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제5권] (119) 요꼬하마에 - 新彊(신강)의 流謫者(유적자)
西藏(서장) 靑海等(청해등)은 고삐사막의 본고장이다. “고삐”란 말은 “자갈”(Gravel)이란 뜻이라 한다. 해수욕장의 금모래, 은모래, 세모래 등 부드러운 낭만의 고장은 아니란 말이겠다.
“자갈”로 깔린 끝없는 빈들이 중국에서는 거기에 “도독”을 두고 될 수 있는대로 자치를 허용하면서 前線(전선)의 基地(기지)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天子(천자)가 자기 뜻에 거슬리는 고관이나 重臣(중신)들을 귀양보내는 땅으로도 써 왔다.
가담가담[1] “오아시스”가 맑은 호수로 갇혀 있다. 강물도 흐른다. 자갈벌판이라지만 철따라 풀이 푸르고 白草(백초)라고도 하는 사총(砂怱), “모래마늘”이랄까가 자갈 틈에서 하얗게 숨쉰다. 그 잎을 뜯어 삶아 먹기도 하고 김치처럼 담가 먹기도 한다.
중국 근대사 중에서, 천년 묵은 ‘체증’이 밀려 나간 듯 통쾌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아편금절(絶)을 위해 廣州(광주)에 파견된 欽差(흠차) 대신 林則徐(임칙서)[2]가 廣州(광주)에 주재하던 雨廣(우광) 總督(총독)과 합작하여, 영국 상인 소유인 아편 2만여 상자를 몰수하여 虎門(호문) 밖에서 태워버린 일일 것이다. 이 용감한 처사 때문에 林則徐(임칙서)와 鄧延楨(등연정)은 이 고삐사막의 新彊(신강)에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두 분이 다 60을 바라보는 노쇄기 연력이었다. 혈혈단신으로 이 자갈벌판에 자갈처럼 던져진 것이었다. 떨어진 넝마를 걸치고 영상 50도의 고열과 영하 30도의 혹한을 날마다 번갈아 당하면서도 그들은 “詩”(시) 한편 출생하면 숨가쁜 “혼”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들은 사람 하나씩 밖에 통과 못한다는 “옥문관”을 나왔다. 진짜 황랑한 변방이다. 시성(詩聖) 이태백도 고향이 “서역”이었다고 한다.
그 시의 한 구절 :
明月出天山 蒼茫雲海間
長風幾萬理 吹度玉門關
밝은 달 天山을 나와 아득한 雲海에 뜬다.
長安바람, 몇만리련가 불어 불어, 옥문관에 온다.
이것은 두고 온 처자들이, 귀양간 李白(이백) 자신을 그려하는 “혼”의 바람이 이 옥문관까지 불어온다는 뜻이다. “天山”은 天山山脈이 아니라 祁連山脈이라고 註했다.
이 短章(단장)의 주인공인 林則徐(임칙서)는 옥문관을 나와 고비사막에 접어들면서 이런 시를 읊었다.
我來別有征途感
不爲哀齡盼賜環
내가 여기 온 것은
쫓겨온 귀양살이 아니다.
늙어 쇄잔한 몸이긴 하다마는
임군님 사면장은 바라지도 않는다.
環(환)이란 것은 임군님이 보내는 옥가락지로서 용서한다는 표로 쓴다.
그때 林則徐(임칙서)는 58세, 西安(서안)에서 한 달 동안 앓다가 겨우 일어난 무렵이었다.
의인의 의기를 본다. 그러나 憂國(우국)충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가 “동범”(同犯)인 雨廣(우광) 총독 鄧延楨(등연정)에게 보낸 詩牒(시첩)의 한 귀절 :
絶塞仍期促膝談
只憂烽火江南照
사람 기척 끊어진 이 변방에서
무릎 맞대고 얘기하고 싶지만,
봉화가 강남을 비췰까 싶어
걱정이 태산 같소이다.
이것은 영국 함대가 양자강을 올려칠까 걱정스럽다는 뜻이다. “봉화”(烽火)는 산 위에서 횃불을 들어 중앙에 급보하는 System이다.
결국 정부에서는 선견자인 의인들을 수만리 바깥 “서역”에 귀양 보내고 굴욕적인 북경조약을 맺었다. 그래서 동양의 “종주국”은 서양의 “위성국”으로 전락했다. 시국은 어쩔 수 없이 기울어져서 “봉화”는 “강남”을 비쳤다. 그러나 “의인”은 좌절없이 사막을 간다. (1982)
[각주]
- 가담가담 - ‘이따금’의 북한어
- 임칙서(林則徐, 1785~1850)는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이다. 자는 소목(少穆), 호는 문충(文忠)으로 청나라의 흠차대신을 두 번 역임하였다. 임칙서는 영국에 의한 아편 밀수를 강경하게 단속하여 영국과의 아편 전쟁이 일어난 계기를 만들었다. 양무운동의 중요인물인 양강총독 겸 남양대신 심보정의 장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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