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117) 5ㆍ16 군사반란 1961 - 4대 의혹사건

4대 의혹사건

 

19634월에 소위 사대의혹사건’(四大疑惑事件)[1]이 탄로났다.

국민경제를 교란시켜 그 틈을 타서 횡재를 거둬먹으려는 공공연한 도박 행위였다.

이것은 몰래 일본에 드나드는 김종필의 작전이었다 한다.

 

힘센 사람이면 한손으로 번쩍 들어 팽개칠 수 있다는 새나라자동차 수입 명색이 자동차니만큼, 헐값으로 사들여 정상적인 자동차 값을 다 받는다는 계산이었고,

도박을 위한 빠찡코기계 수입

워커힐에 맘모스 유흥장 시설

증권 파동 조작 등등을 ‘4대의혹사건이라 부른다.

 

이것은 물론 한일국교정상화 이전 얘기니까 모두가 불법임에 틀림없다.

 

경제에는 경제의 법칙이 있으니만큼 군대의 호령대로 행진하는 것은 아니다.

부정축재처리법이니, ‘농어촌고리채정리법[2]이니 하는 구호는 그럴듯한데, 악성 인플레와 물가앙등[3]만이 치솟아서 민생고는 여전하다. 절량농가[4] 문제는 완화된 것 같았지만 이농(離農)[5] 자가 증가일로를 걷는다.

그래서 도시 실업자가 부쩍 는다.

 

정권의 내분이 심각해진다. 군사정권을 구성한 인맥파벌육사 8기생중심이다. 그러나 8기생’, 평안도파(장도영 계열), 함경도파(알라스카파), 해병대파(김동하파), 김종필파, 반김종필파 등등이 서로 반목질시한다.

19617월의 장도영 반혁명 사건, 19633월의 박림항[6], 박창암[7] 등의 반혁명사건, 196310월의 김윤근[8] 쿠데타 용의사건 등등은 집안 싸움의 일종이었다.

그런데 최고집권자인 박정희는 경륜도 신념도 경험도 정견[9]도 없기 때문에 그 근본해결책을 강구하기보다도 그때그때에 생각나는 대로 탄압 제일주의로 나갔고 그것이 잘 안되면 번의를 떡 먹듯 하는 것이었다.

그는 과잉의욕과 시행착오를 겸한 데마고그[10]였다.

 

반공을 국시로 한다 했지만, 625의 공산군 남침 이후 남한 국민으로서 반공의식 없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진짜 공산그룹은 해방 후에 곧 월북했고 625 때에 대거 월북했기 때문이다.

 

반공국시’(이승만 때에도 마찬가지였지만)라는 닻을 달아 부동(不動)의 무게를 덧붙였다. 그리고 자기 정권에 반대하는 자는 반공법으로 처단한다.

반 박정권자는 공산분자고, 이북간첩이고 국가반역자라는 자기류의 공식을 만들어 중형에 처한다.

반공은 박정희의 만능호신부’(萬能護身符). 그는 시행착오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건 자기 잘못이 아니라, 부하들의 불찰이거나 국민의 몰지각때문이라고 한다.

좀 더 따끔하게 졸라라!” 따라서 KCIA는 어깨가 으쓱해진다.

 

은 원래가 정보장교 출신이니만큼 그가 만든 국가도 정보국가로 태어나지 않을 수 없겠다.

민심은 그를 떠난 지 오래다. 국민, 특히 학생, 교수, 기독교 지도자의 일부는 에게 책임을 묻는다.

독재자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무신유물론자니 하느님께 책임질 맘뽄새[11]도 안 생긴다. 자기가 의 자리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이 곧 국가다하는 오만자다.

 

그러나 그건 제 생각일 것뿐, 국민은 덜된 녀석으로 밖에 보지 않는다.

국민이 납득하지 않는 한, 아무리 탄압해 본대도 혼자서 3천만을 대항하여 이긴다는 계산은 나오지 않는다. 진시황도 히틀러도 그러했다.

 

군정의 장기화란 미국의 치욕이기도 했다.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그를 미국에 초청하여 담판했다. 2년 후인 1963년 여름까지 민정으로 이관한다고 은 다짐했다.

