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8일 월요일

[범용기 제2권] (22) 통일에의 갈망 – 6ㆍ25와 9ㆍ28 - 1950년 남침의 경우

1950년 남침의 경우

 

194973일 이래 38도선에서는 무력 충돌이 잦았다.

1950126일에 한미상호방위 원조협정이 조인됐다. 217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서 맥아더 장군과 회담했고 617일에는 미국 국무성 고문 덜레스[1]가 일본과 한국을 방문했으며 618일에는 미국의 존슨[2] 국방장관과 부라들레 통합참모본부의장이 일본을 방문하여 극동정세를 검토했다.

이것이 동경회담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초부터 북진통일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백두산 꼭대기에 태극기를 세운다고 했다. 19501월 이래 이승만ㆍ미국 사이의 긴밀한 접근은 이 계획을 단행하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북의 김일성은 이에 자극되어 자기편에서 선수 쓸 궁리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중공을 통하여 소련에서 무기를 공급받고 군대를 38도선 부근에 집결시켰는지도 모른다.

미국은 전쟁을 각오하면서 자기편에서 선공(先攻)하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그러했다고 본다.

애치슨[3] 국무장관은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한국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고 선언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은 일본-필리핀-동남아 선을 방위구역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소련ㆍ중공에서 맘대로 해도 좋다는 쪼로 생각할 수가 있다. 김일성은 이것 웬 떡이냐고 고스란히 그 함정에 뛰어든 것이 아니었을까? 초조하게 남침을 준비하고 있는 이북의 실상을 미국이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러나 모르는 척 유도작전을 시도한 것이라고 한국의 지성인들은 추측한다.

 

미국의 정치적 흑막을 다 알 길이 없지만, 하여튼 나타난 뉴스는 이런 것이었다.

 

미국은 1950625일 사건이 발생되자 곧 국련안보이사회를 열고 북조선의 이남 공격을 침략으로 규정하고 이북군의 즉각 철퇴를 요구했다. 이 회의 때 소련 대표는 결석이었다 한다.

결석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고의적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겠다. 추측건대, 미국과 실력 대결할 자신이 없다는 것, ‘안보리에서 침략자로 몰리기 싫다는 것, ‘중공을 약화시킴으로서 두려운 경쟁자를 제거시키려는 것, 무기 제공으로 중공에 대한 체면을 유지하면서 경제적 특권의 길을 열려는 것 등등, 숨은 이유는 가지가지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미국에 대한 유도작전이었다.

627일에 국련안보이사회에서는 한국을 군사적으로 원조할 것을 가결했다. ‘침략에 대한 국제경찰군출동이다.

 

1950628일에 미 극동공군전폭편대가 출동, 629일에는 미 해군작전 개시, 630일에 미 육군부대파견, 한반도 전역 해안봉쇄와 북한기지 공격을 시작했다.

그 동안에 한강철교 파괴로 도강작전이 불가능했던 인민군630일부터 부교(浮橋)[4]를 밟고 도강했다. 그래서 국군과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됐다.

195073일에 맥아더 장군이 극동군사령관 권한으로 한국에 파견됐다.

 

미군부대가, 최전선에서 국군과 함께 전투를 시작했다. 인민군은 75일에 인천을 점령했으며 국련안보리에서는 맥아더 장군에게 국련군최고사령관직을 맡기고 국련기를 사용하게 했다.

195079일에 한국정부는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한국군 지휘권을 국련군 사령관에게 이양하는 대전협정’(大田協定)[5] 각서를 교환했다.

 

718일 미군 2개 사단이 포항에 상륙했다. 719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특별교서로 100억 달러를 군사비로 의회에 요청했다. 24일에 다시 105억 달러를 추가 요청했다.

720일에 대전, 전주가 인민군에게 함락되고 대전에서 [6] 소장이 행방불명되었다.[7] 같은 날 미 국무성의 조선백서가 발표됐다.

 

723일에는 대전, 영동에서 격전이 있었고 전라도 광주가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195083일에 국련군은 낙동강 건너 새 방위선에로 철퇴[8]하고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인민군과 대결하게 됐다.

그 무렵에 나는 일제시대로부터 10년을 못 먹고 못 입고 밤낮 격무에 몰두했던 여독(餘毒)[9]이 도져서 극도로 쇠약했었다. 매일 40도 열에 떨면서 누워 있었다. 625는 주일날이었다. 우리 단골의사인 박요수아[10] 장로가 예배 후에 들렀다.

 

대수롭잖은 태도로 말한다.

어제 밤에 이북 애들이 월남하여 지금 의정부에서 국군과 싸우고 있답니다. 곧 격퇴되겠지요!”

