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21) 서울 3년 - 김영구의 죽음

김영구의 죽음

 

내가 쫓겨난 하숙집에 경흥읍교회[1] 장학생으로 서울 유학 온 김영구(金永九) 군이 한 방에 같이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한두 살 아래였지만 믿음과 인품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런데 겨울방학이라 그는 고향으로 가고 나 혼자 있다가 이 봉변을 당한 것이다.

방학이 끝나고 그는 돌아왔다. 그 동안에 내가 당한 일을 알고 그가 갖고 온 학비를 몽땅 털어 주인집에 내고 내 이부자리를 도루 찾았다. 그리고 종로 3가의 하숙으로 같이 옮겼다. 일종의 속량(贖良)이었다.

나는 여비 생기는 대로 일본 간다고 맘먹었다. 장도빈 선생이 한 달 치 20원만 주셨어도 고베쯤까지는 갈 수 있을 텐데!하고 혼자 궁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장 선생에게서 돈 나올 가망은 없었다.

새 하숙집에서는 제각기 독상 받는 팔자였으니 배고픈 신세는 면한 셈이었다. 김영구 군이 미열이 나며 시름시름 앓는다. 감기겠지 하며 학교에는 억지로 나간다. 갔다 와서는 와들와들 떨면서 앓는다. 나는 그때, 사람이 아프면 얼마나 아픈지, 또 얼마나 아프면 죽는 건지 도무지 철부지였다. 감기라니 감긴가 싶어 패독산 몇 첩 지어다 먹인 정도다. 그는 점점 더 앓는다. 열이 펄펄 타는데도 춥다고 온 몸을 사시나무처럼 떤다. 잠깐 들렀던 한의도 다음에는 오지 않는다. 진맥도 화제도 거부한다. 의전병원 무료진단실에 갔다. 모르못도처럼 학생들 실습용으로 실컷 시달리다가 의전교수 겸 내과과장인 일본인 의사의 강평시간까지 견디어냈다. 장질부사인데 너무 늦었다!, 전염병이니 하숙집에 도루 보낼 수가 없고 돈이 없으며는 순화병원에 보내겠다고 선고한다.

그 당시 순화병원은 사망대기소란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딱 잡아뗐다. 이 병원 안 전염병실에 입원시켜 달라, 입원료는 문제없다고 장담했다. 그래서 전염병동 제8호에 들어갔다. 고향 유학생 친구들에게서 있는 대로 거둬 입원료는 너끈히 물었다. 무시로 심부름 할 중년 일본 부인도 고용했다. 나는 식사 때 하숙에 들릴 뿐, 낮과 밤을 병상 옆에서 지냈다. 내 딴에는 성경 읽고 기도하고 믿음으로 위로하노라고 밤낮 아흐랫동안 그리했다. 하루에 두세 번 의사가 다녀간다. 주사하고 약 주고서는 별 말이 없다. 양력 세말이 왔다. 모두 설 쇤다고 의사가 안 온다. 병은 갑작스레 더 한다. 긴급이라고 떼를 썼더니 저녁 켠에사 의사 한 사람 들렸다. 그는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부른다. 극상[2]했자 사흘 넘기기 어려울테니 본집에 전보하여 가족이 오게 하는 게 좋겠소!, 장이 여러 군데 구멍이 나서 복막염도 심하고……』, 어쩌면 오늘 밤에라도……』 했다.

 

나는 나와 같이 있는 오촌 조카에게 말하고 고향 친구들과 그가 다니던 학교 당국과 그의 같은 반 학우들에게 급보를 전했다. 밤늦게 고향 친구들이 십여 명 모였다. 영구는 혼수상태에서 담이 오르고, 숨을 몰아쉬며 최후의 순간을 싸우고 있었다. 그와 우리와의 사이는 이미 단절되었다. 나는 둘러 선 친구들에게 우리 최후의 기도를 올립시다!했다. 믿는 친구, 안 믿는 친구, 모두 숙연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구가 눈을 뜨고 정신차려 또박또박 말을 하는 것이었다.

왜들 이렇게 모였소?

기도드리려는 참이오!

아직 기도할 시간이 덜 됐는데 …… 어쨌든, 그럼 기도합시다.하고서 그는 기도를 시작한다. 나는 지금도 그 기도를 잊을 수 없다.

