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23일 금요일

[기독교의 기본문제] (3) 信仰(신앙)의 生態(생태)

信仰(신앙)生態(생태)

(히부리 11:1)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못한다(11:6) 했습니다.

 

믿음은 宗敎(종교)로 들어가는 關門(관문)입니다. 科學(과학)은 이미 주어져 있는 客觀的(객관적)資料(자료)들을 實驗(실험)함으로써 그 ()成立(성립)시킵니다. 哲學(철학)은 이미 주어진 人間(인간)理性(이성)使用(사용)하여 觀念的(관념적) 論理(논리)諸般事爲(제반사위)어떠할 것이다. 어떻게 되어야 하겠다하는 것을 規定(규정)지어 그 ()構成(구성)합니다. 그러나 宗敎(종교)事物(사물)存在(존재) 以前(이전)世界(세계), 人間理性(인간이성)超絶(초절), 論理(논리)()이 닿지 못하는 世界(세계), 말하자면 絶對(절대), 絶對他者(절대타자), 究極(구극)世界(세계)對象(대상)으로 하는 것이니만치 實驗(실험)理論(이론)도 그 앞에서는 소용없게 됨과 同時(동시)에 그 代身(대신) “信仰”(신앙)이라는 새 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實驗(실험)할 수 있는 事物(사물)世界(세계)만에 만족하거나 자신의 理性圈內(이성권내)에서 깨끗이 諦念(체념)할 수 있다면 人間(인간)으로서의 問題(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動物(동물)世界(세계)에서와 같이 機械的(기계적)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存在”(존재)에서 超存在”(초존재)追求(추구)합니다. 時間(시간)에서 永遠(영원)憧憬(동경)합니다. ()에서 永生(영생), 依存者(의존자)로서 自存者(자존자)被造物(피조물)로서 創造主(창조주), 相對(상대)로서 絶對(절대)를 찾아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이기 때문에 宗敎(종교)는 언제나 人間(인간)과 함께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世界(세계)科學者(과학자)實驗臺(실험대) 위에 오르지 않고 哲學者(철학자)思惟圈(사유권) 안에 들어오지도 않기 때문에 根本的(근본적)冒險(모험)飛躍(비약)敢行(감행)하는 信仰”(신앙)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信仰(신앙)無視(무시)하거나 宗敎(종교)撲滅(박멸)하려는 것은 人間性(인간성) 自體(자체)의 가장 根本的(근본적)인 것을 박멸하려는 것이어서 정녕 失敗(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어떤 분은 나는 無宗敎(무종교), 無信仰者(무신앙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意識的(의식적)으로나 無意識的(무의식적)으로나 ()에 온전히 無宗敎(무종교), 無信仰(무신앙)한 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어떤 旣成宗敎(기성종교)의 테두리 속에 들어와 있지 않다는 것 뿐입니다. 그는 반드시 무엇에 依支(의지)하고 삽니다. 무엇을 絶代(절대)라고 믿고 삽니다. 그것이 일 수도 있고 愛人”(애인)일 수도 있고 무슨 理想(이상)”일 수도 있고 國家”(국가)일 수도 있고 自己”(자기)일 수도 있고 子女(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가 무엇을 믿고 사느냐가 문제요, 믿느냐 안믿느냐가 문제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돈과 하느님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는 둥, 사도들이 너희는 배로 네 하느님을 삼는다는 둥 하는 말은 다 그런 것을 宗敎化”(종교화) 하고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결국 따져보면 우리가 창조주를 믿지 않으면 被造物”(피조물)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被造物崇拜”(피조물숭배)가 곧 偶像崇拜(우상숭배)인 것입니다.

 

聖經中(성경중)()讚歌(찬가)”는 고린도前書 十三(13)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信仰”(신앙)讚歌(찬가)는 오늘 읽은 히브리 十一(11)장에 적혀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을 규정하여 말하기를 믿음은 보이는 것들의 實相(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實相”(실상)이란 말은 헬라()후포스타시스여서 英語(영어)로는 “Substance or Reality”라고 번역합니다. “本質”(본질) ()實在”(실재)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 () 소망의 本質(본질), () 실제라는 말입니다.

 

크리소스톰은 이 구절을 설명해 말하기를 우리의 復活(부활)은 아직 소망이긴 하지만 實在(실재)는 아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의 영혼 안에서 그것을 實在化(실재화)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우리를 時間(시간)의 연속에서 끄집어내어 永遠(영원)世界(세계)에 높이 올리는 것이며 거기서는 未來(미래)現在(현재)와 똑같이 實相(실상)이다하였습니다.

