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104)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그의 “하야” - 그 배후 세력은?

그 배후 세력은?

 

물론 미국 손이 막후[1]에서 움직였다.

이승만은 친미파라 하겠다. 그러나 미국에 맹종하지는 않는다.

 

미국은 일본을 자기 품속에 안아들임으로 중공의 세력을 견제하려 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일본과의 친교를 원치 않는다. 일본을 으로 간주하여 동해에 Lee Line을 그어 황금어장을 한국 어획구역으로 선포한다.

 

그 라인을 침범하는 일본 어부들을 체포하여 부산에 억류하기도 한다.

미국은 이승만의 배일정책이 싫었다. 그래서 갈아치우려 한 것이 아닐까?

 

그래도 이승만은 일본식 군벌보다는 훨씬 민주적이었다. 하야[2] 권고를 받았을 때 민의가 그렇다면 하야 해야지!” 하고 맨발로 걸어 효자동 어구까지 나왔다고 한다. 길가의 군중들은 통곡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제스츄어만으로도 민주적이다. 초기의 소, , , 대학을 포함한 학원자치도 민주교육의 모본이었다.

허정[3]이 대통령 직무를 대행했다.

 

위에서 본대로 이승만 퇴진은 자발적이 아니었다. 이승만의 성격으로 본다면 자기 수중에 있는 군대와 경찰력을 총동원하면 학생과 시민을 얼마든지 눌러버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못하게 한 것은 미국의 압력이 적극적으로 작용한 탓이었음이 분명하다.

419와 미국 관계는 좀더 자세하게 적어둘 필요가 있겠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승만은 미국이 몰아낸 것이었다.

 

419미 국무성과 주한미대사관 맥낙기 참사관 등은 반정부 데모에 대한 미국의 깊은 관심을 포명했다.

420미 국무성과 주한미국대사관은 다시 한국 사태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표명했다.

424미 국무성과 미주한대사관은 데모에 대하여 방관 태도에서 참여 태도에로 변경했다.

이기붕의 공직 사퇴 성명과 이승만의 자유당 총재 사임 성명은 이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425이승만은 허정을 외무장관으로 임명하고 미국과 절충하게 했다.

426미국 대사관 맥낙기가 대통령 관저를 방문한 직후인 10:30AM에 이승만은 미국의 의향에 따라 아래와 같은 퇴진 의사를 표명했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을 사임해도 좋다. 이기붕을 모든 공직에서 사퇴시킨다. 정ㆍ부통령 재선거를 실시해도 좋다.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로 개헌해도 좋다.”

 

같은 날 오후에 국회는 긴급 본회의를 열고 이상의 네 사항을 가결하고 아래의 네 사항을 다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하야할 것, 315 정ㆍ부통령 선거는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실시한다. 과도 내각하에서 완전한 내각책임제 개헌을 실시한다. 개헌 후에 국회를 해산하고 새로 총선거를 실시한다.”

 

427이승만이 국회에 제출한 대통령 사임서는 즉시 수리되고 허정이 과도내각을 조직했다.

퇴진한 이승만은 돈암장에 우거[4]했다.

이승만 대통령 사임과 함께 함태영 부통령도 물론 사임했다.

그에게는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국민은 그에 대하여 아무 기대도 책임도 묻는 일도 없었다.

 

그의 막내 아들 함병춘[5]이 아버님인 함 옹을 모시고 돈암장에 갔다. 밤이었다 한다.

두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서로 쳐다보다 헤어지더라고 병춘은 말했다.

 

허정은 국민 몰래 이 박사를 하와이로 피신시켰다. 그는 거기서 뇌충혈[6]인가로 불수가 됐다. 오랫동안 입원해 있었으나 종말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의 반려자의 간호는 극진했다고 들었다.

