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7일 수요일

[범용기 제4권] (88) 野花園餘錄(야화원여록) - 난국일수록 같이 당해야

난국일수록 같이 당해야

 

계절이 추워져야 소나무 대나무의 푸름을 안다는 말과 같이 역사에서도 엄동의 풍설이 몰아칠 때에사 진짜 애국자, 지사의 모습이 푸르게 늠름하다.

31 운동 때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2천만 앞에 맹세한 민족대표 33인 중 몇 사람이나 송죽의 푸름을 그대로 지켰는지! 손병희는 얼마 안 되어 병사했으니 허물할 것 없겠고 한용운은 끝까지 자기 양심과 신앙을 지켰으니 장하다 하겠다. 그러나 대다수의 기독교인은 변절이 아니면 퇴색했다.

해외에 나간 독립운동자들은 어떠하였던가?

상해에 임시정부가 섰다. 처음에는 그 관계로 5백여의 지사, 호걸들이 모였다. 모두 한말(韓末)의 거물들이었다. “임정은 중국, 만주, 소련, 미국 등에 산재한 우리 민족 전체를 통어[1]하는 정부니만큼, “임시라지만, 그 영역이 그리 좀스럽지 않았다. 여간한 수완과 정치력이 아니고서는 일치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본군벌의 만주점령과 북경침입, 그리고 대륙 침략이 있기 전에는 우리 임시정부도 당당했었다. 장개석 정부를 위시하여 국제적으로도 한국정부로서의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일본군벌이 대륙침략의 태풍을 타고 양자강 이남까지 휩쓴 때에는 어떠하였는가?

당황한 임시정부는 산산조각이 났다.

이동휘[2]는 레닌의 군자금을 타 갖고 러시아로 갔다. 그 뒤를 이어 김립(金立)[2]이 또 레닌에게 사정하여 운동비를 탔는데 그것도 새어 버렸다.

임시정부는 장개석을 따라 중경[4]으로 피란했다.

일군의 공습은 치열하다. 소련을 끼고 공산통일이라도 해야 한다 하여 김원봉[5], 김두봉[6] 등은 조선민족혁명당[7]을 조직하고 임시정부해소를 극력 주장한다.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던 김규식[8], 조소앙[9], 최동오[10], 송병조[11], 차이석[12], 양기탁[13], 유동열[14], 7인 중에서 차이석과 송병조 2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5인은 통일이란 에 취하여 임시정부에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이 일이 있기 하루 전에 5당을 통일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좌익정부 수립을 촉진할 수도 있겠고 적어도 좌우합작정도로는 낙착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조소앙이 5인조에서 탈퇴하고, 차이석과 송병조는 임정을 끝까지 지킨다고 태도를 표명했다.

결국 두 사람 밖에 남지 않은 국무위원으로서 정부구실을 할 수는 없게 됐다.

김구는 당초부터 좌익이나 좌우합작에는 흥미가 없었다. “공산당은 말과 속셈과가 다르다. 공산당의 말을 누가 믿느냐?” 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김구는 임정을 재건한다. 이시영[15], 조완구[16], 김봉준, 양소벽, 송병조, 차이석 등을 설득하여 임정재건에 합의를 보았다. 김구는 이분들을 대동하고 가홍으로 가서 그때 거기 있던 이동녕, 안공근[17], 안경근[18], 엄항섭[19] 등을 동참시켰다. 그들은 남호놀잇배한 척을 세내어 타고 호수 위, 배 안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국무위원 세 사람을 보선했다. 이동녕, 조완구, 김구가 당선됐다. 그래서 국무회의를 열었다. 그 후에 김구가 임정주석으로 추대되어 해방, 귀국의 마감막을 꾸몄다.

개인적으로 살핀다면 여운형은 친공으로 비켜서고 이광수는 친일로 일제 품에 안기고 김립은 공금횡령으로 임정에 처형되고 이동휘는 해삼위[20]로 달아났다.

정당갈래도 그 이력서를 쓴다면 무던히 착잡하다.

