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63) 평양 3년 - 숭인상업(첫 교직ㆍ첫 살림)

숭인상업

첫 교직ㆍ첫 살림

 

평양에는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밋션스쿨외에 평양시내 장로교회 당회원 연합회(도당회)에서 경영하는 숭인중학교란 것이 있었다. 그런데 재정난과 정부의 냉대 졸업생의 취직불능으로 난관에 봉착했다. 그래서 취직 잘되는 갑종상업학교로 개편하고 재출발하게 되었다. 그래도 성경과목과 교내종교행사는 계속하기로 양해되어 있었다. 이사장은 산정째 오윤선[1] 장로고 이사에 산정째 조만식 장로, 김동원 장로 등이었고 교장은 조만식 선생의 제자라는 김항복[2]이었다. 이분들이 나를 교사 겸 교목으로 밀어주었다. 그 무렵 함경북도에서 내 아내와 큰 조카 둘째 조카 딸 선계와 단계 등 일행이 몰려왔다. 나는 두 칸짜리 집을 얻어 살림을 차렸다.

셋방살이지만 독립된 내 살림이었고 더구나 아내와 아이들로서는 난생처음 가정(Home)이란 보금자리를 가져보는 것이었다.

 

한 달인가 있다가 큰 조카(利鏞, 이용)창꼴집으로 돌아갔다가 일본 동경으로 뛰어 법정대학에 다녔고 둘째 조카 하용(河鏞)은 평양 숭덕소학교 졸업반엔가 편입되어 줄곧 한 식구로 지냈다.

숭인상업학교에서 강당이 절대 필요했다. 학생들 다 같이 모일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강당 건축기금 모금에 나는 남은 시간을 바쳤다. 낸다고 몇 십 원씩 적기는 했지만 적은 대로 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자유모금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래서 방법을 바꿨다. 신입생과 재학생의 학기초 납입금에 강당 건축비를 품겨 넣었다. 신입생은 소정의 납입금을 완납하기 전에는 학생으로 등록될 수 없고 재학생도 그 학기 등록이 되지 않으니 울며 계자[3] 먹기다. 그래서 한 학기 안에 강당기금은 너끈히 완납됐다.

이제는 채플 장소도 마련되고 각가지 학생활동도 가능하게 됐다. 특히 실내운동장으로 겸용된 것이 대견했다. 그 다음해부터 숭상농구팀은 천하무적의 실력을 발휘했다. 동경 명치 신궁경기 전일본중학생농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73-13이란 스코어로 압도 우승했다. 2년을 이렇게 연승하자 일본정부에서는 조선민족 의식이 자극된다는 이유로 출전금지명령을 내렸다.

국제대항 운동경기에서 민족의식이 자극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때 동경재류 조선인들의 너무나 열광적인 숭상팀 응원이 일본인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던 것이라 하겠다.

 

나는 그 당시 새벽마다 모란봉 꼭대기 솔밭 속 바위 밑에서 기도했다. 눈 쌓인 겨울에도 거의 예외가 없었다. 가고 오는 길에서도 기도하며 걸었다.


[각주]

  1. 오윤선(吳胤善, 1878~1950) - 평남 대동군 고평면에서 출생. 한학에 능통하였으며, 1918년 산정현교회의 집사로 임명되었고 19226월 같은 교회 장로로 장립되었다. 이후 시무장로로 교회봉사에 헌신하는 한편 평양시에 7대교회(章臺峴, 南門外, 司倉洞, 西門外, 蓮花洞, 明村, 山亭峴)가 연합사업으로 설립, 운영한 교육기관(崇仁, 崇德, 崇賢)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즉 그는 1923년에 숭덕학교에서 분립한 숭인상업학교의 설립자로 활약하였으며 조만식, 김동원과 함께 산정현교회의 3대 장로로 손꼽히는 한편 특히 조만식과는 일체가 되어 모든 사회적 행동을 같이 했다. 즉 물산장려회운동, 백선행(白善行)기념관사업, 인정(仁貞)도서관사업 그리고 평남건국준비조직 등에서 그는 조만식을 보좌하여 평양사회를 영도하였으며 또 경제 방면에서도 한껏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는 만년을 백선생기념회관 재단이사로 봉직하다가 1950년 별세하였다. 그의 아들로 극작가 오영진(吳泳鎭, 1916-1974)이 있다.
  2. 김항복(金恒福, 1900~1970) - 기독교장로 교육가. 실업가. 평남 출신. 1918년 평북 정주의 오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대학 정경 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조만식 선생의 권고로 교육계에 투신하여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수와 숭인상업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1929년 평양 기림리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되었으며 1939년 흥사단 사건에 관련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해방후 월남하여 서울에 평안섬유공업회사를 창립하고, 1952년 대한 메리야스협회 이사장, 1955년 전국 사용자 대표중앙노동위원, 56년 서울시 초대시의원을 역임하였다. 1966년 평양시 명예시장, 학교법인 오산학원 이사장, 69년 평양장학회 회장, 1970년 서울콤퓨터센타 이사장 등에 취임했다. 1960년경에 동대문 휘경교회를 설립하고 시무장로로 줄곧 봉직하였다. 19701122일 별세했다.
  3. 계자 - ‘겨자의 북한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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