 

결국은 숨을 거두게 되었다. 후일에 유해가 한강 건너 동작동 국립묘지에 옮겨져 초라한 무덤이 외롭게 남았다. 내가 가 본 때에는 묘비도 없는 작은 사마귀[7]였다.

그 후에 그의 세도로 벼락 출세했던 사람들이 부토[8]도 하고 비석도 세웠다고 들었다.

 

이 박사는 한문에 능하고 서도(글씨)에도 자가류를 이룬 능필이었다.

어떤 분이 이 박사의 자작시를 자필로 쓴 열폭 병풍을 국전에 전시한 것을 본 일이 있다. 그 자유 능숙한 필치에 감탄했다. ‘명필이 아니라, ‘능필이었다.

이승만 박사 집권 동안에 실종 또는 암살된 거물급 인사가 너무 많았다. 그것은 후세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김 구 그는 임정 주석이었다.

여운형[10] 그는 임정의 외교관으로 웅변가였다. 그리고 좌ㆍ우익에 교류의 루트를 마련하려 했다.

장덕수[11] 언론가, 동아일보의 거성이었다.

김능진[12] 그는 Y 총무였으며, 이 박사 단독 선거구에 경쟁자로 출마했다가 행방불명이 됐다.

조봉암 사회주의 정치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체포되어 공산주의자로 몰려 교수형을 받았다.

 

그 배후에 미국 CIA가 움직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박사의 자신의 히스테릭한 반공사상이 곁들이지 않았더라면 그렇게까지 될 수는 없었을 것이 아닐까?

그 직접 하수자는 극우의 과격 청년들이었다.

 

이기붕과 그 가족은 이승만에게 양자로 입적했던 자기 아들 이강석[13]의 총탄에 맞아 전 가족이 몰사하고 이강석 자신도 그 권총으로 그 자리에서 자살했다.

그야말로 완전한 패가망신이다.

 

이기붕은 부통령 되기 전부터 반신불수로 누워있었다. 나쁘게 말하면 병신이었다. 그의 아내 박마리아[14]가 배후에서 암약[15]했다.


[각주]