그때부터 민정이란 탈바가지 속에서 군정을 연장하려는 흉계를 꾸민다.

 

1963812일에 민정으로 이관한다고 발표했다.

정치정화법[12]을 만들어 구 정치가의 활동을 봉쇄했다. 3,038명이 정치 활동금지를 당했다.

1962년 여름부터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시켜 비밀리에 전국을 순방하며 어둠 속에서 민주공화당 조직을 진행시켰다.

19621227일에 박정희는 쿠데타 당시의 공약을 깨뜨리고 자신의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다음해 11일부터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1963218일에 아홉 가지 정국수습방안을 발표하면서 이런 것들을 수락한다면 자기는 민정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성명했다.[13]

 

516 혁명과업의 계승

516 혁명의 정당성 인정

정치적 보복의 금지

혁명주체 세력의 군 복귀 또는 민정 참가는 개인의 의사에 맡길 것

유능한 예비역 군인의 기용

한일 문제의 초당파적 추진

 

이런 조건들이 각 정당과 정치지도자에게 수락된다면 박정희 자신은 민정에 참가하지 않는다.

이것은 218성명이라고 한다.

이런 성명을 내게 된 것은 군사정권장기화에 대한 국민의 불만과 정권 내부의 의견대립을 무마하기 위한 제스츄어였다.

 

1963227박정희와 각 정당ㆍ정파 지도자들과 군 대표가 회집하여 시국수습방안을 수락하고 준수하겠다는 선서식을 거행했다.

같은 날에 최고회의는 정정법[14] 해당자 중에서 2,320명을 해제했다.[15]

 

196337일에 박정희는 516 쿠데타 정치질서에 해를 끼친 기성 정치가의 후퇴를 요구하고 군사쿠데타를 지지하는 새 세대에 정권을 맡겨야 한다는 세대교체론을 주장했다.

 

1963315일에 수도방위사령부 소속 현역군인들이 민정 이관에 반대하고 군정 연장을 요구하는 데모를 했다.[16]

범용자도 그 광경을 목격했다. 짚차 대열이 장사진을 이루었었다. 보병들은 마치 전장에 나가는 돌격대같이 긴장된 표정이었다.

 

1963316박정희는 군정 4년 연장을 국민투표에 의하여 결정한다고 발표함과 아울러 비상사태수습 임시조치법을 공포하면서 기성 정치가의 정치 활동을 중지시켰다.[17]

 

1963319~22재야 정당인과 시민이 군정 연장 반대 데모에 나섰다. ‘3군지휘관회의에서는 군정연장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963323미 국무성은 군정 연장을 반대한다는 것과 합리적인 민정 이관을 기대한다는 서한을 박정희에게 전했다.

 

196342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박정희가 보낸 회답에 대한 회신에서 한국에 민주정부가 서기를 바란다고 했다.[18]

 

그 당시 외무장관은 이동원[19]이었다.

이동원은 박정희와 미국 대사관과의 사이에 샌드위치가 됐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박정희는 미국 대사에게 대통령 출마를 포기했노라고 울면서 얘기했단다. 미국 대사는 박정희의 신변보호와 남은 생애의 보장과 미국 이거(移去) 등등을 절대보장한다고 했다.

박정희는 승낙하고 나갔다. 얼마 후에 또 와서 암만해도 안 되겠다번의한다.

그러기를 몇 번 하다가, 군부 데모가 있은 그날 밤에 와서는 기승한 태도로 나는 그만두지 않는다. 그만 둘 수도 없다”, “군부가 일어나 궐내 혁명을 일으킬 때, 너희가 책임지겠느냐?” 하고 마구 대들더라는 것이었다.

 

196348박정희는 군정 연장에 대한 국민투표를 9월말까지 보류하고 기성정치인의 정치활동금지조치법을 폐기하고 정당 활동을 재개하게 했다. 이것을 48성명이라 했다.

 

박정희는 국민투표를 중지하고 연내에 민정으로 이관한다고 발표했다.

 

1963527- “민주공화당은 전당대회를 열고 박정희를 대통령 후보를 지명했다.

