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4일 목요일

[범용기 제2권] (2) 해방 직전 “일제”의 발악상 - 서울 목사들의 수난

서울 목사들의 수난

 

19404월이었다. 조선신학원은 자리잡혀갔다. 이 사건은 조선신학원이 발족[1]한 해 2학기 때였다고 기억된다. 설립자 김대현[2] 장로님이 숙환[3]인 천식[4]증으로 별세[5]하셨다.

서울 교계에서는 장례식이라도 성대하게 해 드리려고 합의되어 초교파적으로 장례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래서 식순까지 작성되었다. 그런데 장례식 이틀 앞두고 시내 목사 40여명이 피습 연행되었다.

윤인구[6] 목사도 같은 그물에 걸려 갔다. 새벽 4시에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담장을 넘어 침입했다고 한다. 나는 도롱에 있었는데 일찍 출근해 보니 사태가 그 꼴이었다. 상주들과 의논하고 장례는 예정대로 진행시키기로 했다. 집례 순서에 든 각 교파 목사들 대신에 같은 교파의 장로들로 순서를 메꿨다. 남아 있는 목사라곤 나밖에 없다. 그래서 총집례자로서는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새로 된 장례위원들을 소집하여 의논하고 결정했다. 장지는 고인의 소유 임야인 관악산 뒷기슭에 이미 준비돼 있었다.

장례식 날 아침에 남대문 밖 교회 김영주[7] 목사가 석방돼서 예식에 참여했으나 순서를 드는 것은 사양했다.

장례식 다음날부터 공부를 계속했다. 일본인으로 약초정 교회 목사인 야마구찌강사가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왔다.

이럴 땔수록 더 극성스레 일해야 합니다하고 격려했다.

나는 전체 학생을 합반하여 구약, 신약, 교회사, 목회학 할 것 없이 하루에 다섯 시간씩 연속 강의했다. 얼마든지 계속할 것 같았다.

하루는 종로경찰서 가나자와”()란 신학원 담당 형사가, 강의 중의 나를 불러낸다. 경찰서로 가자는 것이었다. 따라 갔다. 지하실로 갔다. 벽에 고문하는 도구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구석에 작은 취조실[8]이 있다.

당신, 신령회에 들어 있지요?”

“‘신령회란 금시초문인데요.”

교회 지도자로서 신령회를 모른다니 말이 되오?”

말이 되든 안되든 모르니 모른달 수밖에 있소?”

당신도 들어가야 하겠소.”

그거야 당신네 권한이니까, 끌어가면 끌려가는 것이지요.”

그럼 올라갑시다.”

그럼 올라갑시다.”

 

이번에는 고등계[9] 주임실 낭하[10] 의자에 앉혀 놓고 자기는 주임실로 들어갔다.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 나와서야 안 일이지만 학생들이 울근불근[11], 몹씨[12] 흥분했던 모양이다. 학생이래야 1, 2학년이니까 청년에서 중년에 든 전도사, 장로로서의 베터란[13]이다. 장희진[14], 오덕유[15] 등이 그때 졸업반이었다.

 

결국 가나자와형사는 주임실에서 나왔다.

당신도 의례 잡아넣어야 할 것이지만, 당신까지 없어지면 학생들이 흩어져서 제각기 자기 고향에서 유언비어[16]를 퍼뜨려 민심이 소란하게 될 우려가 있으니까 당신을 돌려보내는 거요. 나가서 수업을 계속하더라도 말조심하고 무슨 일이 생기는 대로 연락하시오!” 한다.

나는 말없이 나왔다. 학생들의 환호성은 대단했다.

 

서울 목사들이 40일 동안 갇혀 있었다. 심문도 조서 작성도 없었단다. ()를 꺾으려는 일종의 시위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모두 나왔다.

그 후부터 목사들 동지섣달[17]에 우이동에 끌고 가서 신도수련이랍시고 알몸에 얼음냉수를 퍼붓고 동방요배[18] 시키고, 못하는 일이 없게 됐다. 윤인구는 넉넉한 집안에서 고생 없이 자란 사람이라 유난스레[19] 온유[20]해졌다.