다른 나라에 망명해 있는 신세에 정당이라고 하나쯤 있으면 됐지, 무슨 정당이 그리 많을까. 마감에 다섯 정당이 하나가 된 것까지는 좋으나 다 합했자 국무위원 다섯이 차지 않아서 겨우 두 사람을 낼 수 있었으니 비참하다고 할까. 자기 비위에 거슬리더라도 대의명분은 살려야 할 것인데, 결사대 군인의 창끝같이 상대방을 찔르구서야 직성이 풀리는 여유 없는 민족심리가 우리의 전승이라면 김구 선생의 탄식도 영원하지 않을까.


[각주]

  1. 통어(統御) - 거느려 제어함
  2. 이동휘(李東輝, 1873~1935) - 아호는 성재(誠齋)로 함경남도 단천 출신. 18세 때 지방장관의 잔심부름을 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이용익의 소개로 군관학교에 입학, 졸업후 육군 참령을 지냈다. 19077월 한일신협약에 의해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된 후 강화도 전등사에서 의병을 조직할 계획을 세우다 잡혀서 유배되었다. 그후 미국인 선교사 벙커의 활약으로 풀려나와 이동녕, 안창호 등과 신민회 산하 무관학교와 독립군 기지를 물색하기 위해 만주 일대를 답사하였다. 1911년에 윤치호, 양기탁과 105인 사건에 연루, 투옥되었다가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1915년 노령으로 망명, 그곳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19198월 경 김립의 사위인 오영선을 데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하기 위해 상해에 도착하였다. 취임 후 자파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민족진영의 인사까지도 끌어들여 1920년 봄 공산주의자 그룹을 조직하고 1921년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였다. 국무총리직에 있는 동안 모스크바의 레인으로부터 200만 루블의 원조를 받았으며, 그 중 40만 루블을 고려공산당 조직기금으로 쓴 일이 임시정부에 발각되어 사임하였다. 비록 공산주의운동의 선구적 활동을 하였으며, 이동휘의 근본적인 사상에는 무엇보다 반일민족독립이 최우선에 놓여 있었다. 그는 오직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숙원을 이루기 위한 한 방편으로서 소련 정부와 제휴한 민족주의적 혁명운동자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사임한 이후 시베리아에서 죽었다.
  3. 김립(金立, ?~1922) - 1918년 한인사회당 창당에 참가한 주요 임원으로서 이동휘 위원장 체제의 교통부장 연락책을 역임하였다. 19198월 이동휘와 함께 상해로 이동하여 상해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이 되어 국무원총리 이동휘와 함께 1920년 봄부터 공산주의자그룹을 조직하고, 여운형 등 민족계 인사들을 포섭하였다. 1921년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편하는데 일역을 맡았다. 한편 레닌집단으로부터 수령한 이른바 모스크바 자금 중 일부(20만루블)192012월 상해로 운반하였다. 상해임시정부에 이 사실을 감추고 비밀리에 보관, 이동휘와 공모하여 세칭 상해파 고려공산당 자금으로 활용하려다가 폭로되어 임정분열의 파문을 일으켰다. 19216월 자유시참변 발생 후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간부들이 거의 러시아로 이동하여 이르쿠츠크집단과의 군권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혼자서 상해 본부를 지키다가 192226일 상해 자베이에서 테러분자에게 살해되었다.
  4. 중경 - 중국 쓰촨성(西川省) 동부, 양쯔강(揚子江)과 자링강(嘉陵江)의 합류점에 있는 하항 도시(河港都市). 1876년 이래 개항장으로 수출입 무역업이 성행하였다. 1938년 가을 이후 제이 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5. 김원봉(金元鳳, 1898~1958) -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약산(若山). 독립운동 때에는 최림(崔林)ㆍ이충(李冲)ㆍ진국빈(陳國斌)ㆍ천세덕(千世德) 등의 가명을 썼다. 경상남도 밀양 출생. 아버지는 김주익(金周益), 어머니는 이경념(李京念)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의열단ㆍ조선의용대를 이끌며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여운형이 암살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월북하여 1948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세칭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 그 뒤 북한에서 국가검열상ㆍ내각 노동상ㆍ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11월 숙청당하였다.
  6. 김두봉(金枓奉, 1889~?) - 호는 백연(白淵). 경상남도 동래군(현재 부산광역시) 출생. 1905년까지는 집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서울로 올라와 기호학교(畿湖學校)와 배재학교에 다녔다. 최남선이 주재하고 있던 조선광문회에 참여하여 소년잡지 청춘을 편집하는 일에 종사하기도 하였고, 조완구와 함께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관계하기도 하였다. 