1963727박정희는 대통령 선거를 10월 중순에, 국회의원 선거를 11월 하순에, 새 국회소집을 12월 중순에 실시한다고 민정이관절차를 발표했다.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이미 사전 암약을 통하여 말단 조직과 전략과 국회의원 입후보자까지 정해져 있었지만 야당측은 군소정당이 난립 경쟁하여 난맥상[20]을 이루었다.

 

이제 그 정당 이름만을 적어보기로 한다.

 

민정당 윤보선, 김병로[21], 이인[22], 전진한[23]

신정당ㆍ국민당 허정

범국민당ㆍ자유민주당 친여야당으로서 위원장은 소선규[24], 부위원장 김용우

민주당 박순천[25], 홍익표[26]

자유당 장택상

정민회 변영태[27], 인태식[28]

민우당 이범석[29], 이윤영[30]

 

이것을 계보적으로 정리한다면 이승만계, 한민당계, 군부계로 된다.

 

그 밖에 이동화[31], 김달호[32], 윤길중[33] 등은 옥중에 있었고 서상일[34], 최근우[35], 이훈구[36] 등도 옥중, 장건상[37], 김성숙[38], 김성주, 조헌식, 정화암[39], 구익균[40], 송남헌[41] 등은 출옥되었으나 감시 하에 있었으며, 박기출, 유병묵[42] 등은 지하에 잠복하고 있었다.

 

범용자가 목격한대로 민주공화당에서는 정구영[43]을 총재로 하고 의장에는 김정렬(金貞烈)[44]을 선출했었고, 시골 있는 정구영을 억지로 서울에 모셔다가 취임식 준비까지 완료했었다. 그런데 박정희가 그 자리에 나타나, “너희가 그 따위로 한다면 맘대로 해라. 나는 당과 절연한다하고 퇴장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랄까, ‘억지춘향이랄까, 박정희를 총재로 한 것이라 했다.

항간에는 민주공화당민주도 아니오, ‘공화도 아닌, ‘탈바가지라는 까십이 돌았다. 말하자면 비민주ㆍ비공화당이라는 이름의 도당이라고 야유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육군 대장이 되어 예비역에 편입했다. 그리고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1963831일 제3차 전당대회에서 민주공화당 총재로 선임되고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했다.

선거는 유사이래 유례없는 부정부패였다고 한다. 면장, 동장, 반장, , 중학교 교사 등이 총동원, 사전매표에 광분했다. 그러나 대도시는 어느 정도 예외였다.

어쨌든, ‘은 군복을 벗고 민간인 의복을 갈아입었다. 같은 배우가 복장만 갈아입고 무대에 데뷰한 셈이었다.

국민은 여전히 조소와 냉담과 분노와 항거로 들끓으며 출구를 찾고 있었다.

난립된 야당들도 반성하게 됐다. 그래서 단일 또는 협동 야당 운동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각주]

