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109) 조선신학원 발족 - 최후 발악상

최후 발악상

 

최후 발악

 

우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일본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것만은 눈치 챌 수 있었다. 일본 녀석 하나가 말끝에 유단 다이덱끼란 말이 옳다고 한다. 이건 방심(放心)하는 게 큰 적()이다하는 뜻이다. 유단을 그들은 한자로 기름 유() 자와 끊을 단() 자를 쓴다. 말하자면 기름이 끊어지는 게 큰 적이다 하는 뜻이 된다.

그 무렵 일인들은 송진(소나무 진액)을 긁어 오라, 피마자를 심어 그 열매를 가져오라 하는 걸 보면 기름이 떨어진 게 확실했다. 집집마다 놋그릇을 바쳐라, 쇠꼬치는 무엇이든 가져오라 한다. 그리고 공용시설에서도 앵간한[1] 쇠붙이는 거의 다 뜯어간다. 그래 가지고 얼마나 오래 싸울 건가 싶었다. 그 뿐인가? 수송선을 만든다고 묘소나 능() 지대의 잘 자란 소나무를 마구 베어간다. 목선을 만든다는 것이다. 동구릉 숲도 엉성하게 짤렸다. 청년만이 아닌 중년층까지도 불러내다 군사체조며 분렬연습을 시키고 아이들까지도 격검 연습을 시킨다.

그런다고 열심히 할 조선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어찌못해 하는 일이라, 빨랑빨랑하질 못하다. 고라! 메다마가 신데 이루조!(이 자식, 눈알이 죽었다)하고 악을 쓴다.

민간에는 시일(是日)이 갈상(曷喪)란 말이 속담처럼 돈다. 이건 악정에 시달린 백성의 원망을 표시한 맹자의 말이다. (是日 衷 余及汝俱亡) 이 날이 언제 없어질까, 내가 너와 함께 망하련다는 뜻이다. 내가 같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 죽는 게 시원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조선 사람의 심정이었던 것 같다. 이날()일본(日本)으로 치부하면 더 재미있다.

나두 동네 사람들과 같이 하라는 대로 했다. 그래서 악에 바친 일인들도 트집잡을 수가 없었다. 육류도 물론 극도로 통제되었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밤중에 몰래 숲 속에서 소를 잡아 나누어 먹기도 하고 돼지를 추념[2]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 집에도 얼마 갖다 준다. 값은 분담하지만 아주 싸게 먹는다. 그것으로 못 먹는 창자에 기름칠하는 것이었다.

하라는 대로 하면서 제 속 차린다.이것이 대대로 몸에 밴, 조선 민족의 처세술(?)이 아닌가 싶었다. 겉으로 적응하면서 속으로 항거하는 전술이다.

일본의 전설적인 검신(劒神)이라는 이도류(二刀流) 미야모도 무사시(官本武藏)는 평생 진검시합(眞劒試合)에서 져 본 일이 없다고 한다. 제자들이 그 비결을 물었다. 그는 버들은 눈에 꺾이지 않는다고 대답했다는 말이 있다. 버드나무(수양버드나무를 말한다)는 가지가 가늘게 축 늘어져 바람 부는 대로 흐느적거린다. 그래서 눈이 붙어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 눈에 눌려 부러지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진검시합이란 진짜 칼로 시합하는 것이기에 목숨 걸고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는 언제나 흥분하는 일 없고 조급히 상대방을 공격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언제까지나 수동적이고 방위적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조급해져서 함부로 덤벼드는 틈을 타서 결정타를 준다는 것이다.

한국 민족의 싸움이 이 비슷한 타입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민족성이 아니라, 전술일 것이다.

 

해방직전 의()에 순한 우리 학생 두 사람

 

박학수가 신학교 2학년이었던가? 어쨌든, 그는 그때 뚝섬교회 전도사로 있었다.

그의 어머니와 아내와 딸 아이 둘도 같이 있었다. 아이 때 집에서 덮어놓고 짝지어준 아내였다.

그녀는 적어도 내 보기에는 드물게 미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싫어했다. 목사되기로 작정하고서도 그게 고민이라고 고백한다. 자기가 지원병 모집 반대유세를 하다가 잡혀 육 개월 징역하는 중에 모든 과거를 참회하고 마음을 고쳐먹었지만 아내를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는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기도 자체가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인언이니 사랑의 신비니 하는 말이 생긴 것이 아닐까?

나는 둘 사이를 의좋게 만들려고 애썼다. 내 앞에서는 제법 좋은 체하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는 박학수가 얼굴이 활짝 피어 장마 끝에 햇빛처럼 환해갖고 왔다.

선생님, 난 놀라운 여자를 만났습니다. 정말 위대한 여성이예요. 나는 그녀하고 결혼하렵니다. …』

둘이 사랑하는 사이냐?

그래요, 우리는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하고?

이혼하지요.

 

그는 아내에게 보상금을 주고 타일러서 이혼서류에 도장을 받았다.

둘 다 불행할 바에는 갈라지는 게 좋지 않으냐했더니 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전호덕과 결혼했다. 전호덕도 그땐 아름다웠고 특히 그녀의 개방적인 성격이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몇 달 후에 박학수의 전처가 중화장에 결혼 첫날 색시같이 차리고 집에 찾아왔다. 자기도 자기 길을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후에사 안 이야기지만 그녀는 혜화동 어느 부자 영감 소실로 갔다고 한다.

 

박학수는 물론 뚝섬교회를 그만두었고 신학교도 퇴학했다. 교직자 자격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를 얻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교회 일을 못할 바에는 독립운동이나 한다고 나섰다.