또한 주시경 밑에서 한글 연구에 몰두하여 27세의 나이로 광문사에서 발행한 조선어문전편찬에 참여하는 등 한글 연구의 기초를 닦았다. 1917년에 보성, 휘문,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시간강사를 지냈으며 1919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신채호가 주필로 있던 신대한신문의 편집을 맡았고, 김규식 등의 신한청년당에 가담하였다가 1920년에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 모임에 가담하여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812월 고려공산당이 코민테른의 지시로 해산되자 홍남표, 조완구 등과 함께 대한독립당성립촉성회에 참여하였으며, 1935년 김원봉과 한국민족혁명당(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을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1937년 후베이 성 창링으로 근거를 옮겼다. 다시 충칭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가 1942년 옌안에서 독립동맹을 결성, 주석으로 활동했다. 그는 공산당에 가입한 적은 있었으나 당시에는 공산주의 활동보다는 반일투쟁의 운동가로서 평가받았다. 해방 이후 평양으로 귀환하여 1946년 조선신민당 위원장으로 있다가 1948년 북조선조선공산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될 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김일성대학 총장, 북조선인민회의 의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장, 조국통일전선의장단 의장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3월 제1차 공산당대표자대회에서 반혁명종파분자로 공격받아 축출되었다. 그 뒤 1960년 지방협동농장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7.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 1935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들이 각기 단체의 통일 전선을 모색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한독립당, 의열단의 대표 14명이 모여 결성하였다.
  8. 김규식(1881~1950) -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ㆍ정치가. 호는 우사(尤史). 19194월 상하이(上海) 임시 정부의 외무 총장으로 파리 평화 회의에 참석하였고, 이어 임시 정부 학무 총장과 부주석 등을 지냈다. 815 광복 후 신탁 통치와 남한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고 김구와 함께 남북 협상을 시도하다가 정치에서 은퇴하였다. 1989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9. 조소앙(趙素昻, 1887~1958) - 본관은 함안(咸安). 본명은 용은(鏞殷), 자는 경중(敬仲), 소앙(素昻)은 호이다. 1887410일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정규(趙禎奎)이고, 어머니는 박필양(朴必陽)이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민주공화제헌법의 기초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국체와 정체의 이론정립 및 임시정부의 대외홍보 전반에 걸쳐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1930년 이동녕(李東寧)ㆍ이시영(李始榮)ㆍ김구(金九)ㆍ안창호(安昌浩)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독자적 이념체계인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입각한 정강·정책의 태극기 민족혁명론을 제창하였는데, 삼균주의는 정치ㆍ경제ㆍ교육의 균등을 골자로 한다. 한국독립당의 대외선전 및 임시정부의 이론전개와 외교문제를 거의 전담하였다. 해방 이후 19484월 남북협상차 평양에 다녀왔고, 12월 방응모(方應謨)ㆍ백홍균(白泓均)ㆍ조시원(趙時元) 등과 사회당을 결성하고 당수가 되었다. 1950530총선에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하여 34000여 표로 전국최고득표자가 되어 제2대 국회에 진출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서울에서 납북되었다. 1956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최고위원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 투옥된 것으로 알려졌다. 1958910일 사망했으며 70년대 말 평양시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이장됐다.
  10. 최동오(崔東旿, 1892~1963) - 일제강점기 천도교인으로서 상해 임시정부 및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의산(義山)이며, 이명은 최학원(崔學源) 또는 최동오(崔東五)이다.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마룡동에서 출생하였는데, 가계와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마룡동에서 서당훈장을 한 것으로 보아 전통적인 유학교육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903년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천도교 중앙종학원 고등사범과와 법정과를 졸업한 후 강도사로 임명되어 의주대교구의 중견으로 활동하였다. 31운동 뒤 상해로 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으며, 193172일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일어나자 최동오는 길림한교만보산사건토구회(吉林韓僑萬寳山事件討究會)를 조직하여 중국관민과의 교섭 및 사건의 실정조사를 진두지휘하였다. 이후 북경과 상해를 중심으로 유동열(柳東說)ㆍ현익철ㆍ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35년에는 김원봉(金元鳳)ㆍ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창당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625전쟁 때 납북되었고, 1963916일 사망하였다.
