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88) 간도 3년 - 순교자열전 『십자군』

순교자열전 십자군

 

용정에서는 신사참배가 강요되는 일이 없었다. 일본영사관에서는 비교적 점잖았다. 그래서 나는 평양서 쓴 순교자 열전(列傳)을 책으로 출간하려고 일본영사관을 찾았다. 그 사무 맡은 사람은 조선인이었다. 나는 양식대로의 출판 신청서를 써 가지고 그에게 갔다.

원고를 읽어보아야 하겠다기에 두고 왔다. 허가가 되든 안 되든 원고는 돌려준다고 그는 약속했다. 한 달쯤 지나 다시 들렸다. 자세하게 본 모양이어서 원고는 붉은 줄 투성이다.

너무 잔인한 기록이어서 민심을 자극할 것 같고 신사참배 거부 소동이 야기될 우려도 있으니 출판은 중지하는 게 좋겠소한다.

그럼 원고라도 도루 주시오했더니 좀더 의논해 볼테니 그대로 두라는 것이었다. 또 한달 지나 들렸을 때에는 원고도 압수하기로 결재났소!하고 시치미를 뗀다. 결국 출판은커녕 원고까지 떼우고 말았다.

어쨌든 나는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무슨 잡지라도 내야 하겠다고 맘먹었다. 정기간행물은 납본제[1]여서 검열이 필요없다. 그래서 친구들에게서 한 달에 일원, 이원 의연[2]받아 십자군첫 호를 냈다.

원고를 써서 서울에 있는 한성도서주식회사 인쇄소에 보내면 초교와 재교는 전영택[3] 목사님이 보아 주시고 삼교는 용정에서 내가 본다. 하루에 가고 하루에 오고 기차편이었기에 말 그대로의 일일권(一日圈)이다.

그 무렵에 만우형은 부산서 성빈(聖貧)[4]이란 잡지를 내고 전영택 형은 서울서 새 사람[5]이란 본격적인 월간지를 내고 있었다. 외치고 메아리쳐 부산에서 서울에서 그리고 만주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각주]

