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9일 금요일

[범용기 제5권] (11) 북미유기 제7년(1980년) - NY에

[범용기 제5] (11) 북미유기 제7(1980) - NY

 

8025() - 22-4일까지 Toronto에 방문와서 각양 집회와 회담에 바쁘던 N.Y. 박상증 목사가 오늘 N.Y.로 돌아간다.

장공도 같이 N.Y.에 갔다. 늦었기에 박상증 Apt에 억지로 끼어 하로[1]밤 지냈다.

8026() - 박상증 박사는 와싱톤으로 가고 나는 Church Center에 가서 구춘회를 만났다.

만찬은 상증의 동생 승증의 집에서 차렸다.

밤 새로 한시까지 그의 부친 박현명[2] 목사와 만우장공과의 친분과 회고담으로 지난 날들을 들췄다.

8028() - 7일 하루는 박승증 집에서 쉬고, 오늘 N.Y.에 돌아왔다.

김관석 총무가 N.Y.에 왔기에 그를 Taft호텔에 방문했다. 여러 가지 정리된 한국 소식을 들었다.

그 호텔에서 나도 유숙했다. 밤이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8088() - 김 목사와 함께 조반을 나누고 Church Center에 갔다.

김관석은 이북 방문은 좋으나 단독 행동은 삼가자고 충고한다.

미리 동지들의 양해를 얻고 어떤 집단체의 공적인 파송으로 되야 자신도 떳떳하고 잡음이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승만 박사의 이북 방문에 대한 금후의 경고 비슷한 말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인줄 알면서 입국을 허락할 만큼 아량있는 이북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입국되더라도 맘껏 선전용으로 써먹을 것이 아닐까 싶다.

80210() - 11A.M.에 박승증 씨가 출석하는 Korean United Methodist Church of N.Y.에서 예배했다.

담임목사는 박성모[3] 박사였다.

예배 후 사모님의 오찬 대접을 받고 최우길 장로 댁에 갔다.

거기서 유련했다.

80212() - 토론토에 돌아왔다.

눈이 덮였다. 아내는 병상에 누워있다.

 

[각주]

  1. 하로 - ‘하루의 방언
  2. 박현명(朴炫明, 1900~?) -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이다. 박현명의 처가는 이준을 배출한 명문가였는데, 과거 공부를 위해 처가에서 공부하다가 근처의 교회에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후 한학 공부를 중지하고 경성부로 올라와 성결교 계열의 경성성서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전도사를 거쳐 개신교 목회자가 되었다. 1927년 일본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7년간 사역한 뒤 1934년 귀국해 경성성서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성결교단의 지도적 인물로서 어용 단체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다. 조선기독교연합회(1938),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연맹(1939~1940), 국민총력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연맹(1940~1943), 기독교신문협회(1942) 등이다. 반면, 1943년 경부터 극단적인 서양 종교 탄압으로 선교사 추방, 신학교 폐쇄 등의 조치가 잇따르면서 박현명도 성결교의 교리가 문제가 되어 투옥되는 일이 있었다. 광복 후 서울신학교 교수로 일하면서 1946년 재건된 기독교조선성결교회의 초대 총회장을 맡는 등 활동을 재개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중 북한으로 납북되었다. 당시 박현명은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인 서울신학교 구내 사택에 거주했는데, 서울이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되어 있던 823일 서울 종로구의에서 열린 기독교도연맹회의에 송창근 등과 함께 참석했다가 한꺼번에 실종되어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에서 1950년대 중반 또는 1960년대 초반까지 생존했거나 공식 활동을 했다는 풍문이 있을 뿐, 이후 소식은 알 수 없다.
  3. 박성모(1937~2009) - 전라북도 김제 태생. 전주고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석사, 미국 뉴저지 드루 신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77년 롱아일랜드 그레잇넥에 뉴욕한인교회를 창립하고 30여 년간 목회활동을 펴온 미국연합감리교 뉴욕연회 소속 목사. 광주항쟁을 지켜보면서 독재와 탄압의 근원이 남북의 분단에 있다는 진실을 파악하고, 동족끼리 원수처럼 대결하는 조국의 분단 현실을 누구보다 가슴 아파 하였다. 그는 민족 화해와 협력, 통일운동에 투신하여 615 뉴욕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화동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목사를 은퇴한 후, 새누리선교회를 조직하고 문동환, 함성국, 유태영, 차원태, 김경락 등 통일애국운동에 뜻을 같이한 원로목사들과 신자들로 작은 동아리를 꾸려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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