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4일 목요일

[범용기 제2권] (3) 해방 직전 “일제”의 발악상 - 윤인구 원장

윤인구 원장

 

초대원장으로 계시던 김대현 장로님이 별세하신 후, 이사회에서는 윤인구 목사를 제2대 원장으로 선정했다.

그때부터 윤원장은 조선신학원을 총독부로부터 인가된 신학전문학교로 승격시키려는 운동에 전력을 기우리는[1] 것 같았다. 경성제대[2] 교수라는 다까하시란 젊은 교수는 자기가 해 준다고 장담하고 나선다. 윤 원장은 그의 의견에 열심으로 협력했다. 그러나 내 보기에는 다까하시란 사람은 교수나 학자라기보다도 부로커[3] 타입의 인간인 것 같았다.

결국 전문학교령에 의한 조선신학교는 유산되고 말았다. 그 당시 전문학교령에 의해 인가된 신학교는 경성신학교성결교신학교였다. ‘다까하시와 윤인구는 그 신학교와 합하자는 교섭을 진행시켰다. 그것도 될듯하다가 말았다. 경성신학교 당국에서 거부했기 때문이다. 최종안은 감리교신학교와 합동교수과정을 거쳐서 전문학교로 승격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감리교신학교도 인가받은 전문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이 교섭은 쉽게 낙착[4]됐다.

 

이렇게 되기 직전에 조선신학원에서는 제1회와 제2회 졸업생을 내보냈다.

그것이 날짜로는 1942331, 밤이었고 장소는 승동예배당 하층이었다. 촛불 켜고 성찬예식 중심으로 예배드리며 졸업장을 나누었다. 예배와 성찬은 울음 속에서 진행되었다. 졸업생 수는 제111[5], 248[6]이며 그 중에서 순교자가 16명이다.

 

합동교수의 양상이란 이러했다. 현관 좌우에 하나는 윤인구 원장실, 하나는 김인영[7] 교장실이 있고 큰 교실 하나에 교수, 강사들 방이 있다. 커리큘럼에는 중복된 것이 없다. 김인영 교장이 구약담당이었기에 내가 가르칠 구약과목은 별로 없다. 그래도 시간은 메꿔야 했기 때문에 히브리어니, 그릭[8]이니, 그밖에 부스레기[9] 과목들이 주어졌다.

 

이제부터의 총독부 전략은 조선신학원의 경영비 출처를 막는 일이었다. 김대현 장로님의 맏아드님인 김영철[10] 장로가 설립자였다. 형사들은 은근히 그를 공갈한다.


[각주]

  1. 기우리다 - ‘기울이다의 옛말
  2.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 1924년 일본이 한국인의 고등 교육 기관 설립을 막을 목적으로 서울에 세운 관립 종합 대학.
  3. 브로커(broker) - 다른 사람의 의뢰를 받아 그를 대신하여 상행위를 하고 쌍방으로부터 수수료를 받는 사람
  4. 낙착(落着) - 일이 어떻게 하기로 최종적으로 결말이 남
  5. 1(1942) - 문준희, 장희진, 권우진, 이선용, 이상귀, 정신복, 김용복, 박종길, 최문환, 오덕유, 최학선
  6. 2(1942) - 이덕성, 이경순, 함찬근, 손순열, 김덕성, 김병두, 김재규, 김형배, 김은욱, 김경조, 김시원(목인), 김병엽, 공형락, 김제석, 김점래, 정규태, 최석철, 하태수, 최지학, 이인수, 장하원, 이성관, 고성국, 전봉호, 조택열, 정 준, 이윤학, 조윤동, 장영상, 임경현, 신영옥, 정원모, 김종한, 우세영, 김기엽, 박창국, 유학로, 유병관, 정동민, 김영주, 차경성, 박순석, 조남수, 권성훈, 유지욱, 정송화, 예종도, 배영석
  7. 김인영(金仁永, 1893~1953) - 일제강점기 감리교신학교 교장, 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 이사 등을 역임한 목사, 신학자. 1912년 개성의 한영서원(韓英書院), 1915년 경성의 피어선성경학원, 1920년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 등을 졸업했다. 19229월 목사 안수를 받고, 1921년에서 1925년까지 협성신학교 교사로 재직 중 미국 에모리대학(Emory University)에 유학, 1927년 신학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1932년까지 협성신학교 학감으로 재직하면서 신학세계(神學世界)의 편집인으로 활동했으며, 193012월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 이사를 맡았다. 1932년부터 1939년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19415월 감리교신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일제 말기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협력을 촉구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19469월부터 정동제일감리교회를 담임했고, 재건파와 부흥파로 갈라진 감리교회를 1949년 대한기독교감리회 통합ㆍ탄생시키는데 공헌했다.
  8. 그릭(Greek) - 그리스어(헬라어)
  9. 부스레기 - ‘부스러기’(잘게 부스러진 찌꺼기)의 비표준어
  10. 김영철(金永喆, 1898~1987) - 1896(호적에는 1898년생으로 되어 있음) 1027, 경북 영일군 신광면 상읍리에서 노석 김대현 장로의 51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21세에 승동교회에서 청년 집사가 되었으며, 1922929일 홍경희 씨의 장녀 홍인순 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75녀를 두었다. 1911년 흥해공립고통학교에서 3년간 신교육을 받았다. 1914년 오성학교에 입학하여 졸업(1917)한 해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의과대학 재학 중에 대한독립애국단과 항일비밀결사체인 조선독립대동단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31독립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1923년에 의사가 되어 1972년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의사로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에 독립운동을 하며 알게 된 이인 변호사의 주선으로 한때 건국과정에서 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기도 했으나 혼탁한 정치판과 결별하였다. 1930년에 승동교회에서 34세의 젊은 나이에 장로가 되었고, 1937년에는 사재를 헌금하여 성북구 보문동에 신암장로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1947년부터 1971년까지 시무장로로 동소문교회(1964년 창현교회로 개칭)를 섬겼다. 1945년 재단법인 강제학원을 설립한 후에 성신여학교(현 성신여자대학교의 전신)를 후원하며 설립이사로, 그리고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재단이사로 활동하였다. 1981년에는 신흥대학의 발전을 위해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약 50(15만평)의 땅을 기증하는 한편, 경기도 의정부에 강제복지원을 설립하여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았다. 한신대학을 위해서 강제장학재단을 설립하고 강제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1987728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91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12년 후인 1999314일 아내 홍인순 권사도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두 분의 유해는 하와이의 밀리라니 공원묘지에 묻혔으나, 대한민국정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게 되어 2003815일 광복절에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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