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30일 화요일

[범용기 제5권] (118) 요꼬하마에 - 허(虛)

[범용기 제5] (118) 요꼬하마에 - ()

 

코헬레드는 헛되고 헛되어 모든 것이 헛되다. 모든 것은 출구 없는 순환이다 하는 말로 시작한다. 이것은 존재자체가 ”()란 말이 아니라, 그 존재의 의미가 무요 따라서 그것이 허무하다는 뜻일 것이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자 복이 있다고 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탐욕 없는 마음을 의미한다. “물욕”, “명예욕”, “지위욕등등이 마음속에 초만원으로 비좁게 찬 사람은 心貧者(심빈자)랄 수 없겠다.

마치 에 가스가 찬 것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이웃이 앉을 자리도 없고 하나님을 모실 성도도 없다.

자기 욕심과 사람들의 신뢰와는 정비례로 되는 것 같다. 자기 욕심이 없는 분일수록 사람들이 믿고 따른다. 예수에게는 티끌만한 사심, 사욕도 없었다. 그렇길래 2천 년 전 그를 몸으로 보며 따르던 12사도들로부터 시작하여 2천년 후 그를 보지 못하고서 따르는 제자가 억만으로 늘었다. 갈수록 늘 것이다.

혹시는 Demonish한 권력에 눌려, 숨는 자, 탈락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가난한 대신에 불안하다. 일본의 덕천막부(德川幕府)가 기리스단 금교령을 내렸을 때, 순교자도 많았지만 지하에 잠복한 신자가 더 많았다. 땅 속의 두더쥐는 잡히지 않았다. 그들은 몰라보게 변장한다. 카멜레온같이 변색한다. 그러나 명치 황제가 신교의 자유를 새헌법으로 발표할 때 하루에 6만명(?)이 조상대대 크리스찬으로 등록했다는 것이었다.

크리스찬 신앙은 코헬레드의 바람잡이가 아니다. 무의미한 숙명윤회가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 꽂힌 전능자의 사랑이다. 그것은 땅에서 하늘에의 사랑의 응답이다. 그것은 사랑에서 불멸의 의미를 본다.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느님의 충만하심이 너희에게 충만하시기를 빈다(3:19)고 바울은 권면했다.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은 비어 있지 않다. 사랑의 기쁨으로 차고 넘친다. 우리의 삶은 허무가 아니다. 모든 것이 다 가도 사랑은 영원하다. 주는 사랑, 받는 사랑, “자체가 사랑 안에서 영원하다. 죽음은 이 삶 속에 포섭되어 무력자가 된다. 죽음은 부활에의 서곡을 연주한다. (198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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