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64) 평양 3년 - 『강도사』 되다

강도사되다

 

숭인상업 교목으로 취임한지 몇 달 안되어 평양노회가 열렸다. 만우 형은 나에게 강도사 시취청원을 내라고 권한다.

강도사란 설교자격 즉 Licensed Preacher란 말이다. 나는 피츠버그 노회에서 웨스턴 신학 졸업 직전에 이미 시취를 거쳐 그 License를 받았지만 조선은 조선대로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Master한 사람에 대한 시취 과목은 논문 한 편과 구두시험 만이란다. 논문은 마태복음에 나타난 천국개념이란 제목으로 썼다. 구두시험에는 원로목사급 다섯 사람이 위원으로 되있었다. 그중에는 심술굿기로 이름난 분도 끼어 있었다.

천국이 지상에도 있다고 믿소?하고 질문한다. 나는 천국이란 하느님이 다스리는 나라란 뜻이니까 하느님이 하늘과 땅 모든 공간과 시간을 주장하시는 분이라면 하늘이고 땅이고 아래고 간에 천국이 존재할 수 없는 데가 없겠지요.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도 임하게 하시려는 것이 예수님의 염원이었고 너희 가운데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았다면 거기에 벌써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천당만이 하늘나라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했다. 그들로서는 사후 천당이 곧 하늘나라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어서 자못 불쾌한 표정이었지만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강도사 시취 받은 사람은 김진수와 나 둘뿐이었는데 나만 합격이라고 발표되었다. 김진수[1]는 숭전과 평양신학을 나오고 일본신학에도 다녀온 청년교역자였다. 후에 평북에서 교역 중 공산당에게 순교 당했다고 들었다.

노회에서 저녁시간에 강도사 임직식이 있었다. 평양신학교 김인준[2] 교수가 권면했다. 지금 한국교회는 진정 전투하는 교회다. 전선을 넓힌다고 산만하게 하다간 적의 교란에 걸리기 쉽다. 전선을 좁히고 정예부대를 강화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가 전투적 근본주의를 권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했지만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당연한 권면이라고 받아들였다.


[각주]

  1. 김진수(金珍洙, 1900~1950) - 평안북도 선천 출신. 김기영 장로의 아들. 1921년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졸업했다. 재학시 31운동에 참가하여 적극적으로 시위를 주동하다가 검거되어 평양 유년감옥에서 6개월간 복역했다. 출옥후 숭실전문학교를 고학으로 마치고 1934년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29), 목사안수를 받았다. 숭실전문학교에서 사감으로 1년간 재직하였고 그 후 선천동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일제의 말기 기독교 탄압과 통합일본기독교단 구성을 적극 반대하고 평북노회 및 총회의 존속을 고수했다. 그러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검속되어 옥중에서 815해방을 맞았다. 해방후 공산치하에서 이북 5도의 12노회연합노회를 조직하고 노회장에 피선되었다. 4년 동안의 임기 중에 공산당의 교회탄압에 항거하여 싸웠으며 특히 1946113일에 실시된 주일(主日) 선거 강요를 거부하였다. 그밖에 5도연합노회에서 신앙의 자유 및 미성년 아동에 대한 공산주의 교육의 반대 등 5개의 결의문을 채택하여 제출함과 동시에 그들의 정치적 부당성을 지적하여 시정을 촉구했다. 또한 공산당의 어용기관인 기독교도연맹의 발족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조만식 선생이 주도한 조선민주당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연루되어 1947411일 설교를 위해 평양 서문밖교회로 가던 도중 공산당에 납치되어 흥남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때 함께 투옥된 사람 중에는 석옥린(石玉麟) 목사도 끼어 있었다. 이들은 흥남 시멘트공장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중 625사변을 만났고 공산군의 후퇴시에 끌려나가 석 목사와 함께 총살되었다. 이후 함흥의 교인들 손에 의해 시체가 거두어져 함흥에 묻히게 되었다.
  2. 김인준(金仁俊, 1886~1947) - 1926년 평양신학교 졸업, 19299월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설치한 고등교육장려부의 최초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유학에 올랐다. 프린스턴, 리치몬드, 유니온에서 신학박사 학위 취득. 1933년 귀국하여 평양신학교 교수, 숭실전문학교 이사등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 김진수(金珍洙)ㆍ김철훈(金哲勳)ㆍ이유택(李裕澤)ㆍ허천기(許天機)ㆍ김길수(金吉洙) 목사 등과 함께 순교를 각오하고 주일선거를 전면거부하는 등 강력히 공산주의에 대항하였다. 이북지역 총회신학교 교장이 되었는데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성에 등록하기를 거부하자 1947년 소련군에게 여행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