한번은 국학원대학[21]을 졸업했다는 조선인이 피어선 성경학교 강당에서 신도강의를 한다고 시내 목사들을 모두 모이라 했다.

다 갔다. “‘신도만이 아니라, 일본의 종교는 모두 호국종교. 기독교도 예외일 수는 없다. 조선의 기독교가 살아남으려면 대일본제국의 호국종교로 돼야 한다. ‘황도일시동인[22], ‘팔괭일우[23] 정신이다.”

그때 이 모임의 주최자는 감리교 총리원의 이동욱[24]이었다. 변홍규[25]통리였으니까 제절로[26] 말려들었던 것이다.

폐회하고 나올 때, 김영주 목사는 개새끼 개소리치고 있다”, “다시는 이런데 안 온다!” 하며 잔뜩 성이 났었다.

 

그런데 서울 목사들은 우이동에서의 미소기’(淨潔札)[27] 훈련에서 성적이 좋았다는 평가 때문에 점차 더 깊이 말려들게 됐다. 모두 부여신궁[28] 건축공사에 끌려갔다. 머리를 빡빡 깎고 합숙하면서 본격적인 신도 수련을 받았다. 거기서도 성적이 우수했단다. 그래서 이번에는 집단으로 일본 전국에 중요한 신사, 신궁에 모조리 순례하게 했다. 성직자, 하느님의 사자로서 무던히 욕 본 셈이다.

 

그런데 어느 경우에도 내게는 도대체 말이 없다. 왜 그랬을까? 지금도 나는 그 내막을 잘 모르고 있다.

나는 만주의 동만노회[29]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동만노회원이 됐다. 내가 서울에 옮긴 후에도 동만노회원으로 있었다. 얼마 후에 만주의 기독교 각교파가 합하여 만주기독교회가 되고 동만노회는 발전적으로 해소됐다.

그때 동만노회에서 내게 문의해 왔다. 그대로 만주노회원이 되겠느냐, 지금 서울에 있으니 경기노회에 이명하려느냐, 본적지 교회에 옮기겠느냐? 속히 회답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함북노회에 이명해달라 했다. 그래서 함북노회원이 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울에 거주하기 때문에 함북노회에서는 부재회원’(不在)으로 돼 있었다.

내가 서울 노회원이 아닌한, 서울노회로서 내게 행동통일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 함북노회로서는 부재회원에게 노회로서의 실무를 요청할 수가 없다. 내게는 조선신학원 이사회의 결의에 복종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초연했고 다른 분들도 그렇게 알고 나를 제외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건 나의 추측이다. 다른 어떤 사회적 이유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신앙적으로 본다면 하느님이 어떤 미래를 위하여 나를 예비역에 넣어둔 것이 아닐까도 생각된다.


[각주]

