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5일 금요일

[범용기 제2권] (20) “한신” 재단조성과 만우의 외유 - 거제도 진 씨 형제들과 조선신학

거제도 진 씨 형제들과 조선신학

 

송창근 원장의 제일차 관심사는 조선신학원을 대학령에 의한 정규대학으로 인가 맡는 일이었다.

 

미군정 문교부장은 오천석[1]이었다. 우리는 신청서류를 군정청 문교부에 냈다. 곧 인가한다면서 인가는 안준다.

얼마 후에 재단법인이 돼야 인가할 수 있다고 했다. 송창근은 일제시대에 부산에서 오랫동안 성빈학사라는 사회봉사기관을 갖고 있었기에 부산 근처에 친구가 많았다. 그는 거제도에서 어업으로 부자라는 칭호를 가진 진정률[2] 씨 형제들과도 친한 처지였다. 진 씨 형제들은 조림(造林)[3]에 극성이었다. 옥포[4] 뒷산은 그들의 소유 임야였다. 그렇게 도벌이 심한 환경 속에서도 깔축없이 나무를 길러 이제는 하늘을 덮는 스구목()[5] 숲으로 만들었다. 도벌[6]하다 잡힌 사람은 진 씨 집에 끌려간다.

 

그 나무 한그루 한그루는 내가 내 아들 같이 사랑하는 것이오. 그 나무를 자르려거든 차라리 내 다리를 자르시오!” 한다.

 

송창근은 그들 형제를 방문하고 그 임야와 산림을 신학교 기본재산으로 제공하고 재단이사장 직위를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그대로 돼서 기부행위 서류를 구비해 갖고 왔다.

군정이 끝나려는 마감 고비에사 오천석 문교부장으로부터 인가서가 나왔다.

대학령에 의한 정규대학으로서 학사, 석사, 박사 등 학위도 수여할 수 있으나, 이름은 조선신학교로 부르라조건부였다.

다른 신학교 관계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신학원조선신학교로 되었다. 이사회가 모여서 송창근의 교장직을 인준했다. 동시에 재단이사회도 구성되어 진정률 씨가 이사장으로 됐다. 다시 말해서 재단이사회와 운영이사회라는 Double Board식으로 된 것이다.

 

그래서 교장실이 꾸며지고 나는 교무실 모새기에 자리 잡았다.

 

그 무렵에 친일 민족반역자 심사위원회란 것이 구성되어 김상돈[7]이 책임자로 임명돼 있었다. 좌익운동자들도 물론 심사대상이다. 송창근은 그 심사 대상자로 걸려든 것이 아니지만 신경이 과민하게 됐다.

골치 아프다고 노우싱이란 진정제를 계속 먹고 있었다. 차차 더해가는 것 같았다. 발작적인 증세가 잦게 나타난다.

우리는 그가 한참 쉬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밥존스 대학[8]에서 초청장이 왔다. 그 당시 황성수[9]가 외무부 외사과 책임자였기에 일주일도 못되어 여권이 나왔다. 곧 도미했다.

 

밥존스에서 각과 전문의의 종합 진단을 받았다. 심한 고혈압이란 것이었단다.

신학교 학장이래서 학교에서는 특별 우대했다.

피츠버그의 웨스턴신학교 졸업식에 송창근도 초청되었다. 그도 그 학교 졸업생이기 때문이다. Re-Union 연회석에서 Speech 부탁이 있었다. 그는 조선신학의 창설기 고충을 호소했다. 특히 도서관 장서 기부를 청했다. 동창들 중에는 큰 교회 목회자도 많았기에 그 자리에서 각 교회 초청 프로그램이 작성되고 기금모집 장서기증 등의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 결정되었다. 그는 흥분해서 그날 밤으로 내게 긴 편지를 띄웠다.

그런데 송창근은 그날 밤 밥존스 숙소에서 졸도하여 밤중에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옆방 학생이 들어왔을 때 그는 의식을 잃고 마룻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응급실에서 의사들이 초조하게 돌아간다. 의식은 회복됐지만, 전신불수가 됐다. 6개월 정양[10]하여 반신불수 정도로 회복됐다. 다음으로는 지팽이[11] 집고 어정어정[12] 걸을 수 있게 됐다. 이제는 귀국정양하래서 625 석 달 전엔가 배로 귀국했다. 해변가에서 자란 덕분에 배에는 강했었다.


[각주]

  1. 오천석(吳天錫, 1901~1987) - 평안남도 강서 출생. 오기선 목사의 아들. 1919년 아오야마(靑山)학원 중등부를 졸업하고 귀국, 19207월에 월간지 <학생계) 주필로 활약하였다. 이후 도미하여 코넬대학(1925), 노스웨스턴대학(1927), 콜럼비아대학(1931)에서 교육학으로 학사, 석사,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2년부터 4년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중국 상해로 피신했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미군정청 문교부 차장ㆍ부장(1945-1948)을 역임. 1960년 제2공화국 민주당정권 때 문교부장관을 역임.
  2. 진정율(陳正律, 1890~1958) - 진성봉의 장남. 1909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옥포교회에서 장로직을 지냈다. 형재들인 진재수(1894-1950), 진명식, 진동엽 등과 함께 1920년 전후 수산자본가로 급성장하였다. 1930년대 이후 친일행각을 벌였다고 알려진다. 1954년 장승포읍 의원과 한국신학대학 재단이사장을 지낸 바 있다.
  3. 조림(造林) - 나무를 심거나 씨를 뿌리거나 하는 따위의 인위적인 방법으로 숲을 조성함
  4. 옥포(玉浦) -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에 있는 포구. 지형이 복잡한 거제도의 북지산맥 동쪽에 있으며, 수심 14~15m의 옥포만에 연하여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으로 조선시대에는 진영이 설치되어 군사상 중요지역으로 여겨왔던 곳이다.
  5. 삼나무
  6. 도벌(盜伐) - 나무를 허가 없이 몰래 베어 감
  7. 김상돈(金相敦, 1901~1986) -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 5대 민의원, 서울특별시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1925년 메이지학원 신학부 졸업, 1928년 미국 태평양종교대학 사회사업과 졸업. 자유당 정권에 반대하였으며, 419혁명 이후 최초로 실시된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당선되어 초대민선서울시장을 지냈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논의가 표면화되었을 때 개헌 반대투쟁에 매진하였다.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반정부활동을 계속하였다.
  8. 밥 존스 대학교(Bob Jones University, BJU) -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 위치한 초교파 복음주의 사립대학교. 1927년 밥 존스가 설립하였다.
  9. 황성수(黃聖秀, 1917~1997) - 해방 이후 국회외무위원장, 민의원 부의장, 전라남도 지사 등을 역임한 정치인, 법조인, 학자, 목사. 전남 보성에서 황보익 목사의 아들로 출생. 1934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메이지학원에서 수학, 1940년 동북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교와 1942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연구하였다. 자유당에서 활동하였으며 전남도지사을 역임하기도 하였다(1959).
  10. 정양(靜養) - 깨끗하고 조용한 곳에서 쉬면서 몸과 마음을 안정시킴
  11. 지팽이 - ‘지팡이’(걸을 때나 서 있을 때 몸을 의지하기 위하여 짚는 막대기)의 비표준어
  12. 어정어정 큰 몸집의 사람이나 동물이 이리저리 천천히 자꾸 걷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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