  1. 막후(幕後) -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면의 장소
  2. 하야(下野) - 시골로 내려간다는 뜻으로, 관직이나 정계에서 물러나 평민으로 돌아감을 이르는 말
  3. 허정(許政, 1896~1988) - 부산출생으로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였다. 191931운동 당시 시위에 참여하였고 상해 임시정부의 조직에 가담하였다. 1920년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뉴욕에서 공부하면서 이승만을 도왔으며, 1923삼일신보의 사장이 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서울시 고문관으로 활동했으며, 1948년 제헌의원 선거때 부산에서 한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에 교통부장관, 사회부장관(1950~1952), 국무총리 서리(1951~1952), 서울특별시장을 지냈으며(1957~1959), 한일회담 수석대표(1959)로 발탁되었다. 1960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뒤 외무부장관을 겸직하면서,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1963국민의 당을 창당하여 대표최고위원이 되어 대통령 후보로 내정되었으나 윤보선과 야당후보단일화를 이루어 자리를 양보하였다. 1969년부터 1984년까지 통일원고문, 1980년까지 국정자문위원으로 일하였다.
  4. 우거(寓居) - 남의 집이나 타향에 임시로 거처하여 삶
  5. 함병춘(咸秉春, 1932~1983) - 함태영 부통령의 아들. 1956년 노스웨스턴대학을 졸업하였고, 1959년 하버드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1970년까지 연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970년 이후 정계에 진출하여 주미대사(1973), 외부부본부대사(1977), 대통령외교담당 특별보좌관(1979) 등을 지냈다. 1982년 대통령비서실장에 기용되었다가 1983년 아웅산폭탄테러사건으로 순직하였다.
  6. 뇌충혈(腦充血) - 뇌에 혈액이 지나치게 많이 모이는 병
  7. 사마귀 피부 위에 낟알만 하게 도도록하고 납작하게 돋은 군살
  8. 부토(敷土) - 흙이나 모래를 펴서 깖
  9. 능필(能筆) - 뛰어난 글씨
  10. 여운형(呂運亨, 1886~1947) - 호는 몽양(夢陽). 경기도 양평 출신. 1908년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Clark. C.A.) 목사의 조수로 있으면서 당시 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승동교회를 출입하였다. 1911년 강릉에서 남궁억의 후원으로 운영되던 초당의숙의 교사가 되어 청년 교육에 힘썼다(1911년부터 2년간 평양신학교에 다녔다). 1914년 난징의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1917년부터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힘썼으며, 1920년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5년 쑨원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여 중국혁명운동에 참여하였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직에 취임하였고,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44년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고,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주도하였다. 혼란한 정국 속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면서 통일정부 수립에 노력하다가 1947719,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11. 장덕수(張德秀, 1894~1947) - 호는 설산(雪山).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1916)하고, 귀국하여 상해로 건너가 여운형 등과 독립운동을 논의하였다. 1918년 신한청년단 결성에 참여하고, 1919년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주거제한 처분을 받았다. 1920동아일보부사장이 되었다. 1923년부터 미국으로 건너가서 허정과 함께 삼일신보를 발간하기도 하였으며, 1936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친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하였다. 해방 이후 송진우와 함께 한민당 창당을 주도하고, 우파 활동을 하였다. 1947122, 자신의 집에서 현직 경찰과 학생에게 암살당하였다.
  12. 범용기에는 김능진으로 적혀있지만, 문맥상 최능진이 맞다.
    최능진(崔能鎭, 1899~1951) - 일제강점기 친일 청산을 위해 일생을 바친 한국의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민족주의자이자 대한민국 경찰이다. 1937년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으며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이후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소련의 탄압을 피해 월남한 뒤 미군정에 의해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1946년 조병옥의 친일 경찰 등용과 부패에 항의하다가 경찰 간부직에서 밀려났다. 1948510 총선거에 이승만이 출마한 동대문 갑구에 입후보하려 했으나 서북청년회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지휘 아래 방해로 어려움을 겪다가 극적으로 후보 등록을 했다. 이승만의 당선을 위협하는 정적으로 부각되자 등록 무효화되었다. 정부 수립 이후에 국군 안에 혁명의용군을 조직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치하 서울에서 정전ㆍ평화 운동을 벌인 최능진은 결국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일제 관동군 헌병 출신 김창룡의 방첩대가 그를 조사했으며, 1951211일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서 처형당했다.
  13. 이강석(李康石, 1937~1960)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육군장교로 이기붕의 아들이자 이승만의 양자이다. 1957년 이승만의 83세 생일에 맞추어 양자로 입적되었다. 419 혁명이 끝나갈 무렵인 428, 친아버지 이기붕, 친어머니 박마리아, 동생 이강욱 등 온 가족을 총으로 쏴 죽인 뒤 자신도 자살했다.
  14. 박마리아(朴瑪利亞, 1906~1960) - 강원도 강릉 출신. 교역자인 어머니 고의대(高義大)를 따라 개성으로 이주하여 1923년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8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화여자전문학교 시절부터 공창 폐지, 금주, 금연 등의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한 바 있다. 미국에서 1932년 테네시주 스카릿(Scarlet) 대학을 졸업한 후 피바디(Peabody) 사범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윤리학을 가르쳤다. 1935년 이기붕과 혼인함과 동시에 YWCA 총무로 10년간 활동하였다. 1954년 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과 과장을 거쳐 문리대학 학장 및 부총장에 취임하였고,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장남 이강석을 대통령의 양자로 삼게 하는 등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국민의 규탄을 받기도 하였다. 419혁명 당시에 온가족이 권총으로 집단 자살하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15. 암약(暗躍) - 어둠 속에서 날고 뛴다는 뜻으로, 남들 모르게 맹렬히 활동함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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