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94) 간도 3년 - 용정서 서울에

용정서 서울에

 

비오는 날 나는 고무장화에 우장까지 하고 혼자 집을 떠나 서울을 향했다. 행정(行程)의 자세한 기록은 한신대 학보에 발표한 바 있기에 여기서는 약한다. 서울서는 서대문 밖 성 기슭 언덕바지에 있는 작은 여인숙 서안여관에 하숙을 정했다. 주인 마나님은 평안도 분이며 혼자난 중년 여성으로서 지성인이었고 여학교에 다니는 딸을 뒷바라지 하고 있었다.

나는 김대현 장로님 둘째 자제인 김영환 씨와 그의 형님인 김영철[1] 장로를 만나 인사했고 천식증 때문에 성북동 송림 속 별장에서 요양 중인 김대현 장로님도 뵈었다.

내 하숙비와 잡비 그리고 용정에 있는 가족들 생활비 모두 무작정이다.

김영환 씨가 한 달에 80원씩 담당했다. 그는 법학사 약학사의 두 칭호를 갖고 있으면서도 취직은 질색이었고 혜화동 로타리자기 집 아래층에 제약소와 약방을 차려놓고 거기서 소일하는 것이었다.

그는 몸집도 큰 축이고 신수가 좋고 미상불[2] 잘난 사나이었다. 농담도 잘했다. 그의 호탕한 웃음은 노염 푸는 봄바람이랄까 맺혔던 가슴이 풀어진다.

용정의 아내는 학생 셋인가를 하숙시켜 그걸로 살아간다고 했다. 학생이래야 내가 가르치던 은진제자들이어서 하숙이라기보다도 사모님을 모신다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 그 학생들이란 안병무, 김기주, 훨씬 아래반인 회령의 최동렵이었다. 남자가 아쉬운 거친 일들을 발 벗고 나서서 도왔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집에 보낼 돈으로 낡은 양복 한 벌 사 입었다. 다 떨어진 국방복 만으로는 대인관계에 너무 초라했기 때문이다.


[각주]

  1. 김영철(金永喆, 1898~1987) - 1896(호적에는 1898년생으로 되어 있음) 1027, 경북 영일군 신광면 상읍리에서 노석 김대현 장로의 51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21세에 승동교회에서 청년 집사가 되었으며, 1922929일 홍경희 씨의 장녀 홍인순 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75녀를 두었다. 1911년 흥해공립고통학교에서 3년간 신교육을 받았다. 1914년 오성학교에 입학하여 졸업(1917)한 해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의과대학 재학 중에 대한독립애국단과 항일비밀결사체인 조선독립대동단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31독립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1923년에 의사가 되어 1972년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의사로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에 독립운동을 하며 알게 된 이인 변호사의 주선으로 한때 건국과정에서 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기도 했으나 혼탁한 정치판과 결별하였다. 1930년에 승동교회에서 34세의 젊은 나이에 장로가 되었고, 1937년에는 사재를 헌금하여 성북구 보문동에 신암장로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1947년부터 1971년까지 시무장로로 동소문교회(1964년 창현교회로 개칭)를 섬겼다. 1945년 재단법인 강제학원을 설립한 후에 성신여학교(현 성신여자대학교의 전신)를 후원하며 설립이사로, 그리고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재단이사로 활동하였다. 1981년에는 신흥대학의 발전을 위해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약 50(15만평)의 땅을 기증하는 한편, 경기도 의정부에 강제복지원을 설립하여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았다. 한신대학을 위해서 강제장학재단을 설립하고 강제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1987728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91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12년 후인 1999314일 아내 홍인순 권사도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두 분의 유해는 하와이의 밀리라니 공원묘지에 묻혔으나, 대한민국정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게 되어 2003815일 광복절에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2. 미상불(未嘗不) -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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