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70) 평양 3년 - 평양의 삼장로 인상

평양의 삼장로 인상

 

조선 민족의 장로 적어도 서도(西道)의 원로라고 할 수 있는 세 분 조만식, 김동원, 오윤선은 자못 인상적이었다.

 

조만식 선생은 입술에 맞추어 윗수염을 가위질하고 턱수염을 아래턱에 맞추어 반타원형으로 다듬었다. 이목구비가 비산비야(非山非野)[1]의 균형잡힌 미남이었다. 연령은 오십대에서 육십.

그는 말총모자, 무릎을 가릴락말락하게 짧은 토목 두루마기, 명주나 토목바지 저고리에 고무신 그래서 그는 한국의 간디로 알려졌다.

아무리 일제 강점기라 해도 한인사회가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니만큼 한인 단체나 모임에서는 언제나 그가 영도자, 대변자로 추대된다. 즉석연설에 간결 웅건(雄健)하다고 할까 선동적이지 아니하면서도 감명깊고 인상적이었다. 일인들도 함부로 손대지 못해서 경원(敬遠)[2]으로 일관하는 것 같았다.

그는 영웅되기에는 너무 조촐했다. 그러나 모든 영웅적인 일이 그의 참여를 필요로 했다. 그의 인격적 후광(後光)이 그들의 은신처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도 그가 원리 원칙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어지러움이 비교적 쉽게 풀린다는 것이 그 중요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사(志士)였다. 그의 바른 뜻과 굳은 절개가 그의 모습을 돋우워 준다.

 

하루는 그의 동연배 친구들이 그의 노고를 치하한다고 청류벽 근처 어느 식당에 초대했다. 그들은 병풍을 두르고 선생을 상좌에 앉혔다.

그리고 한 분이 제안했단다. 『「고당(古堂, 그의 아호)은 뜻()이 비단()같은 분이니 오늘 우리 지라(志羅)라는 새 아호를 드리기로 합시다했다. 모두 박수로 찬성한다. 조 선생도 흐뭇해졌다. 오윤선, 김동원이었는지, 어쨌든 두 분 유명한 장로님이 좌석에 배석했다.

 

오윤선 장로였던가가 빙그레 웃으며 은 뺄 수도 고칠 수도 없으니 까지 붙여 부릅시다 했다. 좋소그래서 지라를 씨워 모두가 제창했다. 조 선생은 에이 못된 것들!하고서 자기 옆에 배석한 두 분 장로님을 가리키며 내가 그렇다면 이 두 분은 무언고? 해서 모두 이길뻔 하다가 졌다고 혀를 찼다는 일화도 있다. 이것은 내가 평양을 떠난 몇 해 후에 들은 이야기이다.

 

김동원 장로는 진짜 정치인이요 권력과 정치의 불가분적 관계를 체득한 분이다. 경제적으로도 그는 부유층에 속했다. 문학, 예술, 종교 등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그의 이복동생인 작가 김동인(金東仁)[3]도 어느 정도 멸시 또는 소외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고 들었다.

동인은 동원 장로 저택 가까이 작은 한옥에 살고 있었다.

동인을 낳아 기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호상소는 동원 장로 저택이요 상자는 물론 동원, 동인이다. 그런데 동인은 상복 입고 자기집 좁은 마루에 혼자 걸터앉아 있었다.

만우와 나는 두 집에 다 문상갔다.

동인의 말

윗집은 잔치집이고 여기는 상가요.

 

오윤선 장로는 세분 원로 중에서 최연장자로 큰집구실을 조히 하고 있었다. 안도산[4] 선생도 출감하자 그 댁에 유했었고 음으로 양으로 지사들의 물주 노릇을 맡아했다. 은율엔가 큰 밤숲도 갖고 있어서 가을 밤 익을 때면 교회 관계, 학교 관계, 사회문화 관계 인사 수십 명과 그의 가족들을 그리로 초청하여 거대한 밤주이원유회도 해마다 어김없이 열렸다. 밤밭 속 가을의 향연은 큰집다운 행사였다. 그리고 거기 있는 그의 별장에서 진짜 잔치가 푸짐하게 차려진다. 돌아올 때에는 은율밤 자루가 어깨에 무겁다. 모두 오 장로님의 선물이다. 삼원로의 밀회처소도 언제나 오 장로님 저택이었다.


[각주]

  1. 비산비야(非山非野) - 산도 평야도 아닌 땅
  2. 경원(敬遠) - 공경하되 가까이하지는 않음,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꺼리어 멸리함
  3. 김동인(金東仁, 1900~1951) - 1900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금동(琴童)ㆍ춘사(春士)이다. 평양교회 초대 장로였던 아버지 김대윤(金大潤)과 어머니 옥씨(玉氏) 사이의 3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기독교 학교인 평양 숭덕소학교(崇德小學校)를 졸업했고, 같은 해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에 입학했으나 1913년 중퇴했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학원[東京學院] 중학부에 입학했으나, 학교가 폐쇄되어 1915년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 1917년 부친상으로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같은 해 9월 가와바타화숙[川端畵塾]에 입학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35일 귀국했고, 동생 김동평(金東平)의 부탁으로 격문을 기초한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같은 해 626일 풀려났다. 193824일자 매일신보에 산문 국기를 쓰며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면서부터 일제에 협력하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1944120일 조선인 학병의 입영이 시작되자 같은 해 119일부터 128일에 걸쳐 반도 민중의 황민화를 연재했다. 광복 이후 19461월 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會) 결성을 주선했고, 19497월 중풍으로 쓰러졌으며, 19511·4후퇴 때 가족들이 피난간 사이 하왕십리 자택에서 사망했다.
  4. 도산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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