나도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그렇겠지요. 백두산 꼭대기에 태극기를 세운다고 밤낮 장담하던 이승만 박사가 실속 없는 거짓말을 했겠소?”

 

나는 서울이 함락된다손 치더라도 국군과의 시가전쯤은 있은 다음의 일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식구들과 함께, 일인이 파놓은 방공호에 들어가 다음 소식을 기다렸다. 비오는 밤이었다. 새벽녘에 땅바닥이 통곡하듯 탱크소리가 요란했다. 이 박사는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시민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무를 것입니다한다.

밤새도록 같은 방송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해방 직후에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 목사, 장로들은 625날 아침에 종로 성서공회에 모여 서울을 사수한다고 다짐했단다. 나도 목사였지만 내게는 아무 통지도 없었다. 통지가 있었대도 가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이튿날, 새벽같이 일어나 남산 잠두[11]에 올라가 보려고 도동파출소 앞을 지난다.

파출소에는 붉은 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서울을 사수한다던 목사들은 그 길로 한강을 건넜다고 한다.

정부는 벌써 전에 한강을 건넜고 이 박사의 메시지소리의 시체였달까. 녹음판이 돌아가고 있는 기계의 음향이었다.

 

정대위[12], 이장식[13] 등 젊은 교수들은 인민군의 징집을 피하여 삼각산 암굴 속에 숨었고, 김정준[14]은 컴컴한 방에 누워 폐결핵 3기 환자를 위장하고 있었다.

 

인민군은 삼각지 정밀인쇄공장에서 붉은 지폐를 찍고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미군기가 가마귀[15] 떼 같이 날아와 새까만 소이탄[16] 알을 퍼부었다. 나는 동자동 우리 집 높은 석축 모퉁이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떨어지는 폭탄마다 불덩이로 터져, 보고 있는 사이에 삼각지는 불바다가 됐다. 광야가 됐다.

삼각지 가까이 청파동에 하용조카의 처가가 있다. 아내와 나는 궁금해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삼각지 벌판을 가로질러 걷는다. 산 사람이란 하나도 없고 죽은 사람들은 기름과 함께 까맣게 졸아붙어 큰 숱덩어리 만큼씩 되어 있었다. 청파동 사둔[17]집은 모두 무사했다.

 

세브란스 병원이 인민군 헌병대 본부였다. 하루는 꼬마 병정이 문을 두드렸다.

가자는 것이었다. 그는 세브란스로 데리고 간다. 거기에는 김정준, 송창근도 와 있었다. 헌병은 인사성이 깔끔했다.

어른들을 밤중에 오시게 해서 참으로 죄송합니다. 한 가지 여쭈어 볼 말씀이 있습니다. 간호원들이 모두 신학교 사택에 숨었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까?”

지금 부상병들을 위해 간호원들이 많이 필요한데 다들 나와서 간호원 본연의 의무를 다해 줘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김정준 교수님 댁에 숨어 있다는 데요!”

 

김정준은 없다고 대답한다. “처음에 잠깐 들렀다가 어디론가 가곤 했습니다.”

어디로 간 것을 아십니까?”

모릅니다.”

 

몇 번이고 다구쳐[18] 묻는다. 옆에 앉은 송창근 학장이 가로 막는다.

 

우리 집에 왔다가 어디론가 갔습니다. 자기 집에 갔겠지요.”

집이 어딘지 가르쳐 주십시오.”

모릅니다. 요새 행방을 알리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금후에라도 물을게 있으면 내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학교 책임자니까!”

 

딴 사람이 나타나더니, 느닷없이 딴 질문을 한다.

인민군의 남조선 해방에 대한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한참 침묵이 흘렀다.

남한에 부정부패 심하니까 하느님이 채찍으로 때리시는 것이겠지요.”

잘 모르겠소!”

그들은 그럼 돌아가십시오한다.

이번에는 헌병 둘이 우리 늙은이들을 에스콭하여 계단 아래 보도까지 나와 배웅했다.

 

송창근 사택은 도동 골짜기 변두리에 있었다. 신학교에서 접수한 것인데 무던히 큰 집이었다. 화재 후에 다시 옮긴 학장 사택이다.

우리는 거의 매일 찾아간다.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사복 순경 두셋이 송 목사 집을 둘러싸고 아무도 얼씬 못하게 한다.

 

며칠 후에 우리 집 지키는 열세 살 쯤 밖에 안 되는 꼬마 인민군이 자기보다 더 큰 따발총을 메고 오밤중에 대문을 두드린다. 같이 파출소로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갔다. 잡혀온 사람들은 마당에 배꾹 서 있다. 나와 정대위는 사무실 안 의자에 앉친다. 우대한다는 뜻일 것이다. 조사하는 순사는 사복형사인 것 같은데 두 사람 뿐이었다. 다른 시민들을 상대로 바쁘게 돌아간다.