주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무 살 될 때까지 주님이 길러 주셨는데 아무 한 일도 없이 주님 앞에 가기가 죄송합니다. 제가 떠난 후에도 주님, 경흥 본 교회를 축복하시고 가족들을 지켜 주시고 모든 친구들 인도하옵소서. 제가 다니던 학교 선생님들 학생들 축복하시고 여기 둘러선 사랑하는 친구들 위로 하옵소서. 저를 치료해 주시던 의사님, 간호원, 심부름 들어주던 일본부인 모두 주님께서 친히 복 내려 주옵소서……』 했다. 그리고서 저는 이제 갑니다. 주님 용서하고 불러 줍소서.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구원은 주님 공로로 받는 것이고 일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오. 주님만 믿고 딴 생각 마시오, 남긴 일들은 내가 대신 최선을 다해 볼테니 상심 말으오하기도 했다. 그런 말이 얼마나 무서운 책임일 것을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하두 딱해서 어껼에 나온 말일 뿐이다. 그는 헛소리처럼, 이렇게 자꾸 올라가면 어떻게요! ! 반가와요하며 웃음이 활짝 피는 것이었다. 그것이 혼수상태에서 하는 소리였음은 물론이다. 어쨌든 그 동안 약 오분 그리고 마감 숨을 내쉬었다. 이것이 자정 바로 넘어서였다. 나는 이것을 아름다운 내세의 진입(進入)이라고 느꼈다.

 

승동교회[3] 김영구(金永耈)[4] 목사님이 시체실 앞뜰에서 간단한 영결예배를 보아주셨다. 나는 부활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는 귀절을 본문으로 하여 영원한 생명을 말씀해 주셨다.

 

전염병은 매장불허란다. 홍제동에서 한 가닭 연기로 갔다. 이튿날 나는 작은 합에 든 유골을 안고 왔다. 얼마 안 되는 뼈 조각이 재에 섞여 있었다. 두려움도 위신도 품긴데 없는 한 줌 재, 놋화로의 나무 탄 재 이상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니었다.

뒤늦게 온 그의 형님이 그 한 줌 재를 안고 돌아갔다. 경흥읍 교회에서의 장례식은 성대했단다. 무덤도 덩그렇게 크다고 한다. 오랜 후일에 나는 무덤 앞에 낙엽송 두 그루를 심었다. 듣는 대로는 아름들이 거목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스무 살 되는 설날에 돌아갔다.

 

김영구 군의 최후는 나를 타계적인 신앙에로 휩쓸었다. 세상이란 이렇게 허무하다. 죽음 앞에 무엇이 남느냐? 한줌 재 아니면 흙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믿느냐? 그것은 죽음의 저쪽에 약속된, 영원한 천상세계를 얻기 위함이다. 그 약속만 확실하다면 그것으로 만사는 해결이다하는 심경이었다. 종로 네거리 가고 오는 인간들이 산송장의 꿈틀거림처럼 보였다.

위에서 잠깐 비췄지만 그때 내 오촌조카 희용(熙鎔, 백부님 손자)도 나와 같은 하숙에 있었기에 이 일을 같이 당했다. 그러나 화장터에서 같이 돌아온 그는 하숙집 문에 들어서자 울었다. 불쌍한 영구 스무 살 꽃 시절에 떨어져 타 버렸다니!하고 넉두리[5]까지 섞어가며 목 놓아 운다. 하늘 영광에 참여했는데……』 하는 내 말은 그에게 전혀 Real하지 않은 모양이어서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각주]

