市內楓林(시내풍림)
토론토 근방은 멀리 구릉도 길게 누워 있지만, 평지가 깊숙하게 꺼져 계곡이 되고 거기에 개천이 흐르고 좌우 언덕바지[1]에는 수림이 우거진 계곡 공원이 있다. 뉴욕 중앙공원이나 영국 런던의 ‘하이델 파악’처럼 시가지의 노랑자위를 희생시킬 필요가 없는 것도 토론토의 한 천혜(天惠)라 하겠다.
‘와아든’이나 ‘빅토리아 파악’이나 ‘하이파악’의 풍림은 어디 가서도 보기 드문 절경이고 화려한 화폭이다.
계곡 밑바닥에는 물론 ‘보도’가 있다. 차가 거부당한 것만 해도 한 가지 홍역은 면한 셈이다.
그런데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란 몇 안된다. 은퇴한 노인 부부나 두 세 노인 친구가 주춤주춤 걷는다. 풍림에는 아랑곳 없이, 신경은 후들대는 정강이에 집결되는 것 같았다.
젊은이들도 간혹 그 길에 나타나는데 거의 예외없이 ‘런닝’이다. 뛴다. 뛰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가을 빛 불타는 자연에는 그들도 무심하기만 하다.
소년 소녀들도 침입해 온다. 그들은 자전거 타기가 주목적인 것 같다. 타기 연습 정도는 지났다. 가볍게 도는 바퀴에 실려 떠가는 몸의 쾌감에 잠긴다.
‘스포츠’일지는 몰라도 ‘아름다움’에 통하는 정서는 아직도 움트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도시의 풍림은 버림받은 미인의 외로움으로 ‘한’을 깨물고 낙엽의 날을 기다리는 것 같다.
그래서 역시 ‘풍림’은 멀찌감치 온타리오 북쪽 산지대, 늪지대를 고향으로 정한 것이 아닐까?
가을 하늘보다 더 맑고 ‘강낭콩’보다 더 푸른 쪽빛 호수들은 고요하다. ‘명경지수’[2]란 이런 경지일 것이다.
‘만산풍림’이 호수를 삥 둘러싼다. 홍옥 벽옥으로 수놓은 황금의 치맛자락이 파란 호수를 스친다. 그리고 껴안는다. 최후의 남은 정열을 아낌없이 불태운 낙엽으로 싸늘한 호면을 덮어 주자는 것일까?
기계문명에 아주 절어버린 지금의 여기 사람들이 자연에서 진짜 나 자신에게 흘러들어 맥박치는 생명의 ‘시’를 음미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에게 그런 정취가 남아 있는 것일까?
위에서 말한 계곡공원 풍경에서 인화된 여기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시’의 생명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고, 아직도 ‘3S’의 시대가 ‘성숙’에로 ‘지양’된 것 같지도 않고, ‘식물인간’이란 놀림을 면하려니 싫어도 ‘행동인’임을 과시하지 않을 수 없다. ‘도’에 잠수하여 ‘좌상’으로 절당에 모셔진 부처님을 따를 시대도 아니고 – 그러니까 뭔가 ‘동’과 ‘서’ 모든 문화형을 한 ‘몸’에 화신(化身)시킨 종합된 인간형인 ‘진인’(眞人)이 형성될 수는 없을까 하고 기대해 본다.
[각주]
- 언덕바지 – 언덕의 꼭대기
- 명경지수(明鏡止水) -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처럼 잡념과 허욕이 없는 깨끗한 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장자(莊子)》의 <덕충부편(德充符篇)>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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