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68) 평양 3년 - 신사참배

신사참배

 

숭상3년은 풍운(風雲)의 날들이었다. 일본 군국주의가 삶 전체를 돌격해 왔다.

공사립 막론하고 학원은 완전히 관청 통제아래 들어갔다. 군사훈련이 모든 스포츠에 대체되었다. 퇴역장교가 강제로 각 학교에 배속되었다.

그들 보기에는 교회의 신교 자유가 아니꼬왔다. 그래서 모든 국민은 예외 없이 신사에 참배하라고 도지사가 선포한다. 목사들이 신사참배 곧 우상숭배라는 관점에서 이를 거부하자 경찰에서는 일변 설득, 일변 탄압으로 대결했다.

기독교 학교가 무너졌다. 학교는 관청에 직접 지배되는 기관이었다. 교장과 교사의 임면이 모두 허가제였고 교과목 배정도 관의 정한대로였다. 그러므로 교장 인솔하에 교직원 학생 모두 신사에 참배하라는 관청지시에 거역하고서도 학교를 해갈 수 있는 학원은 하나도 없었다.

선교사 경영의 평양신학교는 자진 폐문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돌아갈 채비에 바빴다.

 

당시 산정째교회 담임목사로 있던 송창근 박사도 강경파이었다. 설교라면 의례 그 속에 신사 참배 반대 내용이 도사리고 있었다. 조선인 형사 두 셋이 항시 따라 다녔다. 그래도 연행하는 일은 없었다.

평양신학교 학생회에서는 폐문하기 직전에 주기철[1] 목사를 초청하여 특별집회를 열었다. 그는 신사참배 곧 우상숭배란 입장에서 일사를 각오한다고 외쳤다.


[각주]

  1. 주기철(朱基徹, 1897~1944) - 장로교 목사, 순교자. 호는 소양(蘇羊). 아명은 기복(基福). 18971125(음력)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주현성과 조재선 사이의 43녀 중 4남으로 출생. 그의 부친은 일찍이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후에 웅천교회 장로가 되었다. 웅천지역 선각자이며 천도교인인 주기효(주현성의 조카)가 설립한 개통(開通)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웠는데 사촌형인 주기용 및 후에 동역자가 된 지수왕, 배운환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1910년경 그의 맏형인 주기원이 기독교인이 되어 고향에 교회를 세웠는데 이것이 웅천교회가 되었고 형과 함께 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개통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1913년 마산에 들른 오산학교 교사 이광수의 강연에 감명을 받아 주기용과 함께 정주로 떠나 오산학교에 입학하였다. 오산중학교로 가기 직전 이름을 기복에서 기철로 바꾸었다. 오산중학교 재학중 이승훈, 서춘, 조만식, 이광수 등에게 교육을 받으며 민족주의자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1915117일 세계를 받음으로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해 겨울 이승훈과 함께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19164월 오산중학교를 졸업하였고 그해 연의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했으나 오래전부터 앓았던 안질과 집안 문제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916년 웅천교회 집사로 피택되어 봉사하는 한편 교남학교 교사로 봉직하면서 교남학회의 오상근 등과 함께 지방을 순회하며 청년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무렵의 그는 민족계몽운동가였다.
    1920년 안갑수와 결혼하였고 마산에서 있은 김익두 목사 인도의 사경회에 참석하였다가 <성신을 받으라>는 설교를 듣고 중생의 체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192112월 경남노회의 천서를 받아 이듬해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23년에는 양산읍교회 조사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1924년 개인사정으로 양산읍교회 조사직을 사임하였고 신학교 졸업반인 19251230일 경남노회 20회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261월 초량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여 6년간 시무하는 동안 경남성경학원 강사로도 출강하였고 1930년 양성봉을 장로로 장립하여 교회의 기둥을 삼았고 그해 유치원을 설립하였다. 19319월 마산 문창교회의 청빙을 받아 부임하였는데 이 교회는 1926년 박승명 목사 사건 이래 교회가 분열되는 아픔을 지닌 채 계속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부임 즉시 남아 있는 교인들을 중심으로 교육관 건립을 추진하여 1936년에 완공하였다. 그 사이 1933년 부인 안갑수가 사망하였고 이듬해 부친 주현성 장로가 사망했으며 1935년에는 마산 의신여학교 교사로 일하던 오정모와 재혼하였다. 1932년 제30-31회 경남노회장에 피선되었는데 그 무렵 김해 대지교회에서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진 백남용을 강사로 불러들여 집회를 개최한 사건(신진리 사건으로 알려짐)이 있었는데 노회장인 그는 평양신학교의 박형룡을 초빙하여 교역자 수양회를 개최하고 무교회주의 사상의 교회침투를 막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같은 활동을 하고 있을 때 193610월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는 조만식과 김동원을 마산에 내려보내 주기철을 담임목사로 청빙하였다. 그 무렵 산정현교회도 교인들간에 청년과 노년층의 대립이 있었고 송창근 목사가 그의 진취적인 신학사상 때문에 산정현교회에 머물지 못하고 부산으로 떠난 후 어수선한 상태였다. 산정현교회의 청빙을 받은 그는 그해 1011일 부임하였고 부임 즉시 새 예배당 건축을 착수하여 1년만에 입당할 수 있었고 19382층 벽돌로 된 454평의 새 예배당이 완공되어 헌당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19397월 경북 의성에서 농촌운동가 유재기 목사 등이 중심이 된 농우회 사건이 터졌다. 일제는 유재기 목사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으니 주기철 목사도 여기에 연루되어 부목사 송영길과 함께 체포되어 의성경찰서에 압송되었다. 이후 의성 및 대구 경찰서에서 7개월 가량 구금되어 있으며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남다른 고문과 수난을 겪어야 했다. 대구 재판에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아 19402월 석방되어 평양에 돌아온 후에 교인들에게 <다섯가지 나의 기원> 제하의 유언설교를 하면서 더욱 순교의 각오를 다졌다. 이후로 그는 한상동, 박관준, 채정민, 이인재, 오윤선, 김형락, 박의흠, 안이숙, 최봉석 등과 교류를 가지며 조직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구심점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94075번째 구속이고 이것이 마지막 길이 되었다. 일경의 잔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은 점점 나빠져 1944413일 병감으로 이감되었고 결국 421일 오후 9시 옥중 순교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사인에 관하여는 이때 함께 투옥되어 있던 안이숙이 후에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자서전을 통해 그의 죽음이 단순한 병사가 아닌 일제측의 독살이었다고 증언한 기록이 있어 상당한 주목을 끌고 있다.
    그의 유족들은 해방이 되기까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 극심한 생활의 곤경을 겪어야 했다. 순교자의 아내로 신앙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투쟁한 오정모는 해방 후 1947년 별세하였고, 맏아들 주영진은 전도사로 장현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625사변이 나던 해 공산당에게 살해되어 순교의 대를 이었고, 남은 3형제(영만, 영해, 광조)는 월남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정부는 주 목사에게 건국공로 국민장을 추서하였고 1968년 국립묘지 충열대에 그의 묘지가 조성되었다. 19834월에는 대한기독교순교자기념사업회에서 장로회신학대학 구내에 소양주기철목사순교기념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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