 

정대위와 나는 한 시간 넘짓하게 앉아 있었다. 갑자기 소장실 문이 열리며 송 목사가 던져지다시피 밀려 나온다. 송 목사는 모시 고이적삼을 입고 있었다.

파출소장은 골이 난 얼굴로 외친다.

이 자식 집어 넣어!”

 

순사들은 적삼고름, 허리띠 등속[19]을 뜯어 팽개치고 옆에 있는 유치장에 끌어간다.

 

정대위와 나는 송 목사와 말도 하고 인사도 하려 했다. “안되오!” 하고 고래고래 소리친다. 새벽 세시다.

 

정대위와 나에게는 너무 늦었으니 내일 오전 열시에 다시 오라고 소장이 말한다. 후에사 알았지만 그건 도망치라는 말과 같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오전 열시에 우리는 고지식하게 파출소에 갔다. 순사들은 모두 나가고 소장만 남아 있었다.

먼저 정대위를 부른다. 얼마 후에 나왔다. 불쾌한 얼굴이었다. 다음으로 나를 부른다. 들어갔다.

 

당신도 미국 갔다 왔소?”

그랬소!”

언제 돌아왔소?”

“1932년이니까 거의 20년 전이오.”

 

그 후에는 간 일이 없소?”

없소.”

 

그럼 좋소. 미국 갔다 왔다고 다 문제 삼는 것은 아니오. 최근에 갔다온 사람만 조사하는 거요.”

 

당신 고향이 어디오?”

경흥이오.”

 

나는 무산 사람이오.”

 

그리고서는 말투가 아주 부드러워진다.

예수 믿으시지요?”

물론이요.”

 

예수를 믿어도 미국식 예수는 믿지 마시오.”

 

그의 태도가 하도 부드럽길래, 나는 말을 걸어봤다.

송창근도 경흥 사람이고 기독교인인데, 그리고 정치에 관여한 일도 없는데.”

 

그는 단호했다.

우리가 이승만 정부인줄 아시오?”

송창근은 친미 종교광이오.”

나가시오.”

그래서 나왔다.

 

나는 집안에 앉아 있었다. 우리 집은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 위에 서 있다.

일본인들이 그 바위 속에 터널을 팠다. 그것이 비상 방공호였다. 비밀 출입구가 있고 전등시설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촛불 신세를 져야 한다.

우리는 라디오를 숨겨 들고 그 턴넬 속으로 들어간다. 대구 부산 대전 등지에서 전쟁 뉴스가 연방 방송된다.

인민군과 국군은 낙동강에서 맞서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전쟁에 가담하여 맥아더 장군이 인솔한 미군이 울산에 상륙하여 북진중이라 한다. 자유진영 16개국이 참전하여 국련깃발 아래서 이북군과 대결하게 됐다고도 한다. 이제 서울 탈환은 시간문제로 됐다.

 

하루는 감리교 안 장로라는 분이 찾아왔다. 그는 오래 전에 월북하여 감리교 김창준[20] 목사와 함께 기독교 연맹에서 일하노라 했다. 그는 30대 연령인 것 같은데 큰 절을 하고 꿀어 앉는다.[21]

이제부터는 김 목사님께서는 나오셔서 우리를 지도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딴 세상이 됐으니 우리 같은 과거의 인물은 후퇴해야 하겠지요. 생존할 수만 있어도 다행이겠소.”

 

그리고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지금 미국을 비롯하여 자유진영 16개국이 국제연합군으로 출전했는데 인민군이 아무리 강하다해도 혼자서 세계를 상대하여 이길 수 있오?”

승산이 없지요!”

전쟁이란 이기려는 싸움인데 질 싸움을 왜 하려는 거요?”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글쎄요! 그래도 싸워야하지요. 31운동 때 일본과 싸워 이길 수 있었어요? 그래도 싸웠잖았습니까? 우리도 그 정신으로 일하는 겁니다.”

잘 해보시오. 나는 나대로의 길이 있으니까!”

 

그는 두 번 찾아왔다가 그대로 갔다.

자정쯤에 서울 바닥이 마구 흔들리는 굉음으로 들려왔다. 나는 어디고 화약고가 터지는 줄 알았다. 후에사 알았지만 국련 사령관이 한강철교를 폭파한 것이었다.

인민군의 도강작전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한다. 그때 그 다리를 건너던 피난민 군중은 고스란히 익사했다고 들었다.

