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6일 금요일

[범용기 제3권] (13) 정계의 파노라마와 남북공동성명 - 수술

수술

 

성서공회 총회에서 이용설[1] 박사와 김명선[2] 박사를 만났다.

김명선은 언제나 농담이다. “젊은이, 얼굴이 왜 그래?”

나는 대략 병상을 얘기했다. 소변이 마치 비 새는 천정에서 물방울 떨어지듯 한다고 했다. 이용설 박사는 웃으면서 그것 전립선비대증 때문인데 당장 떼 버리라구!”, “수술 안하구 치료하는 법도 있긴 하지만, 거저 떼 버리는 게 빠르고 시원해!”, “속히 하라구!”

그래도 나는 수술을 단행하지 못한대로 성서공회에서 진행중인 새번역신약성서 최종 교열과 자주 열리는 성서공회 이사회, 성서공회 빌딩건축위원장,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표위원 등등으로 거의 매일 시내에 드나들었다. 아직 대한일보 논설위원으로도 그런대로 붙어 있었다. 시내로 오가는 데는 주로 버스를 타는데 버스 타기란 한바탕 전쟁이다. 아니면 목숨 걸고 덤비는 피란민 떼거리[3]랄까?

그래도 수유리는 종점이었기에 비교적 수월했다. 미아리쯤 가면 진짜 싸움이다. 문깐에 선 어린 차장은 가엽다.[4] 들어오려는데 안 들여놓는다고 욕지거리, 어디 자리 있다고 또 들여놓느냐고 욕설 말하자면 욕설쌘드위치가 된다. 그러니까 몸 불편한 나의 시내 왕래는 더 피곤해진다.

결국은 수술하고야 말았다.

수술기록은 19727월 발행 322호에 실린 병상일록이란 일기문에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그러나 따로 들추기도 시끄러울 것이기에 대략 적어둔다.

19726월 어느 날엔가 남대문 거리를 걷다가 느닷없이 울릉도의 이일선[5] 목사를 만났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는 으레 듣는 인사말이다. 나는 그리 안녕하지도 않다면서 병상을 얘기했다. 그는 곧 그거 전립선(소파선) 비대증[6] 때문인데 수술을 서둘러야 하겠습니다한다.

그 이튿날인 69이일선은 부인 이길화와 함께 수유리 우리 집에 찾아왔다. 안암동 자기 집에서 저녁을 같이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리로 갔다.

두어 시간 앉아 있는 동안에 네댓[7] 번 화장실로 드나드는 것을 눈치챈 이 목사 부부는 당장 수술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즉석에서 우선 입원수속비로 10만원을 내놓는다. “늦추다가 방광염, 신장염 등등이 발병하면 큰일입니다하는 것이었다. 병원은 한양대 부속병원이 좋을 거라고 한다.

그래서 1972612일에 한양대학교 김연준[8] 총장에게 말했다.

그는 당장 특별실 독방에 입원시켜 준다. 자그마한 냉장고, 화장실, 욕실, 옷장, 전기스토브, 간호인 침대 등등이 다 있는 910호 특별실이다.

며칠 굶고 철저하게 관장하고 예비검사를 마치고 결국에는 수술대에 올랐다.

들것에 눕히고 낯에까지 홋이불을 덮어씌우고 흰옷 입은 남자 둘이서던가 메고 나가는 꼴은 영락없이 시체운반 광경이었다. 수술실에서 수술대에 눕기까지는 기억되지만 그 다음은 모른다. 전립선이 굉장히 자라서 요도를 눌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병실에 돌아온 첫날은 어리벙벙한 아픔이 둔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다음날은 진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마려운 오줌이 나가지 않을 때의 고통이란 유난했다. 나는 체면없이 엉엉거렸다. 부르짖음은 고통의 발산 방법이었다.

배꼽 아래 중간쯤 좌우에 방광에까지 구멍 하나씩 뚫어 고무관을 꼽았다. 왼켠 줄은 물을 방광에 부어넣는 것이고 오른켠 것은 물이 방광에서 나오는 줄이다.

피는 요도를 통하여 방광으로 들어갔다가 물에 섞여 오른켠 줄로 나온다. 한 주일을 줄곳 피섞인 물이 나온다.

