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권성경주석 말썽
그때 유형기[1] 박사가 편수한 『단권성경주석』이 장로교계에서 문제가 되었다. 『아빙돈』 단권성경주석을 번역 출판한 것이었다. 『아빙돈』은 물론 역사비판학적인 주석이다. 유 박사는 채필근,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 등에게도 기고(寄稿)를 청탁해왔다. 내게는 요나서를 제외한 열두 소선지서를 부탁한 것이었다. 요나서는 문제 생길 것 같아서 자기가 직접 쓴다고 했다.
나는 보수적인 학자들 책을 참고하여 내 나름대로의 주석을 써 보았다. 거기에는 『이단』이란 게 없었다.
그런데 내가 평양에 나타난 그해 여름 평양교회에서는 그 주석책이 거센 풍랑을 일으켰다. 그 주석책은 총회 Level에서 『금서』(禁書)로 낙인찍게 하자는 둥, 모조리 거두어 불사르자는 둥, 총회 산하에 있는 『집필자』는 조사 처단하자는 둥 말이 많았다.
그러나 평양노회도 정통신학 일색은 아니었다. 소장 목사들의 진보적 기백도 만만찮게 말발이 서는 때였다.
격론 끝에, 노회로서의는 심사위원회가 선정됐고 평양신학교 실천신학 교수인 클락(곽안련)[2] 박사가 위원장으로 뽑혔다.
얼마 후에 나는 그 위원회에 불려 나갔다. 질문은 위원장이 도맡아 하는 것이었다.
문 : 『그 책에 집필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지 않소?』
답 : 『그렇게 생각지 않소!』
문 : 『그 책이 재판(再版)될 때, 당신 글을 뺄 생각이 없소?』
답 : 『그럴 생각이 없소!』
문 : 『그 책이 어떤 성격의 책이란 것을 알텐데……』
답 : 『다른 사람들이 쓴 글에 대해서 개입할 생각은 없소. 나는 내 글에만 책임을 질 터인데 내 글에는 「이단」이랄 게 없소.』
문 : 『그 책 때문에 교회가 소란해진데 대하여 책임을 느끼지 않소?』
답 : 『책임이랄 것 까지는 없어도 그것 때문에 소란하게 된 교회에 대해서는 유감으로 생각하오.』
문 : 『노회에서 작성된 대로 성명서(각서)를 내겠소?』
답 : 『내겠소!』
대략 이런 것이었다고 기억된다.
채필근 목사는 『잘못했고, 다시는 집필하지 않을 것이고 재판이 발행될 때에는 자기 글을 뺀다』고 다짐 성명했다고 들었다.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은 『성명』 없이 몇 달을 지냈다. 지방노회에서도 평양노회 처사에 동조하는 데가 많았던 것 같다. 어쨌든 『신학지남』 편집책임자인 남궁혁 박사에게 우리를 집필진에서 제거하라는 압력이 점점 가중해졌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남궁 박사는 난처하게 됐다. 그는 우리에게 『성명』내기를 권한다.
우리는 『신학지남』에 성명서를 보냈다.
① 우리는 단권성경주석 전체로서의 편집에 관여한 바 없다.
② 우리가 쓴 글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
③ 그러나 우리 글 때문에 교회가 소란하다는 데 대하여는 유감으로 생각한다.
성명자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내나 마다한 성명이라는 둥, 어느 쪽이 『유감』이란 말인지 모르겠다는 둥 『까싶』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평양노회에서도 그 이상 더 따질 기력도 열심도 없어진 모양이다. 더 따진다면 소장파 목사들의 공세가 격화될 것이고 따라서 노장파에게 불리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다.
평북 선천노회에서는 과격파 정통투사들이 많았지만 백영립 목사의 좌충우돌로 많이 완화되었다고 들었다.
[각주]
- 유형기(柳瀅基, 1897~1989) - 평북 영변에서 출생. 1914년 평양 숭덕학교를 거쳐 1916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 동경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과를 마치고(1920년)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1925년), 하버드에서 종교철학을 전공하였다(1931년). 1927년 귀국한 후 1928년에 잡지 『신생』(新生)을 발행하기도 하였고, 1934년에 선교 50주년을 기념으로 『단권 성경주석』을 출판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 감리교 감독에 피선되었지만 이로 인해서 감리교가 분열되기도 하였다. 1958년 은퇴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였다.
- 곽안련(郭安連, Charles Allen Clark, 1878~1961) - 1902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뉴욕 출신 부인(Mabel Craft)와 함께 내한했다. 서울 승동교회 제2대 교역자, 평양신학교 교수로 활동하였다. 신사참배 거절로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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