  11. 송병조(宋秉祚, 1877~1942) - 일명 송영석(宋永錫). 호는 신암(新巖). 평안북도 용천출생. 송재홍(宋再弘)3남이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1914년 졸업과 동시에 목사가 되었다. 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적십자사 감사, 국민대표회의 대표, 신한청년단 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조와 보강에 힘썼다. 이후 임시의정원 부의장, 의장,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7인 가운데 양기탁(梁起鐸)ㆍ유동열(柳東說)ㆍ김규식(金奎植)ㆍ조소앙(趙素昻)ㆍ최동오(崔東旿) 5인이 임시정부를 떠나서 통일당에 참가하여 임시정부 정통의 맥을 유지하기가 매우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차이석과 같이 임시정부를 사수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전하고 제4차 개헌을 통해 주석지도체제(主席指導體制)로 변경할 때, 역시 국무위원에 중임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장, 임시정부 고문, 임시정부 회계검사원장직을 가지고, 광복군을 설립하고 대원수부(大元帥府)의 신설 및 중국과의 조약 체결을 추진하였다.
  12. 차이석(車利錫, 1881~1945) - 일명은 서입환(徐立煥),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동암(東岩).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 평양 숭실학교 제1회 졸업(1904) 후에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1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3년을 복역하였으며 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458월 쓰촨성 중경에서 광복 소식을 접하고 환국준비로 인한 과로로 95일에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였다. 99일 환국 직전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직전 광복이 되었는데 왜 귀국하지 못하고 죽어야 하느냐며 병상에서 애통해 했다 한다.
  13. 양기탁(梁起鐸, 1871~1938) - 초명은 양의종(梁宜鍾), 호는 우강(雩岡). 평안남도 평양 출신. 1895년 미국인 선교사 게일(Gale,J.S., 奇一) 및 아버지와 더불어 한국 최초의 한영자전(韓英字典)을 편수하고, 이듬해 독립협회에 가입했으며, 1898년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00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게일의 알선으로 3년간 일본과 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1902년 이상재 등과 개혁당 조직에 가담하였고, 1904년 러일전쟁 기간에 보안회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후 영국인 기자 베델과 제휴 국한문 혼용체의 일간 신문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때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영어로 번역하여 코리아 데일리 뉴스지에 실어 전세계에 알리기도 하였다. 1907년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05인 사건으로 복역 후에 1915년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고국으로 압송되어 2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1920년 통천교(統天敎)라는 종교를 창교(創敎)하여 교리를 선포하였는데, 표면으로는 종교 운동을 펼치고 내면으로는 독립 운동을 추진하였다. 1924년 오동진, 김동삼 등과 정의부를 조직하고 1926년에 정의부의 무장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고려혁명당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1930년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35년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에 의해 의열단·신한독립단(新韓獨立團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미주대한인독립당(美洲大韓人獨立黨) 등의 5당통일회의가 개최되고 이를 통합한 민족혁명당[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으로 개명]이 조직되자, 김규식(金奎植)ㆍ조소앙(趙素昻)ㆍ최동오(崔東旿)ㆍ유동열(柳東說) 등과 이에 가담하여 대일전선통일에 노력하였다. 1938년 장쑤성[江蘇省] 담양현(潭陽縣) 길당암(吉堂庵)에서 선도(仙道)를 닦다가 죽었다.
