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7일 수요일

[범용기 제4권] (80)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市內楓林(시내풍림)

市內楓林(시내풍림)

 

토론토 근방은 멀리 구릉도 길게 누워 있지만, 평지가 깊숙하게 꺼져 계곡이 되고 거기에 개천이 흐르고 좌우 언덕바지[1]에는 수림이 우거진 계곡 공원이 있다. 뉴욕 중앙공원이나 영국 런던의 하이델 파악처럼 시가지의 노랑자위를 희생시킬 필요가 없는 것도 토론토의 한 천혜(天惠)라 하겠다.

와아든이나 빅토리아 파악이나 하이파악의 풍림은 어디 가서도 보기 드문 절경이고 화려한 화폭이다.

계곡 밑바닥에는 물론 보도가 있다. 차가 거부당한 것만 해도 한 가지 홍역은 면한 셈이다.

그런데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란 몇 안된다. 은퇴한 노인 부부나 두 세 노인 친구가 주춤주춤 걷는다. 풍림에는 아랑곳 없이, 신경은 후들대는 정강이에 집결되는 것 같았다.

젊은이들도 간혹 그 길에 나타나는데 거의 예외없이 런닝이다. 뛴다. 뛰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가을 빛 불타는 자연에는 그들도 무심하기만 하다.

소년 소녀들도 침입해 온다. 그들은 자전거 타기가 주목적인 것 같다. 타기 연습 정도는 지났다. 가볍게 도는 바퀴에 실려 떠가는 몸의 쾌감에 잠긴다.

스포츠일지는 몰라도 아름다움에 통하는 정서는 아직도 움트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도시의 풍림은 버림받은 미인의 외로움으로 을 깨물고 낙엽의 날을 기다리는 것 같다.

그래서 역시 풍림은 멀찌감치 온타리오 북쪽 산지대, 늪지대를 고향으로 정한 것이 아닐까?

가을 하늘보다 더 맑고 강낭콩보다 더 푸른 쪽빛 호수들은 고요하다. ‘명경지수[2]란 이런 경지일 것이다.

만산풍림이 호수를 삥 둘러싼다. 홍옥 벽옥으로 수놓은 황금의 치맛자락이 파란 호수를 스친다. 그리고 껴안는다. 최후의 남은 정열을 아낌없이 불태운 낙엽으로 싸늘한 호면을 덮어 주자는 것일까?

기계문명에 아주 절어버린 지금의 여기 사람들이 자연에서 진짜 나 자신에게 흘러들어 맥박치는 생명의 를 음미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에게 그런 정취가 남아 있는 것일까?

위에서 말한 계곡공원 풍경에서 인화된 여기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의 생명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고, 아직도 ‘3S’의 시대가 성숙에로 지양된 것 같지도 않고, ‘식물인간이란 놀림을 면하려니 싫어도 행동인임을 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에 잠수하여 좌상으로 절당에 모셔진 부처님을 따를 시대도 아니고 그러니까 뭔가 모든 문화형을 한 에 화신(化身)시킨 종합된 인간형인 진인’(眞人)이 형성될 수는 없을까 하고 기대해 본다.


[각주]

  1. 언덕바지 언덕의 꼭대기
  2. 명경지수(明鏡止水) -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처럼 잡념과 허욕이 없는 깨끗한 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장자(莊子)<덕충부편(德充符篇)>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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