  1. 발족(發足) - 어떤 조직이나 모임이 새로 만들어져 활동을 시작함
  2. 김대현(金大鉉, 1873~1940) - 장로. 교육자. 187357일 경북 영일군 흥해(興海)면에서 출생. 유교가정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흥해 지역의 교육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후에 서울로 이주하여 동대문구의 창신교회에 출석하다가 승동교회에 적을 두게 되었으며 1923년 장로로 장립되었다. 그후 19393, 조선신학교설립위원회가 조직되었을 때 거액의 재산을 기부하기로 약속하여, 그 일을 가능케 했다. 그는 부동산 소개업을 통하여 얻은 수입의 십일조를 별도로 저축하고, 그 통장의 저축인 이름을 김필헌(金必獻)이라고 명명했다. 그 이유는 그 저금통장의 돈은 반드시 하나님께 바친다는 약속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전에도 이미 여러 개척교회들의 전도비를 헌금으로 보조하기도 했는데 그가 조선신학교 설립재단과 운영비를 위하여 바친 액수는 그 당시 일화로 30만엔(미화 25만불)이었다. 당시 교회 내적으로는 조선신학원 설립이 외래 선교사들에 대한 반역이며, 심지어는 신앙적 배교행위라고까지 생각하는 목사들의 반발이 있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조선신학원 폐쇄를 희망한 일부 교계지도자들의 요청을 들어 일본관헌은 김대현 장로에게 강요하여 조선신학원 경영에서 손을 떼도록 압력을 가했고, 해마다 갱신해야 하는 경기도지사의 인가를 받지 못하게 방해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억압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그가 숙환으로 1940915일 별세할 때까지 신학원을 지켰다. 바로 이 무렵 서울시 일대에 걸쳐 교계인사들을 일경이 연행해 가던 때였는데 김대현 장로 사택에 일경이 수색하러 왔다가 그가 별세한 것을 알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었으나 함태영ㆍ송창근ㆍ김재준 등의 신학교육사업의 이상에 적극 호응하여 그의 재산을 희사하고 그리고 친히 신학원을 경영하였다. 그의 이러한 의지와 행동은 비록 평신도였지만 한국교회 신학교육의 새로운 발전에 대한 강한 신념의 표현이었다. 유해는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선산에 모셨으나, 한신대학교 측이 서울캠퍼스 교정에 모시겠다고 요청하여 2003429일 서울캠퍼스 교정으로 이장하고 추모예배를 드렸다.
  3. 숙환(宿患) - 오랫동안 앓은 병
  4. 천식(喘息) - 주기적으로 호흡 곤란을 일으키는 병
  5. 별세(別世) - 윗사람이 세상을 떠남
  6. 윤인구(尹仁駒, 1903~1986) - 해방 이후 부산사범학교 초대 교장, 부산대학교 초대 총장, 연세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종교인. 1926년 메이지학원 신학부를 거쳐 1931년 영국 에딘버러 대학원 수료. 1941년 조선신학원 개설하교 교장이 되었으나 일제 탄압으로 사임. 해방 이후 미군정하 경상남도 내무국 학무과장으로 부임, 부산대학을 개교시키고 1953년 부산대학교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켜 초대 총장으로 부임하였다. 1961년 연세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7. 김영주(金英珠, 1896~1950) - 일제강점기 서울 남대문교회, 새문안교회에서 목회한 목사. 호는 해암(海巖). 일본의 간사이(關西)학원 신학교를 졸업(1932)하고 남대문교회를 시무하던 중 창세기 저자 문제로 제23회 총회에서 문제가 되어 해명하었다. 1939년 조선신학원 설립기성회에 가담하였으며, 1943년 일제의 어용기구 조선혁신교단을 반대하여 전필순을 사임케 하여 혁신교단을 와해시키는 일에 공을 세웠다. 1944년 새문안교회에 부임한 후 남부대회를 소집하려고 노력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시대에 서울시 행정의 고문격인 참사(參事)로 있다가 1950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8. 취조실(取調室) - 죄인이나 범죄 혐의자를 조사하는 데 쓰는 방
  9. 고등계(高等係) - 일제강점기, 일본이 한국인의 독립운동 및 정치적, 사상적, 문화적 움직임을 감시하고 탄압할 목적으로 둔 경찰의 한 부서를 이르던 말
  10. 낭하(廊下) - 건물 내부의 긴 통로
  11. 울근불근 감정이나 성격이 평온하지 못하고 성을 내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12. 몹씨 더할 수 없이 심하게. 규범 표기는 몹시이다.
  13. 베테랑(vétéran) - 한 분야의 일을 오랫동안 하여 그 일에 관한 지식이나 기능이 뛰어난 사람
  14. 장희진 목사는 조선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1949년 한일교회, 1963년 한남교회(2대 목사) 등을 시무하였으며 1975년 은퇴하였다.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였으며(상항장로교회), 1983년 북한을 방문 후 미주에 돌아와 통일 문제 등을 강연하기도 했다.