  1. 516 군사정변 이후의 군사정권 밑에서 발생하였던 네 가지의 부정부패사건. 증권파동ㆍ워커힐 사건ㆍ새나라 자동차 사건ㆍ바찡코 사건을 일컫는다.
  2. 농어촌고리채및정리사업(農漁村高利債整理事業) - 1961610일 농어촌고리채정리법을 공포하여 농어촌민의 생활고를 해결하려 하였던 사업. 복잡한 농촌금융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점, 조속하고 가시적인 경제재건의 효과가 필요했던 군사정부로서는 공업부문에 중점을 둘 수 밖에 없었던 구조적ㆍ현실적 조건 등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추진되지 못하고 방치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3. 물가앙등(物價昂騰) - 물건 가격이 올라 비싸지는 일
  4. 절량농가(絶糧農家) - 재해나 흉작 따위로 양식이 떨어진 농가
  5. 이농(離農) - 농민이 농사일을 그만두고 농촌을 떠남
  6. 박임항(朴林恒, 1919~1985) - 함경남도 홍원 출생. 만주 용정의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한 다음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 56기생으로 졸업하였다. 만주군 항공병 중위로 광복을 맞이한 후, 고향에서는 일본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투옥당하고 친척들의 탄원으로 석방된 다음 남하하여 여운형 밑에서 일했다. 여운형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비서로 동행했다가 북한측의 강요로 북한인민군 창설에 간여하기도 하였고, 북한의 미림자동차공장의 공장장이 되기도 하였다. 북에서의 생활은 아무래도 불안하여 1947년 월남하여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을 거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다. 516 군사정변 이후 건설부장관을 지내다가 반혁명 사건 관련으로 체포되어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19663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 뒤 한국항공정비주식회사 사장직을 지내다가 죽었다.
  7. 박창암(朴蒼巖, 1923~2003) - 함경남도 북청 출생. 만주간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간도의 조양천 초등학교에서 교사를 하다 1943년 만주국 군대인 간도특설대에 입대했다. 해방 이후 평양에서 협신공업학교 교사를 하다가 서울로 옮겨 1949년 육군 중위로 임관해 한국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1961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였으나 1963년 김재춘의 중앙정보부는 그가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발표하였다. 법정에 선 박창암은 혁명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므로 군은 당초의 약속대로 참신한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맹비난했다. 징역 13년이 선고되었으나 1년후에 형 면제처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사재를 털어 월간 자유지를 창간해 2002년까지 발행인으로 일했다. 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하던 이유립이 환단고기의 내용을 자유지에 도배하였다.
  8. 박정희는 만주의 신경군관학교를 졸업(2)하였는데, 김윤근은 신경군관학교 제6기 졸업으로 박정희의 후배라 할 수 있다. 1962년 이후 박정희는 자신의 선후배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다. 만주군 출신 중 알래스카(함경도의 별칭)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윤근은 박정희는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동문 중에서 단 한명도 육참총장을 배출하지 않았다이는 박정희가 동문 선ㆍ후배를 경계했던 것이라고 풀이했다.
  9. 정견(政見) - 정치에 관한 의견이나 견해
  10. 데마고그(demagogue) - 대중을 선동하여 권력을 획득하거나 유지, 강화하려는 정치가
  11. 뽄새 본새(어떤 행동이나 버릇 따위의 됨됨이)
  12. 정치활동정화법(政治活動淨化法) 1962516 군사정변 이전 또는 이후에 특정한 지위에 있었거나 특정한 행위를 한 자의 정치적 활동을 일정 기간 정지시키기 위하여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의하여 제정된 법률
  13. 군의 정치적중립 견지, 419 516혁명정신의 계승, 516혁명주체세력은 개인의사에 따라 군에 복귀하거나 민정에 참여할 것, 민정이양후 일절의 정치보복의 금지, 혁명 기간에 기용된 공무원들의 신분 보장, 유능한 예비역 군인의 기용, 모든 정당들은 정쟁을 지양하고 조속히 국책을 국민 앞에 내세울 것, 새 헌법의 권위를 보장할 것, 한일회담은 초당적 입장에서 협조할 것. “박의장은 이러한 아홉가지 방안에 대하여 23일까지 국내 각 정치지도자들은 수락 여부를 밝히라고 요구하고 그것이 만일 수락된다면 곧 자신은 정치지도자 및 정당대표들과 각 군책임자들의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동방안의 이행을 국민 앞에 서약토록 할 것을 제의하였다. 박의장은 만일 그가 제안한 시국수습안이 그대로 수락된다면 본인은 민정에 불참하겠다고 언명하고 몇가지 조항 해당자이외의 정정법 해당자 전원을 정치활동금지로부터 해제할 것이며 선거를 5월이후로 연기하겠다고 말하였다.” - <동아일보 1963228>
  14. 정치활동정화법(政治活動淨化法) - 군사정변을 성공한 1962316일에 박정희를 비롯한 516세력이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세력을 거세하기 위해 작성했던 개혁법안
  15. 이후락 공보실장은 박의장의 성명에 따라 정치활동금지해제에서 제외될 사람은 이승만, 장면, 이재학, 양일동, 이석기, 이철승, 박권희, 박해정, 백남권, 백인엽 씨 등 약 2백명이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박의장의 218 성명을 반대한 것과 구정치인의 해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하고 그 성명을 반대한 서민호 씨 등도 풀린다고 밝혔다.” - <동아일보 1963227>
