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제5권] (93) 요꼬하마에 - 다시 대판에 와서
4월 11일(토) - 김덕성[1] 목사 사업관 객실에서 쉬었다.
4월 12일(일) - 11:00AM에 김덕성 목사의 대판교회에서 설교했다.
“기독교인의 민족적 사명”이라 제목했다.
회집인원수 약 200명이다.
모두 Ear-Phone을 끼고 동시통역을 듣고 있었다.
6:00PM, 대판교회 청년 헌신예배에서 간증의 모임에 참석했다.
아주 진지한 신앙간증으로서 일본 거류민의 특수사정에 신앙적으로 대처한 귀한 경험들을 피력하고 있었다.
4월 13일(월) - 전철로 다시 동경 오재식 집에 갔다.
4월 15일(수) - 관광의 날이다.
‘미세스 지’가 안내역으로 수고했다.
이중교 쪽으로 가서 외호(外豪)에서 이중교 쪽을 보고, “외호”의 잉어부대에 먹이를 던져 주기로 하고 “히비야 공원”에서 흠칠 데 없이 가꾼 화단들을 보고, 음악당에서 경시청 취악대의 연주를 보고 듣고 나와서 “아사꾸사”(淺草)행 지하철을 탔다.
아사꾸사 觀音寺(관음사)는 좌우의 좁고 일률적인 상가와 직결된 사원(?)이어서 서울의 야시장보다도 더 잡답(雜踏)했다.
절깐이라기 보다도 ‘라스베가스’의 도박장이란 인상이었다.
4월 16일(목) - 비오는 날이다. 바람이 없으니 우산도 제격이다.
자유한국의 조산역(助産役)으로 수고하는 ‘긴급회의 모임’이 12:30AM부터 일본 기독교회관 회의실에서 열린다. 이번이 제300회란다. 나에게 설화를 청한다.
약 20명이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이 기도회에 모인 것이다. 나는 인사말씀 후에 마태 16:13-20까지의 성구를 읽고 약 10분간 설화했다. “역사”의 Keyman이 크리스챤이라는 내용으로 격려했다.
모두 진지한 태도였다. 김대중 구출운동에도 적극 투쟁한다고 다짐한다.
기도 순서에서는 돌아가면서 짧은 한마디 기원을 올린다. 꼭 하고 싶은 간구의 언어 한마디는 공허한 수식어의 백마디보다 더 인상적이었다.
일본기독교회관을 예방(禮訪)했다. UIM에서는 오재식 군이 ‘보스’다. 직원은 많지 않으나 젊은 남녀 Voluntier들이 분주하다. 명령일하에 손발처럼 움직인다. 모두들 눈이 반짝 불타고 있다. 거의가 재일교포 2세들이지만 순 일본 젊은이들도 목숨 걸고 최전선에 나선 병사들처럼 싸운다. 월급은 물론 없고 어떤 경우에는 교통비까지 제돈을 턴다. 대개가 대학생들이란다.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대우반대투쟁위원회 사무실이 그중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빛 드는 창가에 사무용 데스크가 몇 개, 그리고 카운터 비슷한 궤짝형 데스크와 의자 두 셋이 손님의 자리로 되어 있다. 그리고는 세멘벽(壁)이 온통 책장으로 천정까지 닿았다. 한 옛날부터의 한일관계 역사서적들과 한국문화연구, 일본 안의 고분(古墳)연구, 차별대우의 실황조사서, 빈민촌의 천민(賤民) 상태조사보고 등등 그 관계의 도서관 구실을 하고 있었다.
산회 후에 ‘쇼오지’ JNCC총무 사무실에서 대담하다가 헤어졌다.
‘옥신’ Apt.에 돌아와 유숙했다.
4월 17일(금) - Good Friday다.
6:00PM에 한신 졸업 목사들이 ‘淸香園’(청향원)에서 불고기 Party를 열었다. ‘스승’을 환영하는 모임이다. 회고담이 끝없이 흐른다. 나도 옛 Position에 돌아온 것 같았다.
정성의 선물도 받았다.
4월 19일(일) - 부활주일이다. 가와사끼 교회에서 11:00AM 예배회가 열렸다. 약 100명 모였다.
오재식이 동경에서 왔다. 함께 예배했다. 나의 설교제목은 “산자의 하느님”이었다.
점심에는 추탕(鰍湯)을 대접받았다.
[각주]
- 일본 오사카(대판)교회 제6대 담임목사(1970~1991)로 봉사하였고 1999년 소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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