  14. 유동열(柳東說, 1877~?) - 본관은 문화(文化). 평안북도 박천 출신. 호는 춘교(春郊). 1894(고종 31)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쇼학교(成城學校)를 거쳐 190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이후 일본 근위사단에서 실무경험을 쌓고, 1904년 러일전쟁 때 대한제국 파견 무관 자격으로 일본군에 종군하여 선천 부근에서 러시아군과 싸우기도 했다. 1907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지하운동을 시작했다. 이때 안창호(安昌浩) 등이 주도한 신민회의 반일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서북학회(西北學會)를 통해 계몽운동도 전개했다. 1911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복역한 후 만주로 망명하여 길림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8년 서일의 중광단에 가입했고, 19192월 김동삼,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선언서39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한때 사회주의운동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1921년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대회(高麗共産黨大會)에서 중앙위원이 되었고, 1926년 중국 길림(吉林)에서 고려혁명당이 창당될 때 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30년 임시정부로 복귀해 국무위원·군무부장을 지냈다. 1935년 난징(南京)에서 김규식(金奎植)ㆍ지청천(池靑天) 등과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해 통일전선을 구축했다. 1945년 광복 후 귀국하여 미군정청 초대 통위부장(統衛部長)을 지냈고, 한국전쟁 때 74세로 납북되었다.
  15. 이시영(李始榮, 1869~1953) -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흡(聖翕),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서울 출신. 1885(고종 22) 이후 10여년 간 관직 활동을 하다가 1895년 관직을 물러난 뒤로는 중형 이회영(李會榮)ㆍ이상설(李相卨) 등과 근대학문탐구에 몰두하였다. 안창호(安昌浩)ㆍ전덕기(全德基)ㆍ이동녕(李東寧이회영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국권피탈 후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에 의거하여 6형제의 가재(家財)를 재원으로 삼아, 1910년말 서간도(西間島)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로 가족을 거느리고 망명하였으며, 1912년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이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초대법무총장에 선임되었으며, 재무총장을 거쳐 1926년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재임하였다. 1933년 중엽 자싱[嘉興]에서 김구(金九)ㆍ이동녕ㆍ송병조(宋秉祚)ㆍ차리석(車利錫)ㆍ조완구(趙琬九)ㆍ김붕준(金朋濬) 등과 함께 임시정부 활동을 재건하고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었다. 1945815일 조국광복과 함께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격으로 환국한 이래 1946년 봄 성균관총재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종교(大倧敎) 활동에 진력였으며,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양성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947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하고, 이후 신흥전문학관(新興專門學館)으로 발전시켜 12회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일시 침체국면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다. 1948720일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ㆍ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전횡에 반대하여 195159일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승만정부를 떠났다.이어 195285일 시행된 제2대 대통령선거 때에는 야당인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그 뒤 국민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16. 조완구(趙琬九, 1881~1955) - 호는 우천(藕泉). 서울 출신. 일찍이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해 19155월 대종교를 포교할 목적으로 북간도 용정(龍井) 일대에 가서 수많은 동포를 상대로 약 3년간 선교활동에 종사하였다. 1918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약소국가들이 독립을 선포하자 이동녕(李東寧)ㆍ이시영(李始榮)ㆍ조성환(曺成煥)ㆍ김동삼(金東三)ㆍ조영진(趙英鎭) 30여 명과 같이 상해(上海)로 갔다. 193111월 중순경 상해에서 한국측 인사 김구ㆍ김철ㆍ조소앙(趙素昻)ㆍ이유필ㆍ안경근(安敬根) 등과 중국측 인사 우쳉칸[伍澄干]ㆍ주쿵모[周公謨] 등과 같이 중한항일대동맹(中韓抗日大同盟, 일명 中韓民族抗日大同盟)을 조직, 항일투쟁을 중국과 연합해 전개하였다. 1943년 김원봉(金元鳳)의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의 황민(黃民) 10여 명의 청년들이 김구의 경호대원 박수복(朴守福)을 매수, 김구와 조완구 등 5명의 국무위원의 암살기도를 사전에 정보를 입수ㆍ적발해 전원을 체포하였다. 194511월 김구 등과 같이 귀국해 건국에 종사하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7. 