  16. 계엄선포ㆍ군정연장 주장 이들은 227 선서 이후에도 여전히 개과천선함이 없이 구태의연한 구정객들의 정치활동을 즉시 중지시키고 혁명공약 6항은 현재로서는 실현가능성이 없으므로 군정기간을 연장하든지 박의장 자신이 민정에 참여해서라도 이를 기필코 실천할 것 등 7개 항목의 건의문을 박의장에게 건의하였다.” - <동아일보 1963315>
  17. “4년간 군정연장 가부 국민투표를 실시” - <동아일보 1963316일 호외>
  18. 케네디 회한은 서울의 미대사관을 통해 전달되었다 한다. 이 회한은 한국민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해결책이 안출되는 즉시로 한국에서 민정이양을 찾도록 하겠다고 누차에 걸쳐 천명된 미국태도를 조금도 변동시키지 않고 있다 한다.” - <경향신문 196342>
  19. 이동원(李東元, 1926~2006) -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신. 신창소학교, 송도중학교를 거쳐 조선신학교에 편입했으나 중퇴하였다. 1945년 연희전문학교 정경과에 입학, 재학 도중 미국으로 유학하여 1950년 리오그란데대학을 졸업하였다. 1952년 미국 켄트주대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58년 영국 옥스포드대학 정치학 박사학위 취득. 1962년 대통령 비서실장에 발탁된 뒤 태국대사 등을 거쳐 1964-1966년까지 외무부장관으로 복무하였다.
  20. 난맥상(亂脈相) - 가닥이나 줄기가 어지럽게 헝클어져 질서나 체계가 서지 아니한 일의 양상
  21. 김병로(金炳魯, 1887~1964) - 호는 가인(佳人). 일제강점기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항일운동 관련 각종 사건을 수임하여 항일운동가들의 변호를 자처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8년 초대 대법원장,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이 되어 195770세로 정년퇴임하였다. 1963년 민정당 대표 최고위원과 국민의당 창당에 참여하여 대표최고위원으로 윤보선, 허정과 함께 야당통합과 대통령 단일후보 조정작업 등 야당활동을 전개하였다.
  22. 이인(李仁, 1896~1979) - 호는 애산(愛山). 일제강점기 의열단 사건, 광주학생사건, 수양동우회 사건, 안창호 사건 등을 맡은 법조인. 초대 법무장관이 되었으나 이승만과 뜻이 맞지 않자 물러났다.
  23. 전진한(錢鎭漢, 1901~1972) - 호는 우촌(牛村). 1928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허일 등과 민족단일당운동을 추진하다가 일제경찰에 잡혀 신의주에서 2년간 복역하였다. 해방 이후 이승만 노선에서 반공활동을 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 초대 사회부장관등을 역임하였고, 1951년 이승만의 대변인격인 강일매와 대립한 후 이승만과 결별하고 야당활동을 하였다. 1963년 민정당에 참여하고, 한일회담을 반대하여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운동투쟁위원회에 참여, 통일문제에 관심을 쏟았으며 1967년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다.
  24. 소선규(蘇宣奎, 1903~1968) - 1929년 일본 후쿠시마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미군정하의 서울특별시부시장을 역임하였다. 민주국민당으로 제2대 국회위언에 당선, 3대 민주당 국회의원, 419 혁명 후에 초대 참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63년 민정이양을 앞두고 야당이 난립되었을 때 김준연 등과 함께 자유민주당 창당을 주도하였다. ‘한일협정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아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25. 박순천(朴順天, 1898~1983) - 본명은 명련(命蓮). 이름 순천은 독립운동 때 얻은 별명이다. 1919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과 연결되어 마산 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혀 보석으로 풀려난 뒤 도피생활을 할 때 순천댁이라는 별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1926년 니혼여자대학 사회학부를 졸업하고 28세 때 동경유학생 변희용과 결혼하였다. 1937년에 황신덕과 경성가정여숙(오늘날 중앙여자중고등학교)을 세워 부교장으로 일하였다. 광복 직후 건국부녀동맹을 조직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앞장섰으며, 1947년부터 독립촉성애국부인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서울 종로 갑구에서 대한부인회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자유당 정권과 투쟁하였고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3공화국 때는 민주당 총재를 역임하였고, 1965년 통합야당인 민중당의 당수가 되었으나, 한일회담 비준반대를 위한 의원직총사퇴의 극한투쟁결정에서 강경파인 윤보선이 탈당하자, 5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유진오에게 당수직을 물려주었다. 유신체제 출범 이후 친유신, 5공 인사로 변신하여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인 19433월경 경성의숙 학생들을 모아 놓고 정신대로 나갈 것을 종용한 것 등의 친일행적이 최근에 밝혀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26. 홍익표(洪翼杓, 1910~1976) - 193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고, 광복후 제헌의원선거에서 가평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1955년에 창당된 민주당 총무부장을 역임하였으며, 19608-9월에 내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69년 이후에는 새로이 창당된 신민당에서 활동하였다.