  15. 오덕유 목사는 조선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보광동교회 등을 시무하였으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였다.
  16. 유언비어(流言蜚語) - 아무 근거 없이 널리 퍼진 소문
  17. 동지섣달 음력으로 11월인 동짓달과 12월인 섣달을 아울러 이르는 말
  18. 동방요배(東方遙拜) - 일본신도(神道)에서 현인신(現人神)으로 섬기는 일왕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해 절하는 의식. 조선총독부는 19382월에 이 의식을 한국교회에 권고하였다.
  19. 유난스레 말과 행동이 보통과 다르게
  20. 온유(溫柔) -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
  21. 고쿠가쿠인대학(國學院大學, Kokugakuin University)은 도쿄도 시부야구에 위치한 일본의 사립 대학이다. 1920년에 설치되었다. 고쿠가쿠인대학의 정신은 초대 학장이 제창한 공식 성명서에 함축되어 있다. 다카히토 태자, 아리스가와노미야, 그리고 하가 야이치 학장은 그후에 고쿠가쿠인대학의 교가의 작사에 그 이상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광대와 청순을 전망으로, 시부야의 언덕에 대학이 서다. 고금의 서적을 탐구하고, 이 땅의 근원을 떠받자. 외국들의 장점을 찾고 우리의 부족함을 보완하자. 어찌 잊으리 근본의 가르침을 근본의 정신을 닦으며. 학문의 장소 그 배움의 갈림길에서, 고쿠가쿠인의 높은 선언 선조들의 길이 여기 우리와 함께, 자손들의 길이 오늘 우리와 함께.”
    달리 말하자면 고쿠가쿠인대학은, 바탕에 흐르고 있는 일본 전통의 문화와 일본의 정신을 탐구하고 전수하는 한편, 동시에 다른 나라의 학문의 개발을 독창적으로 수용한다는 두 가지 사명으로 건학된 배움과 가르침의 장소이다.
  22. 일시동인(一視同仁) - 멀거나 가까운 사이에 관계없이 친하게 대해 준다는 뜻으로, 성인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함을 이르는 말
  23. 팔굉일우(八紘一宇) - 온 세상이 하나의 집안이라는 뜻으로, 일본이 침략 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내건 구호
  24. 이동욱(李東旭, 1897~1949) - 감리교 목사. 1915년경 선린상업학교를 졸업, 19194월 한성임시정부 수립 국민대회 13도 대표자로 선정되었다. 1921년부터 1924년까지 독립운동 가담 혐의로 수감되었다. 1927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미아리교회, 동대문교회에 시무하였다. 1930년대 이후 친일행적을 보였으며,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했다.
  25. 변홍규(卞鴻圭, 1899~1976) - 충남 공주 출신. 1919년 덕화서원을 졸업하고 1926년 미네소타주 헴린(Hamline)대학과 1928년 드류(Drew)신학교를 졸업했다. 1931년 드류신학교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교회(1931~1933), 만주 하얼빈교회(1933~1934)에서 사역하다가 1934년 귀국하여 감리교 신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1939년 한국인 최초로 감리교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나 1940년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감리교삐라사건으로 정일형(鄭一亨) 등과 함께 구속되기도 하였다. 1942년 통리사로 선출되었는데 이때 일제의 전시체제 협조를 당부하고 비행기 헌납을 청원하여 물의를 빚었으며, 기독교신문에 친일적 설교문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해방후 감리교 재건파의 지도자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1970년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26. 제절로 - ‘저절로의 방언
  27. 미소기(みそぎ) - 목욕재계, 자신의 죄와 부정 그리고 나쁜 액운 등을 깨끗하게 씻어 내기 위해 강물이나 냇가에 들어가 몸을 씻는 행위
  28. 부여신궁(扶餘神宮) - 일제강점기에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건축 공사 중이었던 신토의 신사이다. 부여신사(扶餘神社)라고도 불렀다. 1943년 완공될 예정이었으나 공사가 늦어졌고, 태평양전쟁이 19458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종전되면서 완공되지는 못하였다.
  29. 동만노회 - 원래는 간도노회였으나 1925년 장로교 제14회 총회 때 동만노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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