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71) 평양 3년 - 『숭상』 시대 이야기 몇 가지

숭상시대 이야기 몇 가지

 

조선쥐

 

조만식 선생이 어느 날 채플을 인도하시면서 학생들의 민족적 자각과 단결을 재미있는 예화로 일러 주었다.

임진왜란때 일본군 무기고(武器庫)에 조선 쥐 수천마리가 땅속을 뚫고 들어가 활줄들을 전부 쏠아 끊고 달아난 일이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본군이 당황하는 것을 안 한국군은 급습하여 그들을 전멸시킨 일이 있었다. 쥐도 조선 쥐구실을 했고 쥐도 단결하면 왜군 때려눕히는 지하대장군이 된다. 암시가 담긴 말씀이었다.

조만식 장로는 제직회에서도 먼저 말씀하시는 일이 별로 없었다. 다들 이야기한 다음에 대다수의 의결을 듣고서 다수 편에 한 마디 던지면 그대로 되곤 했다.

그분이 숭상이사시고 바로 전 교장이었기에 입학 때면 부탁이 대단했다. 그는 두 수첩에 적는다. 그리고서는 입학생 합격자 발표 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지낸다. 교사나 교장은 그가 부탁받은 학생이 누군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합격자 발표날에 와서 부탁 받은 학생들 중에 합격된 놈을 수첩에 표했다가 부탁한 학부형에게 통지한다고 들었다. 아마도 그 학부형들은 조 선생 덕분인줄 알는지 모른다. 어쨌든 지혜로운 분임에는 틀림없었다.

 

와글 와글

 

내가 중학생 가르쳐 보긴 난생 처음이다. 한 반에 칠십 명 이상 몰아넣고 한 책상에 셋 꼴로 앉았으니 떠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교단에 올라선다. 그리고 기립 경례를 받는다. 말을 끌어내기가 바쁘게 온 방이 와글와글한다. 워낙 낮은 목소리니 들을래야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준비된 교안을 펴놓고 그걸 보며 말한다. 간혹 학생들을 보긴 하지만 잠깐 건등으로 봐 넘기는 것이었다.

학생들 중에는 착실하게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교무주임에게 비결을 물어 보았다. 학생들을 똑바로 보면서 강의하시오. 자기 눈동자가 선생의 눈동자와 딱 마주치는데도 떠들기만 하는 학생이란 거의 없는 법입니다한다.

 

나는 교단에 올라섰다. 여전히 와글와글이다. 나는 교탁을 한두 번 두들기고 버텨 섰다. 말없이 학생 전체를 똑바로 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학생들은 눈이 동그래서 나를 쳐다본다. 잠잠하다. 나는 시종 그들과 눈동자을 맞추면서 강의했다. 딴 짓하는 놈은 즉각 지적한다. 교실 분위기는 그래서 일변했다.

그래도 설교나 강연에서는 제버릇이 그대로 남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개구쟁이 삼학년

 

평양은 무연탄의 본고장이었지만 그건 주로 일본군대에서 무엇엔가 쓰는 모양이었고 민간에서는 돌탄을 땠었다. 돌탄이래야 기름이 잘잘타는 검은 금강석이다. 넣기가 무섭게 타올라 당장 난로가 빨갛게 단다.

 

2년 겨울, 나는 3학년 담임선생이 됐다. 그런데 언제나 3학년이 말썽이라고 한다. 일이학년은 아직 어리고 사오학년은 점잖고 3학년이 개구쟁이 대표작이란다. 교실마다 굴뚝을 길게 뽑은 난로 하나씩 놓고 소사 영감이 돌아다니며 석탄을 넣어주는 것이었다. 소사가 석탄 넣으러 3학년 교실에 들어가면 학생놈들이 영감을 둘러싸고 작업을 방해한다. 영감이 골을 내면 재미있다고 모아 붙어 놀린다. 영감은 담임선생인 내게 와서 호소하는 것이었다. 나는 말했다.

이제부터는 그 교실에 드나들지 말고 석탄도 넣지 마시오했다.

 

불이 꺼져도 영감은 보이지 않는다. 반장이 찾아와서 떨기만 한다고 하소연한다. 나는 조용하게 일렀다.

너희를 위해 석탄 넣어주는 할아버지를 놀리고 못살게 굴었다는 건 석탄 넣지 말라는 행동이 아니냐? 그래서 너희 소원대로 했는데 무슨 잔소리냐?

그 대신 나도 너희와 같이 고생할테니 너희 교실로 가자!하고 같이 들어가 앉았다. 삼십분쯤, 싸늘한 교실 속에서 침묵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견디다 못해 반장이 일어나서 제가 소사 영감께 사과하고 오겠습니다하고 나갔다. 소사 영감이 들어왔다. 학생 전체가 일어서서 영감님 저희가 잘못했습니다한다.

소사 영감은 빙그레 웃었다. 나도 흐뭇하게 웃었다. 귀엽고 기대되는 개구쟁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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