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8일 일요일

[범용기 제5권] (110) 요꼬하마에 - 來客(내객)도 있고

[범용기 제5] (110) 요꼬하마에 - 來客(내객)도 있고

 

921() - 흐리고 비 오는 날이다.

2:00PM에 고규환 목사, 홍순관 목사 안내로 내 방에 찾아와서 약 2시간 그의 고문당하던 얘기를 피력했다. 예장 장로로서 고문치상 제1호다.

주리로 종아리뼈가 부러지고 돌에 박아 정신착란이 생기게 하고 신앙 없이는 견뎌낼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그는 그 당시에 예장총회 기관지인 기독공보 편집인이었다. 아무 죄도 없는 죄인이 됐던 것이다.

KCIA에서는 그가 골절된 줄 알자, 연지동 5가에 있는 이용설[1] 병원 분실에 팽개치고 갔다.

나도 그때 그 병원에 그를 방문하고 기도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는 그 후에 목사가 됐다.

지금 그는 그때의 고문실상을 폭로하며 각 교회에 간증선교 여행을 계속한다. 하루에 세 번 이상 집회한다.

박희민 목사가 모셔 갔다.

이 목사와 신자가 많은 식품을 사 갖고 왔다. 인철ㆍ혜원도 김치꺼리와 김치 속 넣는 각종 양념을 갖고 왔다.

경용ㆍ효순과 그 식구들도 식품들을 갖고 왔다.

926() - 오후에 연금[2] 부부의 안내로 N.Y.의 문동환[3] 박사가 내방했다. 1시간 반 얘기했다.

928() - 시내 민주한인목사와 사모님들이 이상철 목사 집에 모여 문동환 환영 Party를 열었다. 이 목사가 Apt.에 들러 나도 픽업해 갔다.

문동환 박사의 고난과 ’()의 신학을 들었다.

의를 위해 핍박받는 동안에 주어지는 은혜의 경험은 조개의 진주라고 느껴진다.

930() - 나의 거실 겸 서재의 정리는 오늘로 완료했다. Orderly하게 되어 기분이 좋다.

4:00PM에 이상철 목사가 처와 나를 모시고 Weston에 간다. 우리 일행(이 목사 부부, 장공 부부, 문동환)을 태워 갖고 정동석ㆍ민혜기 집에 갔다. 거기에 한신대동문들이, 같은 동창인 문동환 박사 환영 Party를 연 것이었다.

만찬을 마치고 문 박사의 수난 경위와 고난 실화를 들었다. 모두 경청한다.

10:00PM에 집에 왔다.

104() - 연합교회에서 예배했다. 문동환 박사가 을 풀어 준다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예배 후에 혜원 집에 가서 저녁 먹고 다시 교회에 가서 동환의 설교를 들었다. ‘()’의 신학 속편이다.

11:00PM에 이 목사 차로 Apt.에 왔다.

105() - 문동환 박사는 오전 중에 디트로이에 갔다. 거기서 집회하고 N.Y.에 돌아간다는 것이다.

106() - 애굽의 사다트[4] 대통령이 과격파 회교도들(?)에게 암살됐단다.

1010() - 3:00PM에 조홍래라는 이름의 주 토론토 한국영사가 왔다. KCIA 책임 영사라고 들었다. 7월에 부임했는데 인사드리러 왔노라 한다.

나는 말했다. “독재 군인 정치에는 아무 것도 기대하기 어렵고 믿을 수도 없다. 광주학살 사건부터 시작한 그의 집권태도가 무법자체인데, 누가 믿겠느냐? 국제여론도 악화했다.”

그는 말했다. “광주사변은 변명할 여지가 없지만, 그것도 과장선전이 많습니다. 지금 많이 개선됐고, 더욱 개선될 것입니다.”

개인 자유와 인권 존엄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데, 나는 개선됐다는 뜻을 이해할 수 없는데요!”

지금은 38선이 군사대결선이고, ‘평화선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 남침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극상했자 휴전선밖에 될 수 없고 따라서 군사정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7년 임기 완료될 때에는 신헌법에 의하여 반드시 현정권은 퇴진하고 민주정부가 서게 될 것입니다. 그건 전 대통령께서 누누이 언명한 것이니만큼 반드시 지켜줄줄 믿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지금부터 자유민주정치를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성의를 보여야지요. 그런데 정치인도 아닌 종교지도자들까지 박해하는 것은 민주보다도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가 싶소이다.”

두고 보십시오. 그분은 꼭 그대로 하실 것입니다.”

그는 고대출신이라는데 사실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1012() - Vancouver의 반병섭[5] 목사가 박재훈[6] 장로와 함께 내방했다. 나의 휘호를 간청한다.

담화무진(無盡)이다. 9:00PM에 기도하고 작별했다.

1013() - “범용기1권이 반입됐다.

글씨를 쓴다. 반병섭 목사를 위해 2, 김용옥 박사를 위해 2, 신복균ㆍ송민자 부부 박사님들을 위해 각 1폭씩 썼다. 윤 박사 부부는 혜원을 통하여 부탁해 왔던 것이다.

1015() - “범용기2권 집필한다.

쓰다가 피곤하면 은용ㆍ행강이 갖다 준 Lawn Chair를 창가에 놓고 잠시 눕는다.

