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105) 민주당 집권시대 – 장면 정권 9개월 - 민주당 집권

민주당 집권

- 장면 정권 -

 

1960년 이 박사 하야한 즉시로 민주당[1] 대회가 열렸다. 모든 절차를 거쳐 선거가 실시됐다. 국민은 무조건 민주당에 투표했다. 어느 인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을 보고 투표하는 것이었다.

자유당은 이 박사와 함께 안개처럼 사라지고, 민주당 일색이었다. 다른 당을 다 합쳐도 절대 소수여서 야당 구실을 못하게 됐다.

헌법은 내각책임제[2]로 고친다.

민주당은 본래 신파, 구파로 나눠져 있었다. 신파 수령은 장면이고 구파 수반은 윤보선이었다. 선거를 앞두고 억지로 단일화 돼서 절대 다수의 표를 얻은 것 까지는 좋은데, 신파인 장면이 국무총리가 되고 구파인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됐다. 대통령 책임제가 아니기 때문에 윤보선은 실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보선은 국가의 수반이란 긍지와 전래의 양반심리 때문에 매사에 직접 간섭하고 싶어했다. 적어도 장면이 자기와 의논하고 자기 의견을 존중해 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장면은 그 정도로 예절답지 못했다. 윤보선은 노여웠다.

나는 의례 경무대로 그를 예방해야 마땅한 처지였다. 피난 때 인연으로 보든지, 그의 영부인으로 First Lady가 된 공덕귀 여사와의 인간관계로 보든지 즉석에서 달려가 축하해야 마땅한 처지였다.

공덕귀 여사는 부산 동래 출신으로서 여고를 마치고 일본 고오베 여자신학교를 졸업한 후, 김천교회에서 송창근 목사와 함께 목회하다가 한신여자부 사감 겸 강사로 우리와 동역했다. 우리가 미국 유학의 길을 주선하여 거의 다 되어갈 무렵에 윤보선과 결혼한 것이었다.

그러니만큼 누구보다도 먼저 경무대에 축하 방문을 갔어야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경무대와 나 자신의 성미와는 서로 맞지 않았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용단을 내린 것이었다.

윤보선 씨는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반가와 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작은 응접실이 있다. 단 둘이 대좌했다. 그는 첫마디부터 장면에 대한 불평이다. 나는 한 시간 동안 듣기만 했다. 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의 분노는 불평을 넘어서 증오의 선에 육박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장면은 국사를 쓰게도 못하면서 대통령과 의논도 안한다는 호소였다.

너무 비대해진 민주당은 벌써 둘로 갈라진 것이었다.


[각주]

  1. 민주당(民主黨) - 1955년 자유당의 사사오입 개헌 사건을 계기로, 민주국민당의 보수파와 자유당의 탈당파, 흥사단 등의 반이승만 세력이 모여, 1955918일에 창당되었다. 창당 이후, 구 한국민주당, 민주국민당 출신 구파와 자유당 탈당파, 흥사단계 등 신파의 내부적 갈등이 지속되었다. 1956년 대선 후보로 대통령 후보에 신익희, 부통령 후보에 장면을 내세웠다(신익희는 선거 직전 사망, 장면은 당선됨). 1960419혁명에 의해 이승만 정권의 퇴진으로 직후에 실시한 1960729일 총선에 크게 승리하여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를 선출하여 제2공화국의 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구파와 신파간의 분당, 당내 분열 등으로 혼란을 겪다가, 196011월에 민주당을 탈당한 구파 세력이 신민당을 창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1961516 군사정변 직후에 군부에 의해서 해산되었다.
  2.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 - 의회의 신임을 행정부의 필수 요건으로 하는 정부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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