  27. 변영태(卞榮泰, 1892~1969) - 호는 일석(逸石). 동생은 시인 변영로, 형은 법조인 변영만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덕기 목사의 상동교회에 나가면서 이회영의 지도를 받았다.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만주 신흥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북경 부근의 협화대학을 수료하였다. 광복 이후 고려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고, 1951-1955년까지 외무부장관으로 활약하였고, 1953년에는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1963년에는 정민회(正民會)를 조직하여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변영만, 변영로와 함께 한국의 3(三卞)으로 불리었다.
  28. 인태식(印泰植, 1902~1975) - 충남 당진 출생. 1923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수료 후 1927년에 일본 야마구치 고등학교, 1930년에 도호쿠(東北)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1940년부터 경성세무감독국에 재직하였으며, 해방 후 관세청장 재무부장관(1956)을 역임하였다.
  29. 이범석(李範錫, 1922~1983) - 1942년에 평양 제2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해 1944년 도쿄의 호세이대학 예과를 수료했다. 해방 직후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편입하여 1947년 졸업했다. 다시 고려대학교 영문학과에 편입학하여 1949년에 졸업했다. 1961년 미국 메릴랜드 대학, 1963년 조지워싱턴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서리 이윤영 목사의 딸 이정숙과 결혼했다. 1976년부터 1980년까지 인도대사로 활동했으며 1980년 국토통일원 장관, 1982년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 외무부장관이 되었다. 1983년 전두환 대통령 동남아 순방 때 아웅산폭탄테러 사건으로 순직했다.
  30. 이윤영(李允榮, 1890~1975) - 호는 백사(白史). 1907년 숭덕중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평양 숭실사범학교를 졸업, 협성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여 1916년에 목사가 되었다. 1916년 평남 순천의 신창교회 목사와 일신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루고, 1921년부터 1928년까지 황해도 배천교회를 시무하였다. 해방 직후 조만식 등과 함께 조선민주당 창당에 참여, 1946년 월남했다. 이승만이 남북통일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초대 국무총리로 인준을 요청했지만 한민당계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조선민주당 소속으로 3, 4대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419 혁명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목회와 강연활동을 하다가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연장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 국민의당 최고위원을 맡았다.
  31. 이동화(李東華, 1907~1995) - 호는 두산(斗山). 평남 강동 출생. 1936년 도쿄제국대학 법문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1941-1943년까지 좌익지하운동사건으로 투옥되었다. 광복 이후 여운형의 건준에 합류하였다. 1947년 김일성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했으나 공산체제에 희외를 느끼고 한국전쟁 때 월남하였다. 경북대학교 교수(1952), 성균관대학교 교수(1954) 등을 거쳤고,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무죄 방면되었다. 1960년 동국대학교 교수에 취임하였는데,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혁신계 전면 엄단조치에 의해 1962년 구속되었다가 1964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0월 유신 후 정당에서 손을 떼고 민주회복운동과 통일운동에 주력하였다.
  32. 김달호(金達鎬, 1912~1979) - 경북 상주 출생. 일본 쥬오대학교 법학부 중퇴,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광복 뒤 서울고등검찰청 차장검사를 역임하였다. 1954년 고향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2공화국에 사회대중당을 결성하였고, 한국의 보수정치체계에서 혁신정당의 정착을 위해 노력했다. 516 군사정변이후 군사혁명재판소에서 15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총독부 판사를 지낸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었다.
  33. 윤길중(尹吉重, 1916~2001) - 호는 청곡(靑谷). 1930년 원주문막보통소학교, 1937년 경성법정학교, 1939년 일본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했다. 1941년 전라남도 강진군수, 1943년 무안군수로 재직하고 1945년부터 총독부 학무국 사무관으로 종사했다. 해방 후 국민대학교 교수(1946~1950), 2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무죄선고를 받았다. 1960년 사회대중당 결성을 주도했고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혁신계 정치인들에 대한 탄압과정에서 19684월까지 7년간 복역했다. 출소 후 박정희 정권 반대운동에 참여하여 신민당에 입당하여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1980년 이후 여당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등록되었다.
