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62) 평양 3년 - 평양에서

평양에서

 

나는 집에 돌아오자 더 오래 집에 있을 수 없다는 절박감을 갖게 되었다. 그때 한경직, 송창근 다 평양에 있었기에 덮어놓고 그리고 가 볼 작정이었다. 나는 서울을 거쳐 평양에 갔다. 그때 송창근 형은 산정째교회[1] 강규찬[2] 목사님 후임으로 예정되어 그 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성경강사로 몇 시간 나가는 중이었다. 교회에서 제공한 그의 사택이란 무너져야 할 짜부라진 기와집이었다. 객실, 서재, 침실을 겸한 사랑채단칸방은 불이 만들어 장판에 물이 질퍽하고 곰챙이[3] 나고 썩어 있었다. 식구들은 부엌에 달린 안방에 모여 지냈다.

 

나는 이 사랑방에서 한두 달 지냈다. 그 바로 옆에 산정째 장로 김동원[4] 씨 이층 벽돌 주택이 있다. 이 허물어지다 남은 기와집도 그의 소유다.

그때 한경직은 숭인상업학교[5]에서 성경교사 겸 교목 그리고 기림리교회[6] 임시목사로 있다가 2천명 출석교인을 가진 신의주제이교회[7] 담임목사로 가게 되었다.

 

나는 무직자였다. 그때 장로교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로 서울에서 서북교권의 대변자격이었던 정인과[8] 목사가 잠시 평양에 내려왔다. 그는 일부러 나를 만났다. 서울서 자기와 함께 문서선교 사업에 종사할 것을 제언했다. 나는 생각해 대답한다고 여백을 남겼다.

얼마 후에 숭실전문학교 매쿤[9] 교장이 나를 부른다. 내가 숭전 채플에서 이야기한 몇 일후 일이다. 그는 나를 숭전 교수로 와달라고 청한다. 당장 대답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두 주일 후에 가부를 확답한다고 했다. 숭전에 여자부를 신설해서 학원을 확장하려고 총독부에 청원했는데 불일간 인가가 된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내가 절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여간 두 주일 안에 화답하기로 약속했다. 나는 내막을 알아보았다. 총독부에서 숭전에 관한한 확장은커녕 폐교까지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메쿤의 교장직도 풍전등화라고 한다. 어쨌든 메쿤 박사의 과대선전 버릇은 나도 짐작한 바였으나 한주일 후에 편지로 거절 통고를 보냈다. 메쿤 박사는 나를 디너에 초청하고 단독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못한다고 뻐쳤다. 그는 함경도 고집 못쓰겠소하면서 노했다.

 

김동원 장로 등의 주선으로 귀국 강연회란 것이 얼렸다. 강사는 나 혼자다. 나는 예수의 광야 유혹에 대한 이야기를 한 시간 했다. 청년학생들의 반응은 괜찮은 것 같았다. 그러나 선동적 웅변적인 연설을 기대했던 김동원 영감은 실망한 기색이다. 말하자면 앞에 내세울 인물이 못된다고 평가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각주]

