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恨”(한)과 “한풀이”
“한”(恨)이란 것은 뭔가 외부로부터의 압력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자”가 되어 그 억울함을 가슴깊이 지니고 신세타령에 자기 좌절을 미화하는 일면이 있다.
한국 민요의 대부분은 비련의 향연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한’이 즐거움이 표현일 수는 없다. 그래서 ‘한풀이’가 필요해진다. ‘한’은 풀어줘야 한다. 그대로 두면 ‘한’이 맺혀서 ‘원귀’가 되어 복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무당’이 먹고산다.
한국 민중, 특히 여성들에게는 무교의 뿌리가 깊다. 따라서 ‘恨’(한)이 민족의 체질로 응결됐다는 견해도 늘어간다. 지성인들까지도 ‘한’을 ‘당연’한 것으로 긍정하고 그 ‘한’을 풀어주는 것으로 ‘한’을 극복하려 한다.
인간은 ‘정의’를 사모한다. 적어도 삶의 ‘정상태’를 원한다. 그러나 외부세력이 그것을 뭉갠다. 그래서 억울하게 짓밟힌다. ‘귀신’에게 포로된 인간같이 된다. 그것이 ‘내향화’해서 ‘한’을 잉태했다. 그것을 유산시키려고 ‘한풀이’를 한다고 할까? 그러나 그것을 ‘한’ 자체를 뽑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한 때, ‘울쩍’을 발산시키는 정도일 것이다. ‘귀신단지’는 골방에 모셔둔대로 ‘탈’이 나면 빌붙는 것과 같다.
우리 민족심리에서 ‘한’ 자체를 몰아내야 한다. ‘귀신’을 내쫓아야 한다. 악령을 몰아내야 한다. 그것이 예수의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기도 하다.
우리 역사는 대체로 임금 중심의 ‘사건’ 기록이었다. 민중주도의 생활사(生活史)는 아니었다. 그래서 ‘의사’(義士)가 반역자로 몰리고 ‘혁명군’이 역도로 ‘토벌’되고 ‘백성’이 ‘종’으로, 소작인은 ‘농노’로 짓밟혔다. 이런 것이 ‘한’이다. 그러나 이 ‘한’을 ‘내향적’으로 체질화할 것이 아니라 ‘외향적’으로 공격해야 한다. ‘말’로, ‘글’로, ‘몸’으로, ‘그룹’으로 ‘자유’와 ‘죽음’과를 엇바꿈으로 행군해야 한다. 이것이 ‘한풀이’의 정로(正路)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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