 

그가 3학년생(졸업반)으로 있을 때, 1943년 여름이었다고 기억된다. 그는 조용히 내게 와서 말했다. 일본이 손들 것은 뻔한 일이고 그 도 가까워졌으니 이렇게 무심코 지낼 수가 없습니다고 했다. 일본이 갑자기 물러날 경우 우리가 공백 기간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총독부 각부서로부터 지방이 관공서와 면사무소까지라도 그 대체 인물을 마련해 두었다가 즉석에서 그 사무를 인계해서 일사불란 정상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명단을 준비하는 공작에 나섰다고 한다.

서울에는 식량이 문제다. 그러므로 일본군량 창고를 지키고 미리부터 식량을 반입해 두어야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얼마동안 여운형 씨를 따라다녔으나 경륜 없는 선동자란 인상밖에 받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당부했다. 그런 광범위한 인간명단을 준비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게 발각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하느냐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지하운동은 3년 안에 발각되는 일은 별로 없다고 낙관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서울서 사십 리 동쪽인 도농(陶農)이란 농촌에 소개해 살고 있었기에 학교 시간 이외에 날들은 거기서 지냈다. 주일 오후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대왕천에 멱감으러 나갔다가 늦게사 돌아왔다. 형사가 다녀갔다고 한다. 웬일인가 싶었다. 월요일에 학원에 갔다. 주일날 박학수가 잡혔다는 것이다. 박학수를 찾아서 우리 집에까지 왔던 것이라고 짐작됐다.

박학수는 194810일이었던가? 하여튼, 해방 직전에 석방되었다. 그의 아내 전호덕이 우리 집에 알리러 왔다 갔다. 그때 그는 파주에서 북촌 계동에 옮겨 살던 때였다. 나는 곧 그리로 갔다.

그는 누워 있었다. 피골이 상접(皮骨相接)이란 말 그대로였다. 뼈에 가죽 씌운 모습이다. 그렇게 여윈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거꾸로 달아매서 비행기 태우고 물먹이고 주리틀고 벌거벗겨 얼음통에 통조림하고 구둣발로 짓밟고 손톱에 못박고 …… 당하지 않은 고문이 없다고 한다. 거기다가 식량부족이라고 콩밥 한덩어리도 얻어 먹기 어려웠으니 그럴 밖에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게 다 왜놈이 시킨 일이지만 직접 하수인은 언제나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치가 떨리도록 분하면서도 살아서 나왔으니 다행이라고 격려했다.

그대로 며칠 두면 죽을 것이기에 내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 전호덕의 정성어린, 적절한 간호로 현상유지 되는 것 같았다. 정신력은 강렬했다.

815, 그가 예상한대로 해방이 되었다. 아직도 그는 살아 있었다. 그는 정계에 나설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운형도 송진우도 따르려하지 않았다. 그럭저럭 9월이 되었다. 전호덕의 급보를 받고 달려간 때는 벌써 그가 떠난 후였다. 몇 집 건너 여운형 씨 저택에는 어마어마한 간판들이 두세 개 붙고 정객들이 저자를 이루고 있었다. 건준초기였다. 여운형 씨와 가까이 지내는 김용기 장로가 장례준비에 수고했다. 나는 그를 관에 넣어 장의차에 실어 파주 그의 선영에 묻고 왔다. 오랜 후일 전호덕 여사가 불란서에서 다니러와 박학수 묘소에 비석을 세운다고 내게 비문을 청하기에 선()과 서()를 도맡아 큼직한 검은 옥석에 새겨 호덕과 같이 파주 그의 묘소에 세우고 왔다. 나는 그를 순국열사(殉國烈士)라고 이름했다. 정부나 역사협회의 논공행상 절차를 밟을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순국열사였던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박학수보다 조금 먼저 우리 학원 3학년생으로 대구 출신인 김은도 군이 인천서 잡혀 서대문 감옥에 들어갔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았다. 쌀 공출을 반대했다고도 하고 인간 징용을 비난했다고도 했다.

그 학생이 인천서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무라기시(村岸) 목사와 함께 인천에 면회하러 가 보려고 인천서에 교섭했었지만 인천서에는 면허불허일뿐 아니라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고 통고해 왔었다. 그러나 그와 동기동창인 송두규[3]의 말에 의하면 김은도 군은 대구 출신인데 19438월 하기방학에 인천방직공장에 근무하는 고향친구를 만나러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가 사상범으로 몰려서 그도 억울하게 같이 체포되어 얼마동안 인천서 있다가 서대문 감옥 미결수 감방에 옮겨졌다. 그것이 추운 겨울인데다가 일제 말기라 먹을 것도 없고 사상범에 대한 발악적인 잔인성 때문에 결국 감방에서 동사(凍死)아사(餓死)된 것이었다고 한다. 그때 송두규 목사는 혼자서 빈 기숙사에 있었는데 김은도 위독이라는 전보가 몇 시간 동안에 두 번이나 서대문 형무소에서 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 보았는데 시체를 거적데기로 덮어 창고 세멘바닥에 내버렸더라는 것이다. 너무 말라서 인지할 수가 없었는데 그의 뒷머리에 있는 흠집을 보고서야 은도인줄 알았고 시신을 찾았으며, 통지받고 올라온 어머니를 위로하며 대구까지 가서 친구를 대신하여 아들 노릇을 했었다.

나는 우리 한신에서 역사를 바로 쓰게 될 때에는 김은도 군을 졸업생 순교자 1호로 취천[4]할 것을 염원하고 있다.


[각주]

  1. 앵간하다 - ‘어지간하다의 방언
  2. 추렴 모임이나 놀이 또는 잔치 따위의 비용으로 여럿이 각각 얼마씩의 돈을 내어 거둠
  3. 송창근 목사의 조카, 양평장로교회 시무, 한광학원 설립자
  4. 취천 - ‘추천의 방언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