紅葉(홍엽)속에 이틀
박재훈 박사가 단풍 ‘천렵’[1]을 가자고 왔다. 내가 단풍 ‘구경’이라 하지 않고 ‘천렵’이라고 쓴 데는 이유가 있다. ‘천렵’이란 것은 냇물에서 고기를 손수 잡아다가 제 손으로 배를 따고 씻어 냇가 우동불[2] 윗 남비에 끓여 거기서 먹는 ‘풍류’의 흥겨움을 의미한다. 이번 ‘단풍구경’도 지나가며 슬쩍 보구 마는 것이 아니고 단풍광경 하나하나를 잡은 고기인 듯 머릿속 망태[3]에 넣고 눈망울에 그려 한 거대한 조물주의 화폭으로 내 세계를 덮고, 나도 그 속에서 오래오래 살자는 의도에서였다. 도교적인 삶의 향기다.
10월 8일 아침 열한시에 떠나 이튿날(10월 9일) 늦게까지 우리 둘은 무스코가[4] 큰 길을 달려 ‘베으스 호’반 ‘또올셋’ 숙사에서 하루밤 지내고 이튿날에는 ‘뜨와잇’에서 잠시 알공퀸 주립공원을 돌아 ‘헌쯔빌’을 지나 ‘페리싸운드’ 항구에서 유람선으로 3만 섬 사이를 스쳐 세 시간! 돌아와 차를 ‘초속도’로 몰아 저녁 여덟시에 토론토 시내에 왔다. 무던히 먼 거리다.
산, 언덕, 길, 섬, 모두가 ‘홍엽산맥’이다. ‘만산홍엽’이 폭 넓은 황금 Mantle[5]을 감색 호수물에 살짝 스치고서 도루 허리에 여미는 자태는 길손의 가슴을 매혹한다. 길은 모두가 포장된 ‘하이웨이’다. 어떤 데는 갓 편 ‘코올타아르’ 냄새가 목향에 섞여 보드랍다. 좁은 두 줄 차도는 예외 없이 황금 턴넬을 뚫고 나간다.
가을 날씨는 변덕이 많다는데 우리의 이틀은 마냥 맑고 보드라웠다.
풍림은 보드라운 햇님 얼굴이 웃어줄 때마다 방긋 빛난다. 햇님 빛깔에 홍엽이 섞여 햇빛이 떠오른다.
옛날 중국 시인은 “홍엽은 이월의 꽃보다 낫다”[6]고 했다지만, 이월의 꽃 정도로는 비교가 안된다. 그렇게 차고 넘치는 색채의 풍요함이란 여기를 빼놓고 또 어디 있을까 싶다.
호수에 잠기다 남은 3만 섬들에도 풍림은 풍요하다. 그러나 대체로 한주일쯤 뒤에야 그 영광의 왕관이 머리에 쓰여질 것 같았다.
홍엽은 겨울을 앞둔 숲의 억억만 생명이 내뿜는 최후의 정열이다. 미련없는 죽음의 보람이다. 앳된 신록에서 검푸른 힘의 밀림, 홍옥으로 수놓은 황금의 왕복 – 그리고서는 ‘낙엽’
낙엽은 장죽을 입에 물고 부채 하나 손에 들고 정든 고향집 사립문[7]을 나서는 방랑객이라고나 할까! 바람에 옷자락을 싣고 훨훨 하늘 공중을 날아 흐른다.
다음에 남은 나목 – 그것은 귀양간 임군, 구걸하는 늙은이, 풍류 없는 유랑민, 나라 없는 백성 – 알몸으로 눈 속에 떤다. 그러나 미래는 얼지 않아, 잉태된 봄은 고요히 그 속에서 자란다.
선친의 “냉좌”란 한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온돌”이란 “냉돌”에
옷 갈피 차가와
언 눈 창살 때려
하얀 집 흔들리고,
바람 사나와
푸른 등불 눌린다.
그래도 오리라 -
벼개 기대 생각는 봄,
이불 안고 기다리는 아침 해…”
번역이 시원찮아 송구스럽지만, ‘알몸’으로 북풍한설[8]과 싸우며 봄 기다리는 ‘겨울나무’와 통하는 데가 있다 싶어 낙엽을 거니며 이렇게 쓴다.
[각주]
- 천렵(川獵) - 냇물에서 고기를 잡음
- 우등불 – 모닥불(장작이나 나뭇가지, 검불 등을 쌓아 놓고 피우는 불)
- 망태 – 새끼나 갈대를 엮어 물건을 나르기에 편하게 만든 기구
- 무스코카 자치지구 또는 무스코카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중부에 위치한 6개의 지방자치단체와 2개의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이루어진 지방자치구로, 서쪽으로는 조지아 만, 남쪽으로 카우치칭 호와 서쪽으로 알곤킨 주립공원이 있다.
- Mantle – 맨클, 외벽, 망토
- 중국 당나라 후기의 시인 두목(杜牧, 803~852년)의 시 山行(산행)에 나오는 구절이다. 두목은 중당 시대의 시인 두보와 작풍이 비슷하며, 노두(老杜) 두보와 구별하기 위해 소두(小杜)라고도 부르며, 동시대의 시인 이상은과 함께 「만당의 이두(李杜)」로 통칭된다.
山行(산행) - 산길을 걸어가며
遠上寒山石徑斜 : 멀리 가을 산을 오르니 돌길이 비껴있고
白雲生處有人家 : 흰 구름 깊은곳에 사람 사는 집이있네.
停車坐愛楓林晩 : 정거하고 앉아서 단풍숲 늦어감을 사랑하니
霜葉紅於二月花 : 서리를 맞은 잎이 이월의 꽃보다도 더 붉었네. - 사립문 - 잡목의 가지를 엮어서 만든 문짝을 단 문
- 북풍한설(北風寒雪) - 북쪽에서 불어오는 된바람과 차가운 눈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