  1. 산정현교회 평양의 모교회인 장대현(章臺峴)교회로부터 분립하였다. 설립 당시의 예배당은 널다리(板洞)의 장대현교회 구 예배당을 사용하였고 선교사 번하이슬(C. F. Bernheisel ; 片夏薜)과 영수 계택선(桂澤宣), 이덕환(李德煥), 집사 최정서(崔鼎瑞), 김용흥(金龍興), 정이도(鄭利道), 조사 한승곤(韓承坤) 등이 시무하였다. 분립한지 불과 1년 만에 교인수가 300여명에 이르렀다. 이에 교인 모두가 합심하여 닭골 산정현에 새 예배당을 건축하고 이전하였다. 이후로 교회 명칭을 산정현교회라 칭하였다. 1908년에는 계택선과 한승곤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므로 조직교회로 발전하였고 담임목사로는 번하이슬 선교사가 계속 시무하였으며 교세는 날로 번창하였다. 1913년경에는 교인수가 5백명에 이르렀고 제2대 담임목사로 1912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5)한 한승곤 목사가 취임하였다. 그는 산정현교회의 조사ㆍ장로 출신으로 교회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이에 191610월 안봉주(安鳳周) 목사가 부임하여 1년 남짓 시무하였고, 1917111일 그 후임으로 강규찬 목사가 부임하였다. 강규찬(姜奎燦) 목사는 105인 사건 때 옥고를 치르고 31운동 때 평양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송창근 목사가 1936년에 사임한 후, 마산 문창교회(文昌敎會)의 주기철(朱基徹) 목사가 부임하였다. 광복 후 북한 정권 하에서 김철훈(金哲勳) 목사, 정일선(丁一善) 목사, 조만식(曺晩植) 장로, 유계준(劉啓俊) 장로, 백인숙(白寅淑) 전도사가 순교하였다.
  2. 강규찬(姜奎燦, 1874~1945) - 평북 선천출생. 16세가 되기까지 한문공부를 하였으며 한시(漢詩)뿐 아니라 천문지리(天文地理)에도 능해 주위로부터 과학자란 칭호를 들었다. 그가 언제부터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1908년부터 당시 장로교가 운영하던 선천 신성(信聖)중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쳤다는 것을 보아 젊은 나이에 그리스도교에 투신했음을 알 수 있다. 신성중학교 시절 그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 중엔 백낙준, 박형룡, 정석해 등 훗날 교계의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곳에서 민족정신을 강조하며 교육하던 중 소위 ‘105인 사건’(1911)으로 인해 양전백ㆍ이승훈 등과 함께 투옥되어 2년간 복역하였다. 출감후 다시 신성학교에 복직하였으나 사상범으로 감시를 받게 되었으며 결국 1914년 신성중학교를 사직하고 선천북교회 조사로 임명받음으로써 목회자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듬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졸업하면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후 평양 산정현(山亭峴) 교회 목사로 임명받아 시무하던 중 만세 시위 대회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격려연설을 하여 재차 투옥되어 2년간 복역하였다. 출감 후 1936년까지 산정현교회에서 계속 시무하였다. 이후 생애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1938년 그가 이적한 평북노회에서 한국장로교 최초로 신사참배를 가결할 때 동참한 불운을 겪기도 하였다. 1940년 당시 선천 봉동(鳳洞)교회를 시무하였고 해방을 넉달 앞둔 19454월 선천 고향에서 별세하였다.
  3. 곰챙이 - ‘곰팡이의 방언
  4. 김동원(金東元, 1884~1950) - 평양에서 대부호 김대윤(金大潤)의 장남으로 출생. 그의 아우는 문인 김동인(金東仁)이다. 어려서 조만식과 함께 한학을 수학하였고 일본에 유학하여 토오쿄오의 세이소쿠(正則)예비학교 중학부를 거쳐 토오쿄오 법정(法政)대학에서 수학했다. 귀국 후 신민회 회원으로 안창호ㆍ조만식 등과 함께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뜻을 두게 되었고 1911년에는 105인 사건에 관련, 6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감형되어 출감한 후에도 독립운동과 산업진흥에 전력을 다했다. 한편 일찍이 기독교에 귀의하여 1913년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되었으며 192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계로도 봉사했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 마펫(S. A. Moffett)과 협력하여 숭덕학교ㆍ숭현여학교ㆍ숭인(崇仁)학교를 설립, 지원하고 교장으로 봉직했다. 1919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상해 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1920824일에는 조만식을 총리로 하는 조선물산회를 조직하여 이를 통해 거족적인 금주ㆍ금연 및 물산장려운동으로까지 확산되게 했으며 신간회운동으로 연결되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사업에 투신하여 평안고무ㆍ평안섬유ㆍ태안양행ㆍ평양농사주식회사 등 기업을 경영하여 실업가로서도 괄목할 만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축적된 재산을 교육사업과 사회사업을 위해 투자하였다. 그후 1937년 흥사단사건에 관련된 그는 또 다시 2년의 옥고를 치러야 했고 1943년부터는 해방을 확신하고 송진우 등 선각자들과 함께 그후의 대책을 도모하면서 지도자의 분열을 막으려는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정치에 참여, 군정청의 고문을 거쳐 한민당의 기획부장, 서북청년회의 명예회장, 한민당 총무직을 역임했으며, 제헌국회 부의장에 피선되었다. 그러나 1950625사변 당시 서울에서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납북되었다.