영양은 혈관에 꼽은 링겔병 줄을 통해 수송된다.

셋째 날부터는 그리 날카로운 진통이 아니었다. 처와 이우정 선생이 늘 옆에 있어줬다. 정희도 갓난애기를 업고 자주 들렀다. 병원공기란 병균천지라서 애기에게 좋잖을 거라 생각되서 오지 말라고 했다.

의사들은 친절했다. 과장이 직접 들리기도 했다. 김대중 씨를 비롯하여 정계 거물들의 이름 붙은 화분이 무지스레[9] 많이 왔다. 조처할 고장이 없어서 간호원들 방에 나누어 주기도 했다.

경과는 청년 표준의 회복기간과 꼭 같은 날짜로 계산됐다고 한다. 의사는 놀라와한다. 여의사 한 분은 당뇨증세도 있었기에 슬그머니 염려했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순서대로 나아가는지 모르겠어요.”

목사님이라 기적인 것 같은데요!” 하기도 했다.

열흘만엔가 퇴원해도 된다면서 앰뷸런스에 실어 왱왱거리면서 거리를 달려 수유리에 왔다. 여전히 누워있기는 했지만 병자는 아니었다. ‘소변이 쏴 하고 시원스레 나가는 쾌감!’ 그건 경험 없이 실감하긴 어려울 것이다.


[각주]

  1. 이용설(李容卨, 1895~1993) - 평양부 희천군(북한 자강도 희천시)에서 이재후와 채재신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숭실중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의과대학원 석사 및 박사과정을 졸업하였다. 1924년 안창호를 만나 흥사단에 입단하였고,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친일로 전향하였다(일본명 미야모토 조세쓰 宮本容卨). 광복 후 미군정 보선후생부장,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의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등을 지냈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기도 하였다.
  2. 김명선(金鳴善, 1897~1982) - 호는 해사(海沙). 황해도 장연 출신. 아버지는 김병규(金秉奎)이다.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수물과를 수료하고, 1925년에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뒤 19619월까지 모교에서 교수ㆍ학장ㆍ부총장ㆍ명예교수를 역임하였다. 1932년부터 노스웨스턴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35년 일본 교토부립의과대학 의학박사, 1963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3. 떼거리 - ‘’(여럿이 함께 모여 있는 무리)를 얕잡거나 낮잡아 이르는 말
  4. 가엽다 딱하고 불쌍하다
  5. 이일선(李一善, 1922~1995) - 1945년 약수동 신일교회를 개척하였다(신일교회는 1954년 교단 분열 당시에 어느 쪽으로도 가담을 거부해 무소속교회로 이어지다가 1981년 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신학교를 졸업(1949)하고 의료선교를 위해 서울대 의대에 진학해 피부과 전문의가 되었으며(이 당시에 아프리카의 슈바이처를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다), 1961년 교인 천여명에 달하는 신일교회를 사임하고 울릉도로 건너가 의료선교를 하였다. 이일선 목사가 신학교 졸업반 시절 이상촌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했는데, 거기에 김재준 목사가 추천사를 써 주었고, 이것을 문제삼으면서 이노수(李魯秀) 장로 등이 신앙동지회를 결성하여 조선신학교 문제를 총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6. 전립선비대증(前立腺肥大症) - 전립선이 병적으로 비대해져서 빈뇨(頻尿), 배뇨 곤란, 식욕 부진 따위의 증상이 나타나는 질환. 고령인 남자에게 많이 발병한다.
  7. 네댓 대강 어림쳐서 넷이나 다섯쯤
  8. 김연준(金連俊, 1914~2008) - 해방 이후 한양대학교 총장과 이사장을 역임한 교육자, 작곡가. 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1939년 연희전문을 졸업한 뒤 한양대의 전신인 동아공과학원을 설립했다. 대한일보와 기독교신문을 창간하였다. 1959년부터 1973년까지 15년간 한양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이후 2007년까지 한양학원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다. 그는 평생동안 장공 김재준의 인격과 지조와 문필능력을 존경하고 어려운 난세에 김재준이라는 선비를 보호하고 돕는데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9. 무지스레 슬기롭지 못하고 크고 둔한 데가 있게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