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6일 금요일

[범용기 제5권] (92) 요꼬하마에 - 나라에 간다

[범용기 제5] (92) 요꼬하마에 - 나라에 간다

 

410 우리는 13백년 우리 민족정기가 살아 움직이는 고려촌을 단 한나절에 달리며 보았다. 사실 그대로 주마간산(走馬看山)이다.

조급하게 차를 몰아 나라(奈良)로 달렸다. 동대사(東大寺)[1]를 보려는 것이다. ‘나라대불’(奈良大佛)[2]을 안치한 대찰이다. 보고 와서 내 기억을 되새긴다. ‘안내서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미 대강 읽은 바 있는 김달수[3] 선생의 일본 안의 조선 문화(日本朝鮮文化3, 근강, 대화시대편(近江大和時代篇)을 다시 읽으면서 내 기억과 맞춰본다.

김달수 선생의 글은 물적 근거 없이 써낸 것이 아니다. 그는 고분, 신사, 사찰, 비석, 전설 등등을 역사 특히 문화사와 맞추어 간다. 설명이 친절할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눈으로 보고 발로 밟으며 순례한 기록이다.

그 당시의 백제와 신라는 일본 건너오는 것을 외국에 망명하거나 이주해 온다는 기분으로 온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조선 땅의 외연(外延), 또는 미개척 지대라고 본 것이 아닐까? 특히 문화적으로는 계몽되어야 할 고장이고 종교적(특히 불교)으로는 선교해야 할 땅이고 정치적으로는 통일국가를 건설해야 할 요건으로 관제(官制), 직위(職位), 온갖 법령이 갖추어져야 할 나라라고 보았다. 그래서 소위 성덕태자(聖德太子)대화개신이 열매로 나타난 것이라 한다.

지성(知性)으로나 기술로나 비교가 안될만큼 월등한 이 도래인(渡來人)들은 사회 제도와 질서가 바로 잡히는 대로 경제계에나 정치계와 종교계에서나 특권층으로 성장하였다. 지방에서의 호족(豪族), 중앙에서는 고관대작, 불교에서의 대승정 등등이 그들 손에 쥐어진다. 그들은 황실(皇室)과 혈연 관계를 맺음으로 왕권을 좌우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일본은 통털어 그들 세상이 됐다는 얘기다.

지금도 남아 있는 왕총’(王塚) 같이 무시무시하게 큰 고분들은 그들의 선산(先山)인데 지금까지 확인된 고분만으로도 72기라 한다.

우리는 지금 나라로 달린다. 나라(奈良)는 경주나 서울과 비슷한 분지(盆地). 그러나 그 복판이 하도 넓어서 둘러싼 산들이 구름가에 아득하다.

나라란 말은 한국말로 국가라는 뜻이다. 동대사(東大寺)의 불상(佛象)은 나라의 대불이라는 루샤나 불(盧遮那佛)’이다. 동대사는 일본 총국분사다. 그런데 이 동대사 자체를 지은 로오벤과 행기가 모두 조선 도래인 후예란다.

이 지방 전체를 야마도라고 하는데 왜국을 일커르는 한국말이다.

야마도’(大和)는 원시 일본이 국가로 탄생한 고향이고 일본에서 가장 오랜 문화지대며 정치의 중심지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막혀서 자위(自衛)에 편하고 가운데를 흘러 대판만에 들어가는 대화천이 대륙문화의 수입로가 된다. 당시의 조선도래족에 한() 씨와 진() 씨가 있었는데 벼슬아치로 국방에 힘썼을 뿐 아니라 미술, 공예, 종교, 음악, 산업에 있어서도 주역을 담당했었다. 그들의 지배하에 있는 이주민은 갈성(葛城) 지방에 산성국(야마시로구니)을 본거지로 삼고 재정의 실권을 잡았다. 그래서 나가오까(長岡), 평안조(平安朝)의 천도(遷都)를 가능케 했다. (김달수, 상게서 120).

나라조 말기(奈良朝末期)까지도 서울이었던 나라와 그 근방에는 도래 조선족이 인구의 8, 9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 민족의 분국이랄 수도 있었을 법하다.

대사원, 궁전, 호화주택, 시가, 일본제 불상, 불구(佛具), 정원, 못 등등이 모두 그들 솜씨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어쨌던 우리는 동대사에서 나라대불(大佛)을 보았다. 좌상이다.

 

총 신장 : 535

머리 길이 : 16

눈 길이 : 39

귀 길이 : 85

코 길이 : 15

엄지손가락 길이 : 54

 

도래 조선족의 솜씨라면 그들 뱃장도 어지간하다고 감탄한다.

동대사(東大寺) 자체의 구조도 거대하다.