  5. 숭인상업학교(崇仁商業學校) - 1922년 숭덕학교(1894년 선교사 마포삼열에 의해 설립된 학교)에서 고등보통과를 분립하여 5년제 학제로 개편하여 숭인학교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였다. 숭인학교는 사실상 경천애인 사상에 근거한 교육정신과 민족주의 배양을 그 목적으로 한 숭인학교는 일제치하에서 요시찰 대상의 학교였으므로 그 허가문이 용의하지 않았으며 국내 유일한 한국교회 운영의 학교요 한국인이 경영하는 학교였다. 19253월 제1회 졸업생 3명을 배출하면서 시작된 숭인학교의 운영의 주체였던 세 장로, 즉 조만식ㆍ오윤선ㆍ김동원 등은 정식 인가학교를 만들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해오다가 19303월에 이르러서는 인가가 다소 수월한 실업계 학교로 바꿀 것을 합의한 끝에 교명을 숭인상업학교로 개명하고 설립자 조만식ㆍ오윤선의 이름으로 상업학교 허가원을 제출하였고, 19311월 드디어 숭인상업학교는 갑종실업학교 허가를 받았으며 국내 유일의 민간경영 상업학교로 출발하게 되었다.
    정식 인가학교로서 새출발하게 된 숭인상업학교는 그 초대교장에 정두현이 재임하였고 설립자에 오윤선 장로, 이사장에 김동원ㆍ조만식이 취임하였다. 그런데 당시 일제 당국이 내거는 유자격 교장이란 일본에서 교육받은 자라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독립인사들을 학교장직에서 배척하였는데 조만식도 그런 경우에 속하여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교사는 자격증 운운하며 서서히 제거시켰다. 학제는 5년제 그대로 계승되었고 매학년 갑ㆍ을 두학급에 정원 120명이었다. 그리하여 1935년 드디어 숭인상업학교 제1회 졸업생 88명을 배출하였다. 또한 이 당시 교사진은 전국적으로 막강하였는데 조명식(수학), 주영혁(부기, 주산), 조수증(영어), 황성염, 김효록(상업), 김충선(영어), 김재준(성경) 등을 비롯하여 박태동, 이병필, 김종식, 김상진, 임천석, 장창덕, 원홍균, 김응룡, 강필상, 이정순, 김대엽, 안치국, 홍성준, 김병서, 강진구 등이었다.
    해방 이후 공산당에 의한 과도기 정권이 들어서면서 숭인상업학교는 2중학교로 개명되고 말았으며 결국 공산치하에 들어서게 되었다. 19497월 제17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숭인학교의 내면적 역사는 끝났고, 숭인식구들이 46년 이후부터 49년까지 공산군을 피해 월남하였으며 그 수는 1천명에 이르렀다. 상업학교 인가 이후 역대 교장으로는 초대교장 정두현을 비롯 이구화, 김항복, 임태정, 이기찬, 변응호였으며 교감으로는 조명식이었다.
  6. 기림리교회 : 설립년도 미상. 평남 평양 기림(箕林)리에 설립된 장로교회. 1940년 당시 이인식(李仁植) 목사와 여전도사 조기선(趙基善) 그리고 장로 김용혁(金龍爀)ㆍ이주항(李周恒)ㆍ최경호(崔景鎬)ㆍ김항복(金恒福)ㆍ강년대(康年大)ㆍ임종희(林宗熙) 등이 시무하였다.
  7. 신의주제이교회 1924년 평북 신의주 매기동 6에 설립된 장로교회. 신의주제일교회가 대폭적인 교세증가로 비대해지자 분립을 결정하고 192212월부터 분리예배를 보다가 19241월에 완전히 독립하였다. 초대 교역자로는 최득의(崔得義) 목사가 부임하였고 이어 한경직 목사가 뒤를 이었다. 1940년 당시에는 한경직 목사와 김관주 목사, 그리고 장로(괄호안은 장립연도) 김기범(1924), 김인범(1926), 장연수(1929), 강득록(1930), 김덕창(1929), 백경보(1932), 김인직(1932), 김시균(1934), 장성식(1925), 장병원(1937), 조석윤(1939), 김연회(1939), 김인모(1939) 등이 시무하였다.
  8. 정인과(鄭仁果, 1888~1972) - 일제강점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기독교신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 평북 순천(順川) 출신.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를 마치고, 미국의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한 뒤, 뉴욕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하였고, 미국에서 신학과 정치사회학을 공부하기도 하였으며, 귀국 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1932), 장로회 총회장(1935)에 선임되었다. 19376월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던 중 변절하여 친일 행위를 하였다.
  9. S. G. McCune(1878~1941) - 한국 이름은 윤산온(尹山溫). 숭실전문학교 제4대 학장을 지내다가(1928.9~1936.3) 신사참배 거부로 한국에서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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