 

백지엽[22] 장로가 피신했다가 나를 찾아와서 현관마루에 걸터앉아 몇 마디 위로와 격려를 남기고 갔다.

 

하루는 대구 출신인 최문식[23]이 사람을 보내왔다.

그는 대구반란사건 때 주동자의 하나로 잡혀 서대문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인민군 진주와 동시에 석방된, 평양신학 출신의 목사였다. 나는 일제시대부터 아는 사이다. 최문식은 두 번이나 사람을 보냈다. 만나자는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종로에 나갔다가 그의 사무실에 들렀다. 그는 뚱뚱 부어서 전엣 면목이 없다.

그의 말에 의하면 - ‘남조선민정실시를 위한 최고위원 7인 중에 자기도 들어 있노라는 것이었다.

‘7인위에서는 우선 숙청대상을 토의했단다. “국군장교와 판검사는 무조건 사형에 처한다”, “면장, 동장, 반장 등은 재판에 부친다”, “목사는 사형에 처한다”, “장로와 교인은 인민재판에 내세운다.”

그때 이에 대하여 자기로서의 수정안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목사는 간단하지 않소. 목사에게는 적어도 평균 2백명의 교인이 있소. 그 목사가, 잘했든 못했든, 우리 손에 죽었다면, 그 교인은 우리 목사님이 순교하셨다고 하여 그때부터는 우리를 악마적인 원수로 대할 것이오. 교회 수를 1천으로 잡더라도 교인이 20만 명이오. 20만명을 하루아침에 으로 만든다는 것은 졸렬한[24] 정치가 아니겠소?”

 

7인 위원들은 그것도 그럴 것 같다면서 최문식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리고서 구체안을 말하라 하더라는 것이다.

최문식은 말했다.

목사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은 일제시대에도 이승만 시대에도 당국의 시녀됨을 거부하고 의를 위해 고생한 사람이 있다. 는 일제시대나 이승만 시대에나 조용하게 자기를 지켜 당국에 붙거나 이용당하는 일이 없던 사람, 은 일제시대나 이승만 시대에나 당국의 앞잡이가 되어 적극 협력한 사람.

이 세 종류의 목사를 분간있게 다뤄야 하는데 2’의 유형에 속하는 목사는 우리가 압자비[25]로 쓰자. ‘2’ 유형의 목사는 우리가 완전히 정권을 세울 때까지 건드리지 말자. 우리 정부가 된 다음에 다시 불러 물어보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자. ‘1’의 유형에 속하는 목사는 당장 유격대에라도 편입시키자.”

 

7인위원회에서는 좋다. 그럼 네가 목사들 심사하는 책임을 맡아라해서 이렇게 와 있는 겁니다한다.

 

그럼 나는 어느 유형에 속하는 거요?” 하고 물었다.

 

김 목사님은 2’ 부류에 속한다고 봅니다. 댁에 계시면서 기도나 하십시오한다. 나는 나가려고 일어섰다.

잠깐만하고 최문식은 나를 멈춘다.

각서를 간단하게 써 놓고 가십시오.”

 

나는, “‘각서라는 것은 잘못했으니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하는 다짐을 남기는 것인데 내가 목사된 것을 잘못이랄 수도 없고, 기독교인 된 것을 후회하는 일도 없고, 정치에는 아무 참여도 안 했으니 정치인과 책임을 같이할 성직의 것도 아니잖소? ‘각서는 못쓰겠소.” 했다.

 

그럼 기관으로서의 각서를 써 주십시오한다.

나는 기관장으로서 그 기관을 대표하는 직책에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기관으로서의 각서를 쓸 자격이 없소.”

 

그럼 나가십시오했다.

 

최문식의 옆에는 힘께나 쓸 것 같은 험상스런 뚱뚱보 사내가 우리를 노려보고 앉아 있었다. 후에사 알았지만 그는 최문식을 감시하는 김일성의 직계요원이라고 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최문식은 행방불명이 됐다. ‘게릴라를 자원해 출전했다는 루머였지만, 숙청된 것으로 안다.

 

하루는 집이 통채로[26] 몸부림친다. 너무 큰 굉음(轟音)[27]이어서 나는 폭발하는 분화구 언저리[28]에 앉은 것 같았다. 웬일인가 싶어 서울역 광장에 나가 봤다. 광장에는 대형폭탄이 두 개나 떨어져서 진짜 화산 구멍같이 패여 있었다.

유리창 종류는 온통 부서져서 땅바닥은 유리조각 백사장으로 변했다. “시민은 안전을 위해 촌으로 피난하시오하는 삐라가 가을철 낙엽같이 너더분하다.[29]

나는 어디론가 피난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9월이 되자 전세는 역전하는 것 같았다. 피난민은 남으로 남으로 밀린다.