사슴과 비둘기 떼가 길에서 먹이를 달란다. 돈 몇 푼 주고 길가 매점에서 셈베(煎餠) 한 봉지 산다. 사슴들은 예절이 바르다. 달랄 때에는 고개를 갸우뚱 경례를 하면서 쳐다본다. 귀여워서 안줄 수 없게 된다. 아무리 부지런을 피워도 그것으로 배부를 수는 없겠다. 아마도 일부러 배를 곯게 해서 그 연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비둘기 떼는 수백수천인 것 같다. 땅콩부스러기 한 봉지 사서 잔디밭이나 길에 뿌리며는 모두 모여 쪼아먹기 경쟁이다.

억조중생[4]을 일시동인하는 불타의 자비가 공덕으로 그들에게 미치는 것인까?

우리는 나중남 목사 선도로 천리교 본부를 찾았다. 신도들이 천리교 제복을 입고 경을 올리며 마루와 낭하를 닦는다. 먼지 훔친다는 뜻보다도 종교적 근행(勤行)[5]이다. 꿇어앉아 정강걸음으로 잡념 없이 이 일을 한다. 주로 중년 여자들이다. 남자들도 얼마 있는데 그들은 긴 빗자루로 쓸고 모올로 슬슬 훔친다. 그것도 근행이 목적이다. 그러나 그리 순진한 표정들이 아니다. 장난끼로 그러는 것 같았다. 거대한 궁전이다.

근행을 마친 사람들은 본당에 모여 꿇어앉아 절하고 송 읽고 손뼉치고 한다. 수십 채 크고 작은 건물들이 낭하복도로 이어진다. 부지런히 복도를 걸으면 어느 건물에든지 갈 수 있다. 모두 동양식 목조건물이다. ‘천리교는 한 왕국이고 본부는 대궐이다.

법륭사[6]는 시간이 늦어서 문이 잠겼다. 그만큼 저물었다. 부랴부랴 차를 몰아 대판교회로 갔다.

오후 6시 반부터 대판교회 청년들과 대학 고급학년 학생, 대학원에서 학위공부하는 분들이 나를 환영하는 뜻으로 한식점에서 만찬을 차렸다. 지성인들이다.

나는 거기서 민족주체성과 세계성에 대해 소감을 얘기하고 언어와 문화, 학문 등등에 있어서 각기 그 이주지의 언어를 쓸 수 밖에 없으나 민족공통어로서 한국어를 공유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유대족이 망국 3천년동안 세계에 흩어져 제각기 그 나라 말을 썼지만 구약성서가 히브리말이고 시나고그에서 그 본국말을 별도로 가르쳤기 때문에 세계 1차 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에 옛 나라를 재건할 때 어려운 히브리어를 산 언어로 회복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고 일렀다. 모국어와 모국사랑을 일체화할 수 있기 바란다고 해 두었다. 반대의견은 없었다.

그리고 현대에 있어서도 한국문화, 미술, 예능, 음악 등등에 있어서도 문화의 왕국으로 세계에 공헌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히브리 민족 커뮤니티가 회당’, 시나고그였던 것 같이 우리 민족 커뮤니티로서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당이 있다는 것도 우리의 강점이다고 일렀다.

 

컨디션이 시원치 않다. 오재식[7] 동지는 피곤을 풀어드린다고 몇 번이고 싸우나탕’(한증목욕탕)에 간다. 숨 막히는 뜨거운 골방에 벌거숭이로 앉아 땀벼락을 맞는다. 없던 때()도 부풀어, 밀면 때 투성이다. ‘라기보다도 늙어 말랐던 겉가죽이 벗겨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엑스트라로 안마도 받고 다시 탕에 잠겼다가 샤워실에서 소낙비를 맞으면 기분만점이다. 그리고나서 반침대에 누워 다리 뻗고 쉰다. 아예 한잠 잤으면 했지만 잠은 안 온다. 이건 언제나 오재식 군의 대접이었다. 나는 몸 컨디션을 정상화할 욕심으로 오군에게 싸우나를 강요하기도 했다. 확실히 몸은 풀린다. 그러나 그때뿐이다.

일본 대도시에서는 전철’(電鐵)이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인 것 같다. 출퇴근 시간의 붐빔이란 장관이다. ‘시부야신쥬꾸역의 사람홍수는 해일(海溢)이랄까? 마구 덮어 밀어닥친다. ‘인산인해란 전통적인 표현은 어떤 광장에 가득 찬 인간무더기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전철구내의 인간은 폭 좁은 제방에 강물이 꽉차 흐르는 인강’(人江)이라 하겠다.

그만큼 산업화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 데마다 소바’(일본국수), ‘우나기 덤부리’(장어덧밥), ‘오스시’(생선초밥), 좀더 고급이란 것이 요세나베’(스기야끼 비슷한 것) 등등이다. 나는 소바’, ‘초밥따위를 주로 먹었다. 생선회를 많이 즐겼다.

교포교회에 현역으로 목회하는 한신 출신 10여명이 한국식 불고기 파아티를 열어주었다.

