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119) 5ㆍ16 군사반란 1961 - 대한일보 논설도 쓰고(1962)

대한일보 논설도 쓰고

1962

 

나는 비교적 조용하게 수유리에 은거(隱居) 했다.

그렇다고 동면(冬眠) 상태였던 것은 아니다.

설교 부탁은 여기저기서 거의 매주일 되었다. 교회 창립기념예배니, 누구의 환갑잔치니, 목사위임식이니 하는 등등의 교회 행사에는 거의 빠짐없이 초청된다. 약혼식, 결혼식 주례로서의 빈도도 상승한다.

신문 잡지 등에서 잡문부탁도 온다.

친구의 유혹이 있으면 명산 대천에 관광도 간다. 말하자면 유유자적(悠悠自適)[1]이다.

하루는 황혼이 짙어 컴컴한 수유리 내 장막에 김연준 대한일보[2] 사장이 찾아왔다. 그는 나를 늘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선생님, 대한일보 논설위원으로 모시고 싶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사설은 신문사로서의 주장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제가 신문을 맡은 바에는 사설이 독특한 데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설이 시사(時事)의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며 구차한 콤멘트나 하는 정도라면 또 하나의 신문을 경영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정치구 경제구 문화구간에 도의’(道義)가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저는 도의사설을 꼭 넣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밖에는 부탁드릴 분이 없습니다. 며칠에 한 번씩 잠시 들러 주십시오, 그때는 제가 제 차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 바쁜 시간에 이렇게 먼 길을 찾아주셨는데 거절하기 죄송합니다만, 그러면 가담가담[3] 잡문이라도 적어 보내겠습니다. ‘사설은 너무 어마어마하구요.”

그는 꼭 논설위원으로 모시겠습니다하면서 떠나갔다.

그때 마침 내가 강원도 정선지방을 탐승[4]한 일이 있었기에 그 기행문 비슷한 걸 적어 보냈더니 그 비좁은 지면을 계속 할애해 주었다.

 

얼마 지나서 그는 또 밤에 찾아왔다. 말하는 도중에 라디오에서 중대방송이 있다면서 진행 중의 프로를 중단한다. 우리도 잠시 얘기를 중지했다. ‘통화개혁이란 것이다.[5]

손해 당할 조건은 없습니까?” 했더니 자기에게는 아무 영향도 없다면서 태연했다.

그럭저럭 나는 대한일보가 KCIA에 의하여 폐문될 때까지 10년 동안 논설위원 책임을 계속했다. 그야말로 날마다 잠시 들르는 정도였지만 논설위원 회의에는 꾸준하게 참여했다.

그때 논설위원으로서는 강영수[6](주필), 주요한[7](회장), 허우성, 한태연[8], 신상초[9], 조동필, 엄요섭, 김은우[10], 민병기[11](후기에) 등등이었다. 모두 야당적인 평론가들이었지만, 강영수 주필만은 치밀한 신중론자로서 가시 돋친 단어를 매끈하게 갈아 넣는 명수였다.


[각주]

  1. 유유자적(悠悠自適) - 속세를 떠나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며 편안하게 삶
  2. 대한일보(大韓日報) - 한양재단에서 평화신문을 인수하여 1961년에 창간한 일간신문(1973년 폐간). 이 신문은 한양대학교가 건학정신으로 삼은 사랑의 실천을 사시(社是)의 첫째로 내세우고 시시비비(是是非非)에 입각한 엄정중립의 기치를 표방하였다.
  3. 가담가담 - ‘이따금의 북한어
  4. 탐승(探勝) -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님
  5. 화폐개혁 10원을 1원으로” - <경향신문 1962610>
  6. 강영수(姜永壽, 1912~1997) - 호는 백담(白潭). 경기도 개성 출생.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경성일보, 동아일보, 한성일보, 대동신문, 서울신문, 중앙일보, 경향신문, 평화신문 등을 두루 거치고 대한일보 전무겸 주필로 활동하였으며, 기독교신문 사장을 역임했다.
  7. 주요한(朱耀翰, 1900~1979) - 평남 평양 출생. 개신교 목사였던 주공삼의 맏아들이며, 소설가 주요섭의 형이다. 1912년 평양 숭덕소학교, 1918년 일본 메이지학원 중등부, 1919년 도쿄 제1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19창조불놀이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이후 전향 선언을 하고 친일 행각을 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됐다가 풀려났으며 1950년 조만식을 중심으로 창당된 조선민주당 선전부장과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1960년 민주당 장면 내각에서 부흥부ㆍ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8. 한태연(韓泰淵, 1916~2010) - 호는 율산(栗山). 대한민국 법조인, 정치인. 함경남도 영흥 출생. 일본 와세다대학 법하과, 영남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 및 박사과정을 졸업하였다. 광복 이후 성균관대학교, 서울대학교, 동국대학교에서 법학을 가르쳤다. 대한일보 논설위원도 겸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을 도와 유신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9. 신상초(申相楚, 1922~1989) - 평북 정주 출생. 1935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 후쿠오카고등학교 문과를 마친 뒤, 동경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했으나 1944년 일본 학병으로 중국전선에 배치된 후, 탈출하여 조선의용군 일원으로 항일전쟁에 참가하다 광복을 맞았다. 해방 이후 20여년간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활동을 계속하였다. 언론활동을 활발하게 하였으며, 1954년부터 죽을 때까지 흥사단 활동을 하였다. 1공화국 때부터 사상계를 통하여 반정부 계열의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유신체제에 협력하였으며 제5공화국 정권에 협력하였다.
  10. 김은우(金恩雨, 1916~1999) - 서울 출생. 김종우 목사(기독교대한감리회 초대 감독)의 차남. 배재고등보통학교, 연희전문학교 문과, 일본 릿교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미국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언론인 강영수, 조풍연, 사학자 홍이섭, 법학자 이항녕 등과 교유하였다. 1945년부터 1981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가르쳤다. 대한일보 및 경향신문 논설위원, 세계일보 사장, 배재학당 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1. 민병기(閔丙岐, 1927~1986) - 서울 출신. 민영환의 증손이다. 1949년 고려대학교 법정대학 졸업, 도미하여 매크리대학과 시카고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였고, 1956년부터 1970년까지 고려대학교 강단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경향신문과 중앙일보사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73년 민주공화당에 참여하면서 정치계에 발을 내딛었다. 1979년 주프랑스대사 겸 주모로코대사로 임명되었고, 1983년부터 인천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