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진』에서 손떼고
나는 하루 차운수를 불러 조용히 물어보았다. 그는 『선생님, 제가 그럴 수 있습니까?』 하고 많은 변명을 한다. 어쨌든 그는 내 앞에서는 『학생』 같이 겸손했다.
여름방학이 되었다. 신사참배 관계로 평양신학교가 문 닫은 지 2년이 되었다. 잘 되던 못 되던 교회는 남아있는데 신학교는 없다. 교역자 대표들이 모여 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고 서울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님이 사재 오십만 원을 기금으로 낸다고 약속했단다.
그 설립사무를 송창근 형이 맡았었는데 그는 흥사단 사건으로 『보석』중이어서 당국의 경고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서울에 불러 이 일을 맡기고 자기는 김천읍 황금정교회 목사로 가려 했다. 당장 올라오라는 전보가 매일 온다. 설립자 김대현 장로님의 초청서한도 왔다. 그래서 나는 식구들 용정에 두고 학교에는 사표를 내고 단신 서울에 갔다.
그 당시 『십자군』도 낼 수 없었다. 일본 영사관 권한은 만주국으로 옮겨졌고 만주국에서의 정기간행물 규정은 더 까다로웠다. 그래서 아예 신청도 안하기로 했다.
내 『은진』 생활은 이렇게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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