 

埃及(애급)에서 파낸 파피러스”(紙片) ()에서 밀리캔 博士(박사)가 발견한 바라 하여 紹介(소개)된데 ()하면(Dean Inge) 實相”(실상)이라고 번역하는 헬라() “후포스타시스法的(법적)으로 使用(사용)할 때에는 土地文券”(토지문권) () 요새로 말하면 所有權保存登記”(소유권보존등기)와 같은 뜻으로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實相(실상)이라는 말은 바라는 것들에 대하여 보존등기를 해가지고 있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 되어 따라서 보지 못하는 것들(未現物)의 증거라는 것도 自然(자연)스럽게 ()해지는 것 같습니다. 何如間(하여간) 재미있는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人書定義(정의)信仰”(신앙)舊約的(구약적)인 것이어서 무슨 것들(“Things hoped for”, “Things not Seen”)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것이 新約(신약)에 와서는 것들이 아니라, () “人格(인격)”信仰(신앙)對相(대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 그리스도라는 그 를 믿고, 보이지 않는 그 를 보는 눈이 믿음이며 그 의 말씀에 아멘하고 응답하며 全存在(전존재)를 바쳐 順應(순응)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그 마음 안에 占據(점거)하고 계시게 된 크리스찬 信仰(신앙)所有者(소유자)果然(과연) 어떠한 生態(생태)를 보이고 있는가? 이것을 오늘 말씀드려 보기로 합시다.

 

(1) 이 믿음 있는 ()一所不在”(일소부재)巡禮者(순례자)와 같이 계속 前進(전진)하며 冒險(모험)합니다. 所謂(소위) 徹底(철저)保守派”(보수파)가 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西紀(서기) 1492년에 콜럼버스가 一葉片舟(일엽편주)를 타고 大西洋(대서양)을 건너 美大陸(미대륙)發見(발견)했습니다. 哲學者(철학자) 산타나야는 말하기를 콜롬버스는 하늘을 判讀(판독)하는 믿음 以外(이외)에 다른 航海地圖(항해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믿음 있는 ()生態(생태)를 잘 그려낸 말입니다. 믿음은 安全第一”(안전제일) 主義(주의)에 주저앉지 않습니다. 어떤 旣成勢力(기성세력)安堵(안도)하여 아랫목에 자리를 펴고 들어 누우려는 所謂(소위) 靜的(정적)安心立命”(안심입명)()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有名(유명)說敎者(설교자)가 말하기를 그리스도교信仰(신앙)의 제일 큰 원수는 凡庸”(범용, Mediocrity)이라고 했습니다. 信仰(신앙)平凡”(평범)한 삶이 아닙니다. 非常(비상)한 것을 戰取(전취)하려는 冒險(모험)입니다. 百尺竿頭(백척간두)에 또 한걸음 내 디디는 前進(전진)입니다. 그러므로 信仰(신앙)은 언제나 危機”(위기)內包(내포)하는 것입니다.

 

싹맨 博士(박사)(Ralph W. Sockman)의 설교에서 이런 재미있는 引例(인례)를 읽었습니다. 1886美國政府勞動局長(미국정부노동국장)國內(국내)國外(국외)情勢(정세)를 시찰하고 보고하기를 필요한 철도, 운하, 통신, 상선 등이 다 완비되었다. 지금부터 五十年(50) 동안은 새 것을 만들 필요가 없다. 이미 시설한 것만 가지고 안락하게 살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당분간은 신발명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어느 때냐 하면 토마스ㆍ에디손이 39, 헨리ㆍ포오드가 23, 촬스ㆍ스타인멧즈가 21, 큐리夫人(부인)19, 로버-트ㆍ밀리갠이 18, 오빌ㆍ우리이트가 18, 말코니가 12, 아인슈타인이 7세 때였다 云云(운운) 하였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지금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하고 예수께서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졸며 쉬지도않으시므로 信者(신자)不斷(부단)前進(전진)하는 것이 그 生態(생태)인 것입니다. 믿음은 소망의 줄을 타고 자라나는 생명의 尖端(첨단)에서 불붙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佛敎的(불교적)인 영향이 있어 그런지 몰라도 잘믿는 사람은 부처님처럼 다리를 도사리고 앉아서 永遠(영원)()하는 운명을 명상하는 고요함에서 그 점잖음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을 動物的(동물적)인 것에서보다도 靜的(정적)인 데서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리스찬 믿음의 本性(본성)이 아닙니다.

 

