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65) 평양 3년 - 뜰가하던 자리

뜰가하던 자리

 

숭상에서 한 학기 지내고 여름방학이 되었다. 신천 신성중학교[1] 장리욱[2] 교장이 가을부터 그리로 오라고 교섭해 왔다. 함흥 영생중학교에서도 같은 교섭이 왔다. 나는 만우형과 동행 선천에 가 보았었다. 빽 돌려 막힌 분지의 교회왕국이었다. 답답하고 가라앉은 분위기어서 생동하는 데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거기서 백영렵[3], 한경직 등과 며칠 같이 지냈다.

평양에 돌아왔을 때 남궁혁[4], 채필근 등 선배가 내 행동에 눈치채고 선후책을 마련한 모양이었다.

그때 남궁혁 박사는 평양신학교 신약학 교수로 신학교 기관지인 신학지남[5] 편집 책임자 겸 주필로 있었다. 그는 내게 신학지남편집 실무를 맡기고 한 달에 이십 원씩 사례금을 준다고 했다. 동시에 채필근, 송창근, 한경직, 그리고 나 네 사람을 동인(同人) 격의 contributor로 해서 매호 의무적으로 글을 발표하게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눌러 앉았다.[6]

남궁혁 박사님은 평신교수로서는 liberal한 켠이었고 소탈하면서도 어른다운 보스풍격의 분이었다.


[각주]