지명관[8] 교수와 식사자리를 같이 하며는 가짓수가 붓고 마사무네’(정종), ‘도꾸리가 이엄이엄 빈다. 취기가 돌면 뱃장이 커진다. 대화도 무궁무진, 기염이 불길을 올린다. 나도 울분이 발산되어 이태백이나 된 것처럼 소탈해진다.

 

[각주]

  1. 도다이지(東大寺)는 일본 나라현 나라시에 위치한 불교 사원 단지이다. 일본에서 한때 가장 역사가 깊고 강력했던 절들인 남도 7대사의 일원이기도 하다. 738년에 처음으로 창건되었고, 이 절의 대불전(大佛殿)은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 건물로 그 안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청동 대불이 있다. 이 절은 일본 화엄종의 대본산이기도 하며, 고도 나라의 문화재로서 나라 시의 절, 신사 등을 포함한 7개의 다른 곳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2. 도다이지에서 제시한 대불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 14.98m, 얼굴 : 5.33m, : 1.02m, : 0.5m, : 2.54m. 대불의 어깨 길이는 약 28m이고, 머리에는 총 960개에 달하는 꼬인 모양의 머리카락 돌기들이 있다. 뒤에 있는 광배의 지름은 27m이고, 그 옆에 위치한 16개의 각기 다른 광배는 각각 2.4m이다. 최근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대불상의 무릎 부분에서 사람 이빨, 진주, 거울, , 보석들이 감지되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이를 쇼무 천황의 유물로 추정하고 있다. 대불의 무게는 약 500t이다.
  3. 김달수(金達寿, 1919~1997)는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나 5세가 되던 해에 부모와 큰형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할머니, 작은형과 함께 살았다. 10세가 되던 해에 일본에서 살던 큰형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김달수는 빈곤한 가운데서도 문학에 뜻을 두었고, 1939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소설을 창작하였다. 김달수는 1970년 즈음부터는 일본과 한국의 고대사로 관심을 옮겨 일본 속의 조선문화[日本朝鮮文化][1970~1991] 시리즈 전 12권을 발행할 정도로 폭넓고 다양한 주제로 고대사 및 한일관계사를 검증하고자 하였다. 김달수는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 오랫동안 사용되고 있던 귀화인(帰化人)이라는 용어를 도래인(渡来人)이라는 용어로 수정하는데 크게 영향력을 미쳤다. 19752월 강재언, 이진희 등과 함께 계간 삼천리(季刊三千里)를 창간하여 재일 한인의 역사와 문화를 비롯해 한국 정세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소설가, 고대사 연구자, 평론가, 저널리스트, 편집인 등 다양한 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인 김달수는 제1세대 재일 한인 문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김달수는 1997524일 사망하였다.
  4. 억조창생(億兆蒼生) 구제중생(救濟衆生)의 줄임말
  5. 근행(勤行) - 항상 부지런히 불도를 닦음
  6. 호류지(法隆寺, ほうりゅうじ, 법륭사) 또는 호류사는 나라현 이코마군 이카루가정에 있는 성덕종의 총본산이다. 이카루가데라(斑鳩寺, いかるがでら)라고도 한다. 쇼토쿠 태자가 세운 사원으로, 창건시기는 역시 쇼토쿠 태자가 세운 사원인 오사카의 시텐노지가 세워진 지 약 20년 뒤인 607년이라 알려져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금당, 5중탑 등이 있는 서원(西院)과 몽전 등이 있는 동원(東院)으로 나뉘어 있다. 호류지의 서원가람(西院伽藍)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들 중 하나이다. 호류지의 건축물은 호키지와 함께 1993년에 호류지 지역의 불교건축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7. 오재식(1933~2013) - 제주도 출생. 서울대 종교학과, 예일대 대학원, 코넬대 대학원 졸업. 한국기독교회협의회(KNCC) 선교훈련원장 겸 통일연구원장, 세계교회협의회(WCC) 개발국장ㆍ제3국장, 크리스챤아카데미 한국사회교육원장 등을 역임. 1973년부터 1988년까지 '세카이'에 연재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발행 지원, 이후 국내 귀국해 크리스찬아카데미 사회교육원장, 참여연대 창립대표, 한국 월드비전 북한국장과 회장을 역임하며 대북지원 활동과 평화통일운동 헌신하였다.
  8. 지명관(池明觀) - 1924년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출생.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제1회로 입학했다. 1947년 월남한 뒤 한국전쟁에 통역장교로 참전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종교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덕성여자대학교 교수와 사상계의 주간으로 활동하며 반독재민주화운동을 펼치다 1972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74~1993년 일본 도쿄여자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73~1988‘TK이라는 필명으로 일본의 대표적 지성지 세카이에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하며 엄혹한 군사통치와 민주화투쟁을 전세계로 알리는 한편, 일본을 거점으로 국제적인 연대운동에도 힘썼다. 20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1993년 귀국해 한림대학교 석좌교수와 일본학연구소 소장,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장, 한국방송공사(KBS) 이사장등을 역임했다. 2003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의 익명 필자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밝혀 한일 양국에서 큰 화제를 낳았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