杏花春(행화춘)
내가 열 살도 채 못됐을 때 얘기니까 20세기 초였을 것이다. 우리집에는 도시락용 작고 납작한 세류광우리 종류가 많았다. 먼데 모신 선산에 제사드리러 갈 때에는 여러 가지 제물을 그 세류[1]로 엮은 도시락 상자에 한 가지씩 따로 따로 넣어 장정들이 지고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집 도시락 상자에는 반드시 ‘杏花春’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살구꽃 봄’이라 이름치고는 근사하다. 나는 하루 어머니께 杏花春의 의미를 물었다.
“그건 네 ‘어머니’가 시집올 때 데리고 온 몸종의 호명이란다”, “열 두어살 된 귀엽고 예쁜 아이였다.”
“지금 어디 있어요?”
“종 놓아주라는 법이 생기자마자 백리 밖 바닷가 ‘굴개’라는 데 사는 튼튼하고 믿음직한 총각 하나 얻어 짝지어 주고, 많지는 못해도 혼수와 살림살이를 갖춰 주었는데 소문대로는 거기서 아들 낳고 딸 낳고 잘 산다더라.”
내가 열 한 살쯤 됐을 때, 어느 날, 의젓한 젊은 부부가 어린 아들 딸 데리고 우리 집에 찾아왔다. 아버님과 형님은 어디론가 출타하시고 어머니만 집에 계셨다. ‘손님’은 아이들까지 어머니께 큰 절을 하고 진짜 어머니 뵙듯 공손하게 그리고 반갑게 모신다. 그 동안에 살림 늘리던 얘기도 듣기에 지루하지 않았다.
그들은 “굴포에서 소금구이로 살아가다가 암만해도 시덥잖아서 언덕바지를 갈아 밭을 만들고 콩, 감자, 옥수수, 조, 팥 등 곡식을 심었더니 샛바람이 불어도 일 년 식량은 거기서 나오고, 바닷고기로 아쉬운 줄 모르고 살니답쇼 …… 모두 인자하신 상전님 덕택이와요!” 한다. 녹음한 것이 아니니까 ‘뜻으로 본’ 그들의 대화였다. 그게 杏花春(행화춘) 가족이었다
내가 20대 청년으로 공부 때문에 대여섯 번 그 지방에 들린 일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杏花春이란 이름이 떠올라서 적잖이 ‘센티’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일부러 찾아볼 용기는 없었고 용기가 있다 해도 찾을 단서가 없었다. ‘일제’가 호적 만들 때에 ‘성’과 ‘이름’을 지었을 텐데 그 ‘창씨작명’이 무언지를 나는 모른다.
어쨌든, 인간이 ‘해방’된다는 것은 그에게 ‘인간됨’을 되찾게 하는 신적(神的)인 성업(聖業)이다.
그리고 그가 자기 재주껏 뭔가를 창조하는 ‘창조주의 형상’을 자랑스럽게 빛내는 첫 날이라 하겠다. 그 반면에 어떤 훌륭한 명목 밑에서라도 ‘인간 압박’과 ‘자유 박탈’은 ‘악마적’이다. ‘Devilish’[2]란 용어가 과잉 표현이라면 Demonish Power라고는 일컬을 밖에 없겠다. 떳떳한 ‘자유시민’을 종살이하는 ‘杏花春’으로 짓누른다는 것은 ‘악마’의 그것만으로 족하다.
[1982. 3. 1]
[각주]
- 세류(細柳) - 가지가 매우 가느다란 버드나무
- Devilish – 악마 같은, 몹시, 극악무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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