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8일 월요일

[범용기 제2권] (21) 통일에의 갈망 – 6ㆍ25와 9ㆍ28 - 통일에의 갈망

통일에의 갈망

 

한반도 분단이란 전 한국 민족의 이니만큼 통일은 우리 민족 전체의 한풀이였다. 이북에서의 남침이나 이남에서의 북진통일이나 5천년 우리 민족의 당연태를 되찾으려는 애국 정열의 폭발이었다. 그러나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의 종주국으로 한반도를 절반씩 나누어 남은 미국, 북은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통일의 실현은 지금까지도 숙제로 남는다.

박헌영[1], 이강국[2] 등 남한의 공산 그룹들은 벌써 월북했다. 그들이 김일성의 남침을 권했다 한다.

김일성은 남반부 해방을 목표로 인민군 조직과 훈련에 국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중공의 담보로 소련에서는 탱크와 그밖에 무기류를 제공했다. ‘미그군용기도 보냈다.


[각주]

  1. 박헌영(朴憲永, 1900~1956) - 해방 이후 북한에서 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 북한 정권 부수상, 외상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 운동가. 충남 예산 태생. 본관은 영해(寧海). 쌀장사를 하던 아버지 박현주와 소실인 어머니 이학규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2년 예산군 대흥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하였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승동교회에 다니면서 미국 유학을 시도하였다. 1920년 상해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상해로 건너갔으며,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입당하였다. 1921년 허정숙의 소개로 주세숙을 만났다. 1922년 귀국하였다가 잡혀 16월의 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25년 국내에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개최하여 국내 공산당 조직을 창설하였다. 광복 이후 공산당 재건에 주력하였으며, 미군정의 좌익 세력 탄압이 심해지자 194695일에 북한으로 탈출했다. 194611월 허헌과 함께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하여 부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북한에 정권이 수립되자 부수상 및 외상에 취임하였으나,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에게 실권을 빼앗겼다. 1950615 전쟁에 참전하였다(자신의 지지기반인 남한을 해방하여 자신의 세력을 만회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1953년 김일성에 의해 남로당계 숙청이 감행되면서 체포되어 평북 철산군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았고, 19551215일 미국의 첩자ㆍ정부 전복 음모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1956719일에 처형되었다.
  2. 이강국(李康國, 1906~1956) -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서기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 운동가, 정치인. 경기도 양주에서 양반 이기택의 2남으로 출생하였다. 1925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30년대 이우한(李愚漢)이란 필명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홍보하였다. 1946년 미군정을 비판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여 박헌영과 함께 체포령이 내리자 월북하였다. 19533월 남로당계 숙청 때 체포되어 1956년 사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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