  34. 서상일(徐相日, 1886~1962) - 호는 동암(東菴). 대구 출신.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합하자 ‘9인결사대를 조직하여, 민족의 강경한 반일의지를 담은 선언문을 서울에 있던 각국 공사에게 돌린 뒤 전원이 할복자살을 계획했던 세칭 ‘9공사사건을 일으켰다. 대구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투옥되었다. 광복 후 한민당에 가담하였으며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56년 진보당 창당에 참가햐였고, 1960년 사회대중당을 창당해 대표총무위원으로 취임하였다. 1961년 사회대중당이 분열되자 재야혁신세력을 정비, 결집하여 통일대중당을 발기하였으나 516으로 무산되었다.
  35. 최근우(崔謹愚, 1897~1961) - 경기도 개성 출신. 28 독립선언에 서명한 조선인 유학생 11인 중 한 사람이다. 여운형을 따라 상해 임시정부로 옮겨서 임시정부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독일과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하였다. 해방 이후 건준에 참가하였으며,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권유를 거절하였다. 419 혁명 이후 진보정당인 사회당을 창당하였으나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체포, 구속되어 옥사하였다.
  36. 이훈구(李勳求, 1896~1961) - 호는 심당(心堂). 충남 서천 출신. 수원농림학교를 거쳐 1924년 일본 동경대학 농학과 3년간 수료 후, 도미하여 1927년 캔자스주립농과대학 대학원을 수료하고, 위스콘신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30년 난징으로 가서 금릉대학 교수가 되고, 이듬해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지내다가 1938년 조선일보사 주필 겸 부사장이 되었다. 광복 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단국대학장, 성균관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419 혁명 후에 민주사회당을 창당하였다.
  37. 장건상(張建相, 1883~1974) - 호는 소해(宵海). 게일(Gale) 목사에게 영어를 배우고, 1905년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다가 미국 공사관 밑에서 군사훈련을 받다가 퇴학당하고 게일 목사의 추천으로 1908년 발프레드 예비학교를 거쳐 인디애나주립대학 법학과에서 공부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외무차장이 되었고, 레닌과 접촉하며 코민테른과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사이의 연락업무를 담당하였다.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혁명지를 간행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여운형계의 조선인민당과 근로인민당에서 활동하였고, 1950년 선거에서 옥중에서 전국 2위의 최다 득표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 뒤에도 혁신적인 정치세력으로 남아 당국의 주목을 받던 중 간첩 박정호 사건과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풀려났다. 516 이후 혁신당 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노령을 이유로 석방되었다.
  38. 해방 이후 김성숙이라는 정치인은 두 명이 활동하였다. 제주 출신의 김성숙(金成淑)과 평북 철산 출신의 김성숙(金星淑, 승려).
    1) 김성숙(金成淑, 1896~1979) - 호는 회을(悔乙). 제주 출생.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경제과를 마치고 귀국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1955년 조봉암 등과 함께 진보당 창당 추진위원으로 혁신계에 가담한 뒤, 1960년 전진한과 한국사회당을 창당하고 729 국회의원 총선거 때 제5대 민의원으로 남제주에서 당선되었다. 이듬해 중도 혁신계 연합의 통일사회당을 창당하여 활동을 하려던 중 516 사태로 구속되고 정당은 해체되었다. 19622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의 선고를 받았다. 그 뒤 계속해서 민주사회주의 정당을 결성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2) 김성숙(金星淑, 1898~1969) - 호은 운암(雲巖). 19세 때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하여 성숙(星淑)이란 법명을 받았다. 양주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의 형을 받았다. 192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장건상 등과 함께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명을 발간하였으며, 신채호, 유우근 등의 추천으로 조선의열단에 가담하였다. 1938년 김원봉과 함게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고, 1942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다. 광복 이후 여운형, 장건상 등과 함께 행동하였다. 1955년에 조봉암, 서상일 등과 접촉하였으며, 1960419 혁명이 일어나자 사회대중당을 창당하였으며 통일사회당으로 통합하여 활동하였다. 516 군사정변후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10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1966년 재야통합야당인 신민당에 참여하였다.