1017() - 이건일, 이인선 내외분이 선물 들고 문안왔었다. 지금은 Store를 경영한다고 했다.

혜원, 지영, 지영의 고모 문안왔었다.

1020() - 박재훈 박사와 함께 교외에 풍림(楓林) 탐승을 떠났다. 일기가음산하고 춥고 바람이 세다.

Notingham 방면으로 달렸다. 단풍은 원래 제대로 물들지 못한데다가 바람이 닥쳐서 나무들은 겨울의 나목(裸木)이 되어 엉성하다.

백년 묵은 식당이라는 나이자랑으로 한몫 보는 음식점에서 오랜지쥬스와 스카취수프를 주문했다. 수프는 짠 것이 특색이었다. 곧 돌아왔다.

1022() - 하령 생일인데 하준의 생일까지 겸하여 Birthday Party아빠ㆍ엄마가 열어줬다.

할아버지는 돈 20불씩 선물로 줬다. 아직 돈 값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선물로 뭔가를 사 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지만 선물 고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도 들고 교통수단도 없고 해서다.

1026() - 김경재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완상, 서광선, 현영학 등이 미국 와서 교수직을 갖고 정착할 공산이 크다고 했다.

1028() - 서울 한신대구약교수 장일선이 자기 저서 구약세계의 문학한 권을 증정해왔다.

장일선은 한신2대 졸업생이다. 그의 부친인 장형일도 한신 출신이고 장일선도 한신 출신이다.

1030() - 간염은 원상태로 되 가는 것 같다. 위가 부풀고 식욕도 없고 몸이 부어 오른다.

1031() - 종일 범용기2권 집필.

 

[각주]

  1. 이용설(李容卨, 1895~1993) - 호는 여천(與天). 평양 출생. 1912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마친 뒤 베이징 협화대학(協和大學) 부속병원에 근무하였다. 이때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그의 사상에 감명을 받아 1924년 흥사단에 입단하였다. 1929년 이사회장을 역임하는 등 일생동안 흥사단운동에 헌신하였다. 1926년 미국 시카고 서북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세브란스의과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36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광복 후 과도정부 보건후생부장을 지냈고, 그 뒤 세브란스병원장을 위시하여 연대동문회장ㆍ동명학원 이사장ㆍ국제외과학회 한국지회장ㆍ대한나협회장ㆍ서울국제로터리회장ㆍ대한적십자 중앙위원ㆍ대한병원협회장ㆍ기독교장로회장 등 다방면에 걸쳐 사회봉사의 훌륭한 업적을 쌓았다. 질소검박(質素儉朴)ㆍ근면절약ㆍ애국애족의 생활철학을 몸소 실천하여 나라의 원로로서 국민의 많은 존경을 받았다. 또한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진실과 봉사정신의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2. 문익환 목사의 딸 문영금
  3. 문동환(文東煥, 1921~2019) - 1921년 북간도에서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여사의 3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곳에서 그는 형 문익환 목사, 윤동주 시인 등과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 김약연 목사를 보면서 목회자가 될 꿈을 키웠다. 용정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중 아버지(문재린 목사)와 친분이 있던 김재준 목사를 만났고, 그의 영향을 받아 일본의 신학교로 유학했다. 당시 태평양 전쟁 말기라 학도병 징집의 위험이 있어서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문익환 목사와 함께 조선신학교에 편입하였고,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 미국으로 유학하여 웨스턴, 프린스턴, 하트포트에서 공부했다. 유학중 만난 페이문(문혜림)과 결혼하였으며,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1961년부터 한신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수도교회 등에서 목회를 하였다. 1975년 해직된 그는 동료 해직교쉰 서남동, 안병무, 이문영 등과 갈릴리교회를 설립해 민중교회의 모태가 되게 했다. 1988년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제13대 전국구 국회위원과 평화민주당 부총재를 지냈으며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3당합당에 반대해 정계 은퇴하고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2013년 귀국했다.
  4. 안와르 엘 사다트(1918~1981) - 이집트의 세 번째 대통령을 지낸 군인ㆍ정치가이다. 1981106일 카이로 근교인 나스루에서 수에즈 운하 도하 기념 군사 퍼레이드 중 소련의 사주를 받은 과격 이슬람 원리주의자 할리드 이스람불리와 다른 2명의 공범의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 당시 1발의 수류탄과 37발의 AK 소총 실탄을 맞고 죽었다고 한다.
  5. 반병섭(1924~2017) - 만주 출생. 1969년 시카고 루터교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1970년 캐나다 밴쿠버 연합교회 목사로 부름을 받았다. 찬송가 가슴마다 파도친다의 작사가로 유명하다.
  6. 박재훈(朴在勳) - 1922년 강원도에서 출생하였다. 1942년 평양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데뷔하였고, 한국전쟁 때 해군본부 군악대 하사로 복무하였다. 전쟁 이후 초등교원과 중등교원을 지내다가 장수철 등과 기독교 음악 활동을 하며 서울 영락교회 장로회 한양대학교 음악학과 교수를 지낸 그는 1973년 미국을 거쳐 1977년 캐나다로 건너가 60의 나이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큰빛장로교회를 목회하다가 조기 은퇴하고 원로목사로 섬겼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