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116) 5ㆍ16 군사반란 1961 - 시행착오 투성이

시행착오 투성이

 

박정희 권력구조 안에서 장도영, 송요찬, 김현철[1] 등의 내각 수반들이 강권을 휘둘렀었지만 집권 2년도 못되어 정치, 경제, 사회면에서 명백한 파탄을 보게 됐다.

 

박정희는 모든 면에서 이 필요했다. 밑천 안 들고 돈 잘 벌어지는 장사는 섹스공매다. 그의 입후보 비밀공작에는 돈이 무척 든다. ‘덕망’(德望)제로에 가까운 은 부패 전술과 폭력 탄압에 의존할 밖에 없었다. 그의 비밀공작에는 섹스만병수처럼 쓰여진다고 했다. 인간성의 환부에 병균을 주사하는 것이랄까? 썩여서 먹고, 먹고서 썩는 독살과 독사의 멸망 전술이다.

정치를 하려면 정치자금이 필요하다고 그들은 선전한다. ‘권력은 금맥(金脈)이다.

권력의 줄로 돈을 다그친다. ‘의리윤리고 없다. “돈이 말한다”, “먹구 보자!”, “법도 권력의 시녀다.” 그래서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운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 이것이 그가 전 국민에게 외친 표어였다.

 

그것도 먼 장래에 잘살게 될 거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당장 백만장자의 졸부가 된다는 욕심이다. 맹자가 말한 바와 같이 윗사람, 아랫사람이 서로 이()에만 미쳐 돌아가는 현상이 빚어질 것이며 따라서 인간성은 묵사바리처럼 썩어빠질 것이다.

소위 4대 의혹사건이 그 첫 열매라 하겠다.


[각주]

  1. 김현철(金顯哲, 1901~1989) - 1922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학과를 나온 후 도미 유학, 1927년 린치버그 대학교 경제학과 학사과정을 마치고, 1932년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석사 학위, 1933년에 아메리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55년 농림부차관, 재무부장관, 1956년 부흥부장관, 1957년 재무부장관 등을 지냈다. 군사 정변 이후 다시 요직에 등용되어 1962년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냈다. 1964년부터 1967년까지 주미한국대사를 지내고 귀국하여 516장학회 이사장(1969), 헌법위원회 위원(1973~1979), 국정자문위원회 위원(1980~1989)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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