  39. 정화암(鄭華岩, 1896~1981) - 본명은 정현섭(鄭賢燮)이고, 호는 화암이다. 전북 김제 출신으로 31운동 때 고향에서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고 1928년 이회영, 신채호 등과 무력투쟁방법을 공유하였다. 1930년 흑색공포단을 조직해 무력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해방 이후 통일사회당으로 활동하면서, 1960년 총선거에 입후보했지만, 선거과정에서 무정부주의자로 공격받았으며 민주당 조한백 후보에게 석패하였다. 516 군사정변으로 붙잡혀 6개월간 옥살이를 하였다. 1969년 삼선개헌반대 투쟁에 참여하였고,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40. 구익균(具益均, 1908~2013) - 평북 용천 출신. 1928년 신의주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29년 신의주 학생 의거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중국 상하이로 피신해 조소앙 등이 결성한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였고, 흥사단에 가입하여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역임하였다. 광복 이후 진보당(1952) 창당에 관여하였고, 1960년 사회대중당, 1961년 통일사회당에 참여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용공인사로 낙인찍혀 1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1964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에 참여했으며, 1967년 통일사회당 재건에 참여했다. 2013년 국립묘지 안장을 둘러싸고 국가보훈처에서는 1972년 사문서 위조, 1973년 조세처벌법 위반 등을 이유로 취소를 통보했으나, 군사정권의 과도한 집행 등이 입증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41. 송남헌(宋南憲, 1914~2001) - 경상북도 문경 출신.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지냈다. 일제강점 해외소식을 친지들에게 전한 것 때문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1942년 단파방송 밀청 사건). 광복 후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원세훈의 추천으로 김규식의 비서실장으로 활동하였다. 좌우합작위원회가 설립되자 한국민주당을 탕당하여 김규식의 민중동맹에 입당하였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박정희 정부에 의해 좌익으로 몰려 투옥되었다. 이후에 송남헌은 근현대사 연구가로 일생을 보낸다.
  42. 유병묵(1910~1988) - 함경남도 흥원군 출생. 1928년 일본인 교사 배척을 주도하다가 퇴학을 당하고,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대학 법학과와 일본대학 철학과를 다녔다. 그리고 두 살 아래인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고 1941년에 귀국하였다. 해방 후 여운형과 함께 활동하였고, 중앙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1957간첩 박정호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고, 419 직후에 사회대중당에 참여하여 제자들이 피로써 쟁취한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729 선거에서 패배한 뒤에 사회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516 군사 정변 이후 1968년까지 도피 생활을 하였으며, 사회과학서적을 익명으로 번역하는 일로 경제활동을 하였다. 1979년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43. 정구영(鄭求瑛, 1899~1978) - 호은 청남(淸嵐). 충북 옥천 출신. 1910년 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 1911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상과, 1919년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하였다. 1920년 판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한 후 검사를 거쳐 1925년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자유당 정권에서 반정부적인 재야법조인으로 활동하였는데, 이승만 정부의 보복이 두려워 변론을 기피하던 서민호 사건을 맡아 변호하기도 하였다. 1960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마신 시민에 대한 경찰의 발포에 대해서 대통령 하야와 재선거촉구성명을 발표하였다. 1961516 쿠데타 이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박정희가 3선개헌을 추진하자 반대하였고 유신헌법까지 등장하자 1974년 민주공화당을 탈당하였다. 월남파병도 소신껏 반대했다고 한다.
  44. 김정렬(金貞烈, 1917~1992) - 서울 출생. 1935년 경성공립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 항공과를 졸업(1941)하고 태평양 전쟁에 참가하였다. 해방 이후 초대 공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57년 국방부장관이 되었다가 419 혁명으로 물러났다(419 당시에 미국과 이승만 대통령의 협상을 중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에게 발탁되어 1963년 민주공화당 초대의 장이 되었고, 주미대사로 임명되어 월남파병에 대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 국무총리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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