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122) 5ㆍ16 군사반란 1961 - 기자들에 대한 탄압

기자들에 대한 탄압

 

기자들의 보도망을 졸라맨다. 정부 각 부서 출입기자는 그 부서에서 발표하는 기사 이외에는 아무 것도 쓰지 못한다. 기자들의 특종기사’, 일본말로 독구다네’(特種)[1]는 없다. 지방기사를 못 쓴다. 어떤 사건을 기사화 했을 경우에는 객관적인 증거재료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기자들은 걸핏하면 끌려 가 개 패듯 두들겨 맞는다. ‘부아가 난다. ‘발산할 고장은 대포집’, 술집이다. 사내(社內) 편집기자들도 마찬가지다. 기껏 정성들여 쓴 에세이가 편집국장 손에서 빠져버린다. 윤전기[2]에 들어가기 바로 전에 CIA 검열관이 현장에서 지워버린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천관우[3]는 비밀리에 준비했던 자기 논설을 CIA 검열통과 직후에 감쪽같이 윤전기에 넣는다. 그런 기습이 성공하는 일도 없지 않았다.

천관우는 동아일보 전무이사이기도 했다. 몇 번이고 문초를 당했다. 그러나 그도 끈덕졌다. 경찰에서는 광고주들을 공갈해서 광고 원()을 막았다. 광고는 신문경영의 생명선이다.

마감판에는 동아일보 사장 고병욱을 연행했다. 천관우를 전무이사 자리에서 축출하라는 지령이었다. 순하디 순한 그도 부아[4]가 났다.

아예, 당신들이 다 맡아 하시오!”

이 자식, 우리가 언제 신문을 하지 말랬나? 어디 맛 좀 볼래?”

50이 지난 늙은이가 실컷 두들겨 맞고 겨우 풀려 나왔다. 그는 천관우에게 고충을 호소했다.

그래도 나가란 말은 차마 못한다.

정치깡패가 동원됐다. 천관우가 퇴근할 즈음에는 동아일보 현관 앞에 수십 명 악당들이 어깨를 재면서 슬쩍 쳐다본다. 옆구리를 툭 다치며 뒤를 따른다. 어느 밤중의 길가에 시체가 되어 어느 술집 컴컴한 길가에 버려질지 누가 알 것인가? 그런 경우에는 검시도 안한다.

술 주정꾼이 넘어져 죽었다로 끝난다.

동아일보에서는 그런 일을 이미 경험했었다.

동아방송에서 방송프로와 방송극 창작으로 이름났던 젊은 작가 조동화가 밤중에 두들겨 맞고 다방골 술집 앞에 시체같이 버려졌던 사건 말이다.[5] 가족들이 찾아 돌아다니다가 발견해서 동사(凍死) 직전에 살아났지만, 그의 작가 활동은 일시 중단될 밖에 없었다. 그는 전영택 목사의 사위다.

결국 천관우도 동아일보를 사면했다.


[각주]

  1. 特種(とくだね, 토쿠다네) - 신문 등의 특종기사
  2. 윤전기(輪轉機) - 원통형의 판면과 이와 접촉하면서 회전하는 인압 원통 사이에 둥글게 감은 인쇄용지를 끼워 인쇄하는 기계
  3. 천관우(千寬宇, 1925~1991) - 호는 후석(後石). 충북 제천 출생. 1937년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며, 1944년 경성제대 예와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학부에 진입하면서 한국사를 전공했다.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 1951년 대한통신 기자로 일하면서 언론계에 투신하였다. 1952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네소타대학 신문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54년부터 한국일보, 조선일보 등을 거쳐 1968신동아필화사건으로 그만두기까지 언론계의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그 뒤 3선개헌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가 가시화됨에 따라 반독재ㆍ민주화운동에 주력하였다. 유신체제 속에서는 감시와 탄압이 심해서 칩거하며 한국사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전두환 정권하에서 관직을 맡게 되면서 변절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4. 부아 분하고 노여운 마음
  5. 조동화(趙東華, 1922~2014) - 함북 회령 출신으로 서울대 약대를 졸업한 후 1963년 동아방송에 입사하였다. 동아방송 재직 시 이른바 1964앵무새 사건1965테러 사건을 겪었다. 장공이 언급한 사건은 196598일 새벽에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몰매를 맞은 사건으로 갈비뼈가 세 군데나 금이 갔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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