  1. 납본제(納本制) - 정기 간행물의 등록에 과한 법률과 출판사 인쇄소의 등록에 관한 법률에 따라, 발행한 출판물을관청이나 도서관에 정해진 수량을 보내는 제도
  2. 의연(義捐) - 사회적 사업이나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금품을 냄
  3. 전영택(田榮澤, 1894~1963) - 목사, 소설가, 호는 늘봄(그가 창조 창간호에 장춘(長春)이란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한 바 있는데 이것이 후에 늘봄이란 호로 쓰였다), 추호(秋湖), 불수레. 평양 사창골(社倉谷)에서 전석영의 3남으로 출생. 1910년 평양 대성중학교를 3년 수료한 뒤 진남포 삼숭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2년 도일하여 토오쿄오 아오야마(靑山)학원 고등부 문과를 거쳐 동대한 문학부에 입학, 1918년 동교를 졸업했다. 이어 그해 동대학 신학부에 편입하면서 김동인, 주요한, 김환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순문예지 <창조>의 동인으로 참가했다. 이듬해 2월에 창간된 창간호에 처녀작 <혜선(惠善)의 사()>를 발표하였다. 그해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토오쿄오에서 먼저 진행된 유학생 독립선언에 참여하였고 곧 귀국하여 채혜수(蔡惠秀)와 결혼하였다. 1921년 아오야마학원 신학부에 복교하여 이듬해 졸업하였고, 곧 서울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1927년 아현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1930년에는 미국에 유학을 하여 퍼시픽신학교에 입학했다. 미국에서 흥사단에 가입, 독립운동에도 헌신했으며 1932년 퍼시픽신학교를 수료, 귀국하였다. 곧 기독교 문서사업에 뜻을 두어 교계 잡지 <새사람>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이용도ㆍ이호빈 목사 등의 예수교회 운동에도 크게 관여했고 그 기관지 <예수>의 편집, 발행을 돕기도 했다. 일제말기에는 평양근교에 은거하면서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1945년 조선민주자 문교부장, 1946년 미군정 문교부 편수관, 1947년 국립맹아학교장, 1948년 중앙신학교 교수, 1952년 토오쿄오 <한국복음신보> 주간, 1954년 대한기독교서회 편집국장 등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정계ㆍ관계ㆍ교육계ㆍ언론계ㆍ출판계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폈다.
    1961년에 한국 문인협회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고 단편 금붕어로 서울시 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했으며 1963년 대한민국 문화포상 대통령장을 수상했고 이후 기독교 계명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68116일 교통사고로 별세했다.
  4. 성빈- The Holy Poverty. 193741일 부산의 성빈학사에서 발행한 월간 기독교 잡지. 편집 겸 발행인은 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 선교사 매켄지(Z. N. Mackenzie; 梅見施)로 되어 있으나 실질적인 발행인은 성빈학사를 운영하던 송창근이었다. 성프란체스코의 청빈사상을 기반으로 사회사업을 추진하던 성빈학사의 문서사업으로 발행된 이 잡지의 편집 실무는 송창근의 제자인 김정준이었다. 46배판 12면 정도의 체제였고, 주요 필진으로는 송창근 자신과 김재준, 한경직, 김동명, 윤인구, 김상순, 한승제 등이 참여했는데, 이들은 거의 송창근과 개인적인 교분관계를 맺고 있어 일종의 동인지(同人誌) 형태를 이루었다. 논문, 설교, 문학 등이 조화된 신앙지로 널리 애독되었으나 송창근이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됨으로 19376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5. 새 사람- 전영택 목사에 의해 창간된 월간 신앙 문예 잡지. 발행소는 서울 염리동에 있던 복음사였으며 편집겸 발행인에 전영택이었다. 국판 국한문 혼용 내려쓰기로 50여면이었으며 1부 정가 50전이었다. 이미 일본 유학시절에 문예지 <창조>의 동인으로 신문학의 한국 유입에 뚜렷한 공을 남긴 전영택은 귀국후 <신생명>, <아희생활>, <기독신문> 주간 등을 거치면서 문학과 문서선교에 헌신하였는데 때늦게 가산을 정리해서 독자적으로 낸 것이 바로 <새사람>이다. “나는 다만 글을 써서 同胞에게 福音하겠다는 사명감에 끌리어 이 일을 합니다. 그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 아니할 수 없고 하고 싶어서 할 따름이외다라고 창간호에서 밝히듯 문학과 신앙을 융화시키려는 뜨거운 열정에서 시작하였다. 전영택의 글이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임종순, 채필근, 안창호, 조민형, 정경옥, 김극성, 이구조, 이경선, 이광수, 조신일, 김재준, 김화신, 송정률, 최봉록, 최인화, 이윤재, 박계주, 주기철, 김영희, 박학적, 김익두 등의 글도 실려 명실공히 기독교 종합잡지로 널리 애독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이 심하던 시기라 7호까지 내고 1938년에 폐간되었다.
    815 해방 후 전영택 목사는 <새사람>의 복간을 서둘러 조민영, 김재준, 김선량, 김정준, 홍현설, 김우현, 조경우 등 동지들의 협력으로 194641일 속간호인 제8호를 내기에 이르렀다. 서울 죽첨동에 새사람사를 차리고 국판 30면 정도로 축소하여 발행하였으나 재정 사정으로 625사변 전인 19503월 통권 23호로 다시 폐간되고 말았다. 속간호에서는 동인 외에 박두진, 박화목, 주태익, 전명옥 등 기독교 문인들의 작품들이 자주 실렸으며 성서연구 및 신학논문도 많이 실렸다. 특히 김재준은 정통보주수의를 비판하며 신정통주의를 옹호하는 글을 실어서 교계에 신학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625사변으로 중단되었던 잡지 간행을 19557월에 재복간해서 2호까지 냈으나 다시 재정문제로 통권 25호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1967년말 김재준ㆍ주태익 등과 교도소ㆍ공장을 상대로 한 <새사람 신문>을 발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전영택 목사의 급서로 빛을 보지는 못했다. 비록 통권 25호의 단명한 잡지였지만 교회와 사회의 어려운 시기에 창간되어 다양한 내용의 글을 수록하였고 특히 815 해방 후 정신적 혼란기에는 1) 매일 성경을 읽자, 2) 거짓말을 하지 말고 속이지 말자, 3) 깨끗하고 검소하게 살자 등 새사람 생활강령을 제창하며 새사람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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