안공근(安恭根, 1889~?) - 안중근(安重根)의 동생으로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이다. 1909년 평남 진남포보통학교 부훈도(副訓導)로 재직하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일어난 직후 사직하였다. 1919년 상해(上海)의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이듬해 1월 모스크바 밀파외교원에 선정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임시파로외교위원(臨時派露外交委員)에 선임, 러시아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였다. 1921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의 황해도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265월에는 조상섭(趙尙燮)ㆍ최창식(崔昌植)ㆍ이유필(李裕弼)ㆍ오영선(吳永善) 등과 독립운동촉진회(獨立運動促進會)를 조직, “한국 민족의 해방을 촉성하기 위하여 철저한 독립운동자의 조직적 대단결을 달성하려 한다.”는 선언을 발표하고, 그 회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상해에서 김구(金九)의 주도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창당되자 여기에 가담하였다. 이 후 한국독립당의 간부 겸 김구의 심복으로 상해에 근거를 두고 항주(杭州)와 남경(南京)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575일 의열단(義烈團)ㆍ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ㆍ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ㆍ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ㆍ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 5개 단체 대표가 민족유일당으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수립하자 한국독립당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김구 계열과 김원봉(金元鳳) 계열이 갈등을 빚어 민족혁명당이 분열되자, 193511월 김구 등과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직해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상임국무위원(常任國務委員),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의정원(議政院) 황해도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8. 안경근(安敬根, 1896~1978) - 호는 석천(石泉). 황해도 신천 출신. 1918년 종형 안중근(安重根)이 독립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박은식(朴殷植)ㆍ안정근(安定根)ㆍ신채호(申采浩)ㆍ이범윤(李範允) 등과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2월에는 혁명 러시아의 과도기적 혼란으로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상해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해 경무국장 김구(金九)를 보좌하면서 일제 관헌과 밀정 숙청에 진력하였다. 1929년에는 정의부ㆍ참의부(參議府)ㆍ신민부(新民府) 3부 통합운동에 민족통합적 차원에서 합작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자 다시 상해로 갔다. 1930년 상해로 돌아온 뒤 김구ㆍ이동녕(李東寧)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협의해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의 구대장(區隊長)으로 활약하였다. 1934년에는 장개석(蔣介石) 총통과 김구와의 연락 책임을 맡아 한ㆍ중간의 친선을 도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를 중심으로 한 시가 일원에 일제 밀정들의 발호가 극심하자 김구ㆍ정화암(鄭華巖) 등과 함께 밀정 소탕에 공을 세웠다.1940년대 충칭[重慶] 시절에는 김구 주석을 보좌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겸하면서 조국광복에 진력하였다.
  19. 엄항섭(嚴恒燮, 1898~1962) - 경기도 여주 출생. 본관은 영월(寧越), 호는 일파(一波)이다. 일명 엄대형(嚴大衡)으로 불렸으며, 중국 망명 당시에는 예빗·이라고도 불렀다. 1919년 보성법률상업학교를 마칠 무렵,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후인 19451123일 임정 요인 제1진으로 환국하여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으로서 김구를 보좌하여 김구 명의의 발표 성명이나 국민에게 발표하는 호소문 등을 대부분 기초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195672~3일 열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주석단의 1인으로 참석하여 상무위원 11인과 집행위원 29인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958반당ㆍ반혁명 행위혐의로 체포되었다. 1962730일 평양에서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북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혀있다.
  20. 해삼위(海蔘威) - 러시아 연해주 지방의 항구 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를 한자음으로 바꾸어 이르는 말.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