(2) 믿음 있는 ()는 새 것을 창건합니다. 그리스도는 새 언약을 세우고 새 사람을 만들고 새 人類(인류)를 지어가며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표어로 새 기구를 의도했습니다. 그는 萬物(만물)을 새롭게 한다. 終末(종말)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 ()와 사랑과 永遠(영원)生命(생명)이 머무는 世界(세계)完成(완성)하여 선물로 남긴다고 그 몸을 던졌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찬信仰(신앙)이 움직이는 곳에는 반드시 무슨 새 生命(생명)이 싹트는 것입니다. 무슨 새롭게 하는 운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이화(梨花)에도 새로운 누룩의 건전한 건설적인 운동이 胎動(태동)하고 있음을 봅니다. 거기에는 왼 世上(세상)混濁(혼탁)해도 混濁(혼탁)하지 않은 손으로 웅키어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맑은 샘물터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어떤 ()에서는 ‘”()()만 붙으면 질겁을 하고 ()神學(신학)이라면 惡魔(악마)라고 배척합니다. 그저 옛날 것을 온전히 그대로 無批判(무비판)하게 받아서 그것을 後代(후대)()해야 한다고 극성을 부립니다. 옛 것이라고 다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언제나 時代”(시대)가 새로우면 그 표현과 對策(대책)應答(응답)”이 또 呼吸(호흡)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孔子(공자)님의 말씀이 50년전이나 지금이나 옳은 데는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나 50년전 儒學者(유학자)가 갓쓰고 ()포 입고 갓신 신고 八字(팔자)걸음을 하면서 前線(전선)指導者(지도자) 노릇하던 그 用語(용어), 氣分(기분), 態度(태도), 生理(생리)와 분위기를 그대로 가지고 오늘의 成均館大學(성균관대학) 敎授(교수)가 되려면 웃음꺼리 밖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회에서도 그런 막힌 생각으로 生生(생생)後進(후진)을 망치려 하려는 데는 憤怒(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믿음은 戰鬪行爲(전투행위)입니다. 逃避(도피)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철저히 싸우며 철저히 이기는 戰鬪(전투)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는 바리새()과 사두개()抗拒(항거)하여 最後(최후)까지 싸웠습니다. 그는 敗北主義者(패배주의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장부가 되라하고 바울은 외쳤습니다.

 

楚辭”(초사)에 쓰인 屈原(굴원)漁夫(어부)對話(대화)東洋人(동양인)亂世(난세)()하는 태도를 잘 드러냈습니다. 屈原(굴원)江湖”(강호)隱遁(은둔)했습니다. 세상이 다 ()한데 나 혼자 깨끗하고 세상이 다 취했는데 나 혼자 깨었으니 내 어찌 이 조촐한 몸을 더러운 데 섞겠느냐? 하는 것이 屈原(굴원)의 말이었습니다. 漁夫(어부)與世推移”(여세추이)를 권했습니다. “세상이 다 ()했으면 너두 취한 척 하면서 어울려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信仰(신앙)所有者(소유자)世上(세상)이 썩었으면 소금 노릇을 하고 세상이 어두우면 등불 노릇을 하고 세상이 맹숭맹숭하면 누룩노릇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十字架(십자가)가 온다. 그것이 그대로 네 榮光(영광)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世上(세상)이 그대로 天國(천국)이 되어있지 못한 (), 그리스도 信仰者(신앙자)不斷(부단)挑戰(도전)해 나아갑니다. 修道院(수도원)으로 피하지 않습니다. 初代敎徒(초대교도)들을 보십시오. 羅馬帝國(라마제국)을 향하여 數十萬(수십만) 殉敎者(순교자)의 피를 심어가며 싸와 이겼습니다. 淸敎徒(청교도)들은 英國(영국)에서 혁명에 이겼으며, 新大陸(신대륙)美國(미국)을 세웠습니다. 無智(무지)()를 보고 啓蒙(계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病弱者(병약자)를 보고 병원을 시설하지 않고는 못견딥니다. 不義(불의)屈從(굴종)함을 영리하다 하지 못합니다. 人間(인간)들의 모든 問題(문제)無關心(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世上(세상)이 더럽고 ()할 세상이라고 逃避(도피)할 작정이라면 그리스도는 ()코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世上(세상)에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信仰(신앙)所有者(소유자)神秘的(신비적)陶醉境(도취경)에는 投入(투입)하지 않습니다. 神秘主義(신비주의)神人一如(신인일여)를 즐깁니다. 陶醉境(도취경)에는 世上”(세상)現實(현실)計算(계산)에서 빠집니다. 그는 하늘에 直通(직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敎 信仰(신앙)은 어디까지나 現實的(현실적)입니다. 歷史的(역사적)입니다. 어디까지나 現實”(현실)을 더 큰 現實”(현실)克服成就(극복성취)하려는 行動(행동)입니다. “混沌無形”(혼돈무형)한 가운데서 秩序(질서)形態(형태)”創造(창조)되었다는 창세기의 창조설화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靈力(영력)으로 現實(현실)創建(창건)해가는 生活(생활)입니다.

 

우리나라 信者(신자)()에서는 超世間的(초세간적)이면 신령하다고 ()과 같이 그저 얌전하고 無事(무사)하면 잘 믿는다 하고 바리새()같이 무슨 法律條文(법률조문)이나 慣習(관습)이나 지키면 그만인 것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信仰者(신앙자)는 어디까지나 ()으로 (), ()으로 (), ()(), 建設(건설)破壞(파괴)를 이기어 그 能動的(능동적)인 그리스도의 贖良(속량), 建設的(건설적)自由(자유)를 그 ()鬪爭(투쟁)으로 증거하며 그 무덤앞의 十字架(십자가)가 그의 一生(일생)實質的(실질적)으로 標識(표식)記錄(기록)이 되게 하는 戰士(전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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