  1. 경흥읍교회 - 1910년 함북 경흥에 설립된 장로교회. 김계언(金桂彦)이 이주하여 전도한 결과 흥명(興明)학교 교장 김태훈(金泰勳)과 교사 김문협(金文協) 17인이 믿게 되어 흥명학교 강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1915년 선교사 스코트(W. Scott ; 徐高道), 목사 이두섭(李斗燮)ㆍ이정화(李正華)가 와서 사경회를 개최하였고, 1918년 채필근 목사가 부임하면서 부흥하였다. 그후 김관식(金觀植; 1921년 부임), 김유직(金有稷; 1922년 부임), 정기헌(鄭耆憲; 1923년 부임) 목사 등이 시무하였고 22년에는 포은동(浦恩洞) 교회를 개척하였다. 1940년 현재 장로로 안기진(安基珍; 1924년 장립), 김천현(金薦鉉; 1929년 장립), 김기정(金基楨; 1933년 장립), 김하진(金河珍; 1933년 장립) 등이 시무하였다. 이후 미상.
  2. 극상 - 더할 수 없이 위이거나 제일 좋음
  3. 승동교회 -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소속교회. 승동교회의 설립 역사는 공단골(현 롯데호텔 자리)교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3년 북장로회 선교사 무어(Samuel F. Moore)에 의해 16명의 교인으로 시작되었고 일년 내에 교인 수가 43명으로 증가하였다. 그후 1901년 교회위치를 구리개(동천 : 현 을지로 2가 부근) 제중원(세브란스 병원 전신) 옆으로 옮겼고 교역자는 남장로회 선교사 레이놀즈(W.D. Reynolds ; 李訥瑞)와 북장로회 선교사 클라크(C.A. Clark ; 郭安連)가 시무하였다. 한편 설립자인 무어 선교사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낮은 신분이었던 백정들에 대한 인권회복과 선교활동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많은 백정들이 교회에 출석하여 양반들과 함께 예배를 보는 등 기독교정신에 의한 계급타파와 인권 평등의 회복으로 기독교윤리의 구현을 선봉적으로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도 하였다. 교회가 현재의 위치인 인사동으로 옮겨 오기 전 홍문수골교회와 합하였다. 홍문수골교회는 본래 독립교회로서 1900년부터 현 을지로 6가 자리에 소재했었다. 그것을 처분하여 새문안ㆍ승동(공단골)ㆍ연동 세 교회에 나누어 분배한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인적 물적기능을 공단골교회와 합하여 현재의 인사동 위치로 190581일 옮겨 승동교회가 된 것이다.
    한편 당시 선교회의 교회설립정책이 한 지역에 여러 교회를 설립지원하는 것보다는 한 지역 내의 중심교회를 정하여 집중적으로 지원하였는데 경기도 일대에서는 승동교회가 중심교회로 지정되었다. 한편 승동교회는 항일 민족운동의 본거지로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승동교회가 거사의 진원지인 파고다공원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던 때문에 거사를 진행함에 크게 용이한 점도 있었겠으나 승동교회 학생ㆍ청년 교인들의 투철한 민족정신이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39년에는 승동교회 하층에 경성성경학원을 개원하였으며 곧 조선신학교를 시작하였다. 그후 1959년부터 소용돌이친 장로교 교단분열의 수난을 가장 크게 입은 교회가 되었다. 44회 총회의 속회장소로 승동교회가 제공되므로 반대측에 의해 승동파라는 명칭이 생겼고 곧 합동층 교단의 모체가 되었다. 그후 1960년 고신측과의 합동과 재분열의 홍역을 겪었고 마침내 교회건물과 대지를 둘러싼 법정소송까지 비화되었다. 교회문제가 법정계류중인 196811월 이대영 목사가 별세하여 교회는 더욱 큰 혼란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19682월 박일웅 목사가 부목사로 부임하였다가 19696월 위임목사가 되었고 그해 11월 건물관계 판결에 승소하고 19715월에는 교회부지가 선교부로부터 완전 기증되므로 모든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4. 김영구(金永耈, 1887~1928) - 장로교 목사. 서울에서 출생. 일찍이 부모를 잃고 전도사인 외숙 신정균의 집에서 자라면서 신앙을 지니게 되었다. 1895년 한문의숙(義塾)을 거쳐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고 일어학교ㆍ영어학교ㆍ법률학교를 졸업하였다. 1908년 대한제국 탁지부 주임관으로 임명을 받았으며,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동직을 사임하고 북만주로 탈출하였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이동령을 만나 같이 활동하다가(명동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함) 이동령으로부터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을 하라는 권고를 받고 귀국하였다. 잠시 법관과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14년 전북 김제와 고창(高敞)에서 한국인을 위해서 헌신봉사하던 일본인 장로 마스도미 야스자이몽(枡富安左衛門)의 도움으로 양태승ㆍ윤치병과 함께 일본 코오베신학교에 유학을 하였다. 1919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마스도미 장로가 세웠던 고창군 부안면 오산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1921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6개월간 수학을 하고 서울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 조사로 활동하다가 1922년 승동교회 제5대 위임목사가 되었다. 서울에서는, 피어선성서학원과 연희전문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1925년 안식년을 맞아 일본으로 건너가 토오코오신학사(東京神學社, 東京神學大學)와 코오베신학교에서 연구하였다. 1927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대표로 함태영 목사와 같이 종교법안을 반대키 위해 일본기독교 및 각 종교단체와 연합으로 활동하였으며 일본국회와 또 일본 문부대신을 만나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기독신보>의 논설위원으로 문필활동을 통한 복음전도에도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1928년 미국에 유학하기 위해 준비하다가 과로로 인해 41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다. 아들 종수(宗洙)는 연희전문학교를 마치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된 후 서울 영세교회를 설립하여 부친의 대를 이었고 그의 손자 충열도 다시 목회에 종사하여 3대 교역자의 대를 잇고 있다.
    토박이 신앙산맥 2에 김영구 목사에 대한 언급이 있다. 1910년 경 규암 김약연 선생(후에 평양신학교를 수학하고 1929년 목사가 됨)이 설립한 명동학교의 법률교사로 김철(金喆)이라는 선생이 부임하였는데, 그의 본명이 김영구(金永耈)로 고베 중앙신학교를 거쳐 승동교회 목사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는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여사의 결혼식 때 축사를 했다고 한다.
  5. 넉두리 - ‘넋두리’(억울하거나 불만스러운 일 따위가 마음 속에 있을 때 하소연하듯 길게 늘어놓는 말)의 비표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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