  1. 신성학교(信聖學校) - 19057월 선천의 조선인 기독교 지도자들인 양전백, 김석창 등이 중등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중등학교 설립을 위해 선천중학회라는 설립기성회를 조직함으로서 시작되었다. 휘트모어(Norman C. Whittemore(위대모, 魏大模)를 교장으로 추대하고, 19069월 선천읍의 교회당을 빌려 26명의 학생으로 개교하였다.
    1909년 2대 교장으로 매큔(George Shannon McCune, 윤산온, 尹山溫)이 부임하여 교회 및 학생들의 자립 자조를 위해 실업교육을 강화하였다. 당시 휴 오닐(Hugh O’Neill) 여사가 죽은 아들을 기념하기 위해 15000불을 기부하여 학교의 발전에 공헌하였는데, 선교회에서는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휴 오닐 주니어 아카데미(The Hugh O'Neil Jr. Academy for Boys)라고 불렀다. 그리고 기숙사를 증축하고 노동 학생을 위해 목장 및 공업소 등을 설치하였다. 1910년 실업부(Industrial Department)에서 57명의 학생들이 책 만들기, 농업, 수위, 목수 등의 다양한 일을 하며 학비를 보조받았다. 19119월에 153명이 학생이 다니고 있었지만, 105인 사건으로 양전백과 김석창 등 교사와 학생 대거 검거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1927년 미국경제불황 여파로 선교회 경영 학교들의 통합논의가 이루어져 보성여학교와 합동으로 경영하게 되어 처음으로 조선인 교장 장리욱이 취임하였다.
    1928년 4월 장이욱(張利郁)이 제5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미국에서 10여년간 수학하고 돌아온 장이욱은 먼저 신성학교를 지정학교로 승격시키는 운동을 벌였다. 1931316일자 조선총독부 고시 제136호에 의해 신성은 드디어 지정학교로 되었다. 그러나 창립 이래 민족사상 고취에 일관하였고 항일운동에 앞장서 온 신성은 은연중 일제로부터 불온한 학교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고 그 감시가 더욱 강화되어 있었으며 어느 모임에나 형사가 임석해 있을 정도였다. 신성학교는 19313월 지정학교로 인가받았으나 조선총독부의 선교교육 불허에 저항하며 1938년 선교회는 폐교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선천의 오씨 문중 일가의 기부로 조선인 위주의 별도의 재단법인을 만들어 학교를 인계받았다.
    19429월 선천중학교로 개칭하였고, 1980년 경기도 안양시에서 안양 신성중고등학교로 재건하였다. 졸업생으로는 백낙준, 고병간, 계훈제 등이 있다.
  2. 장리욱(張利郁, 1895~1983) - 장로교 장로, 교육가, 독립운동가. 1896629일 평남 안주에서 출생. 1912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고 미국에 유학, 1925년 아이오와주 듀북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27년 뉴욕 콜롬비아대학 대학원에서 듀이에게 교육학을 사사하였다. 1928년 귀국하여 선천 신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부임 즉시 지정학교 인가 신청을 총독부에 내 1931년 지정학교 인가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존 듀이의 교육철학인 인본주의 민주식 교육을 실시하여 많은 민족주의자들을 배출하였다. 1934년에는 선천북교회 장로로 장립되었다. 한편 그는 1917년 안창호의 흥사단단원이 되어 활동해 왔는데 귀국후에도 안창호와 가까이 지내면서 흥사단을 통한 민족운동에 전개하였다. 1936년에는 안창호의 권고로 일본에 건너가 모범농촌과 농공(農工)교육시설을 시찰하고 돌아와 한국에서의 이상촌 건설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6월 소위 수양동우회사건이 일어나 흥사단 지도급 인물들이 검거되었는데 이때 그도 학교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특히 신성학교강당 태극기사건 때문에 남보다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는 옥중에서 신성학교 교장직 사퇴서를 써야만 했고 1938년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2, 집행유예 3년 형을 선고받아 석방되었다. 이듬해(1939) 타의에 의해 평양으로 이주해 평양자동차공업주식회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815 해방후 월남하여 그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에 취임하였고 1948년에는 서울대학 총장에 취임하였다. 한편 지하로 잠적했던 흥사단 재건운동을 벌여 1947년 국내위원부 위원장, 1948년 의사부장으로 흥사단을 재건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625사변 중인 1951년 일본 토오쿄오에 있는 유엔군 총사령관 고문으로 취임하였으며 1957년 흥사단 기관지인 <새벽>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1960년 주미 대한민국대사를 역임했고 이회에 조선전기공업학교설립자 겸 교장, 서울특별시교육위원회 회장, 국립서울대학교 이사장, 조선교육연합회 회장, 국회선거위원, 법전편찬위원, 흥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60년대 미국으로 이민하여 그곳에 거주하다가 1983년 별세하였다.
  3. 백영엽(白永燁, 1892~1973) - 19086월 의주 양실중학교를 거쳐 1913년에 북경 광문대학 4학년을 수료하였으며 1921년 남경 금릉신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중화교회 목사로 시무하였고, 1922년 만주 하르빈 한인기독교회 목사로 재직중 평남 안주교회의 청빙을 받아 가던 길에 안병철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5만원을 받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는 혐의로 검속되었으며 평양감옥에서 16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1927년 안창호가 길림에서 체포되자 장작림과 교섭하여 그 석방에 성공하였다. 19338월 선천북교회 목사로 전임되었고, 1937년 동우회 흥사단 사건으로 체포, 종로경찰서와 서대문형무소에서 16개월간 구류되었다가 무죄로 출옥하였으나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목사직을 박탈당하였으며, 19458월 해방과 동시에 선천군민위원장 및 평북도민위원장 등을 역임하던 중 1946년 이를 사임하고 월남하였다. 19471월 남조선과도정부 강원도 인사처장에 부임하였고 같은해 12월 대광중학교 교장(1952년까지)으로 전임하였으며 평안북도민회 회장(1948-55), 이북 오도 평안북도지사(1947-70) 등을 역임하였다. 동생 지엽은 영락교회 장로로 봉직했고 유족으로는 부인 조영화와의 사이에 3녀가 있다.
  4. 남궁혁(南宮爀, 1881~1950) - 1896년 배재학당에 입학했고, 졸업후 인천세관을 거쳐 목포세관 등 공직에 1901년까지 재직했다. 1908년 게일 선교사의 주례로 김함라(金涵羅)와 결혼하였다. 192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15) 1922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1924), 리치몬드 유니언 신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1년 과정만 마친 채 귀국하여 평양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었고, 1929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한국인 최초의 신학박사). 1928년부터 신학지남의 편집장으로 활동했으며, 1932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39년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된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광복 직후 194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 후신이라 하여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개교하려는 무렵에 박형룡 목사가 찾아와 교장으로 취임해 달라고 청하였을 때 내가 한국교회의 분열을 책임질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니 사양합니다라고 거절하였다. 미군정청 적산관리처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의 최후는 금식을 계속하면서도 기도하다가 기운이 없어져 쓰러진 채 하나님나라로 갔다고 전해진다.
  5. 신학지남- 신학지남 The Theological Review. 장로교계 신학잡지. 19183월 창간된 평양장로회 신학교의 기관지. 국판, 160여면으로 조선예수교서회에서 발간되었고 현재는 총신대학 출판부에서 발행하고 있다. 최초 편집인은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소속 엥겔(G. Engel ; 王吉志) 선교사로 그는 창간호 사설에서 발간 목적을 此期報ᄂᆞᆫ 聖經으로 眞南을 삼아 ᄒᆞ야 每期特別吾長老敎會牧師神學生들의게 神學廣海向方指南ᄒᆞ려ᄂᆞᆫ 目的이 잇ᄂᆞ니라... 卒業生들을 幇助ᄒᆞ려ᄂᆞᆫ 目的이 잇ᄂᆞ니라고 밝히고 있다.
    1918년부터 27년 사이에는 계간으로 발행되었고, 1928-40년에는 격월간으로 발간되었다. 19386월 일제에 의해 신학교가 폐교되었지만 신학지남은 선교사, 신학교 교수들에 의해 1940년까지 계속 간행되다가 194010, 22권 제5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이후 교단분열, 625사변 등 여러가지 사정으로 계속 이어오지 못하다가 대구에서 서울 남산으로 신학교를 옮긴 후인 19542, 231호를 발행하여 14년만에 다시 속간되었다. 이 공백기간 동안인 19491, 19501월과 19531월 등 세차례에 걸쳐 박형룡(당시 장로회신학교장) 등이 신학정론이라는 이름으로 발간하기도 했었다. 1954년 속간호를 낸 이후 1955, 1958, 1959~62년에는 교단분열의 혼란으로 매년 한 권씩 밖에 간행하지 못했다. 그동안 편집인은 엥겔(1918~21), 베어드(1922~27), 남궁혁(1928), 로버츠(1929), 클라크(1930, 31), 남궁혁(1932~40), 박형룡(1954~60), 한철하(1961~63), 박형룡(1964~67), 김의환(1968~75), 박아론(1976, 77), 신복윤(1978, 79), 김명혁(1980) 교수 등이었으며 1983년 현재 501(통권 196)를 발행했으며 현재는 차영배 교수가 편집을 맡고 있다.
  6. 김재준은 1933년 봄부터 1935년까지 신학지남에서 집필활동을 하면서 구약의 예언서 연구에 집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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