929년 장립), 김기정(金基楨; 1933년 장립), 김하진(金河珍; 1933년 장립) 등이 시무하였다. 이후 미상.
  8. cosinger 연서인, 어음의 공동 서명인
  9. 함경도 부령(富寧)의 한미한 농가에서 태어난 김기덕은 청진으로 이사하여 조선과 러시아, 만주를 잇는 국제무역에 뛰어들어 기반을 닦았다. 청진 동일상회 두취(대표이사)였던 그는 오지이지만 석탄과 목재와 해산물이 풍부한 북관의 미래를 낙관하고 상공업의 요지가 될 만한 부동산을 미리 사서 파는 수법으로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는 나진과 웅기를 주목해서 웅기에 300만평, 나진에 150만 평의 토지를 샀다. 나진항을 감싸는 천혜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대초도(大草島) 80만평과 소초도(小草島) 40만평도 몽땅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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