95일에 미국에서는 육군 7만 명을 소집했다 한다.

915일에는 국련군이 인천에 적전 상륙했다. 맥아더 장군이 직접 진두지휘 했단다.


[각주]

  1.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rster Dulles, 1888~1959) - 미국의 변호사이자, 미국의 외교정책을 공식화한 외교관, 정치가. 52대 국무장관(1953~1959)이다. 1950419일 딘 애치슨 국무장관 아래에서 고문에 취임했다. 19506월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대한민국 제2대 국회 개원식에 참석(19)하고, 38도선을 시찰했다(20).
  2. 루이스 아서 존슨(Louis A. Johnson, 1891~1966) 미국 민주당 소속. 1949328일부터 1950919일까지 미국의 국방장관을 역임하였다.
  3. 딘 구더햄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 1893~1971) - 재무차관(1933), 국무차관보(1941), 국무차관(1945)을 거쳐 국무장관이 되어(1949) 대소 강경 정책을 취하였다. 1950112일 소위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였다.
  4. 부교(浮橋) - 다리를 받치는 기둥이 없이 배나 뗏목 따위를 여러 개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만든 다리
  5. 대전협정(大田協定) - 1950712일 임시수도였던 대전에서 체결도니 주한미군의 사법관할권에 관한 외교협정. 정식명칭은 재한 미국군대의 관할권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협정(Agreement relating to Jurisdiction over Criminal Offences committed by the United States Forces in Korea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다.
  6. 윌리엄 프리시 딘(William Frishe Dean, 1899~1981) -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의 군인. 한국전쟁 중에 조선인민군에 납치되어 포로가 되어 끌려가기도 했으며 1955년 전역하였다.
  7. 대전전투(大田戰鬪) - 1950년 한국전쟁 당시 714~21일까지 대전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미군 24사단 사단장 윌리암 에프 딘 소장이 포로가 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후 딘 소장은 인민군 총좌인 이학구와 포로교환이 되었다.
  8. 철퇴(撤退) - 있던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물러남
  9. 여독(餘毒) - 몸에 남아 있는 독기, 좋지 못한 일의 잔재로 남아 있는 해로운 요소
  10. 박요수아 함경도 출신 의학박사, 송창근 목사와 함께 서울성남교회를 설립하는데 공헌하였으며 1948년에 장로로 피택되었다. 미국 의료ㆍ선교봉사활동으로 1975년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선정됨
  11. 풍수적으로 남산은 전장에서 말이 안장을 벗는 주마탈안형의 모습으로 서쪽 봉우리 중 바위가 깎아지른 곳을 누에머리인 잠두’(蠶頭)라 부른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조망이 가장 좋다고 한다.
  12. 정대위(鄭大爲, 1917~2003) - 북간도 용정에서 독립운동가 정재면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5년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일본 동지사대학 신학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예천교회 전도사, 김천교회, 영주교회를 시무하였다. 당시에 송창근 목사가 담임하던 김천의 황금정교회를 공덕귀, 조선출, 김정준 등과 함께 협동 목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에 조선신학교 교수, 초동교회 담임목사(1950-1953), 1953년부터 1954년가지 프랑스 소재 세계 유네스코 본부에 한국대표 연락원으로 파견근무를 하였다. 1956년에 토론토대학을 거쳐 예일대학으로 유학하여 1959년에 종교학과 인류학으로 최초로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이후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건국대학교 총장(1961-1968), 토론토 한인연합교회(1968-1969), 칼튼대학(Carleton University) 교수(1969-1983), 한국신학대학 학장(1983-1987) 등을 역임하고 캐나다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2003).
  13. 이장식 1921417일 경남 진해에서 출생. 호는 혜암. 1950년 한국신학대학교 졸업생으로 캐나다 퀸즈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한 후 미국 뉴욕 유니언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를 취득했다. 예일대학교 신학부 연구교수를 거쳐 미국 아퀴나스 신학대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이후 한신대 교수, 계명대 교수, 예일대 신과대학 연구교수, 영국 맨체스터대학교 신과대학 명예 객원교수, 케냐 동아프리카 장로교신학대학 교수 등을 역임했다.
  14. 김정준(金正俊, 1914~1981) - 해방 이후 전국신학대학협의회 초대 회장, 한국신학대학 학장 등을 역임한 목사, 신학자. 호는 만수(晩穗). 부산 출신.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부를 거쳐, 캐나다의 임마누엘 신학교,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하고,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9년 한국신학대학 구약학 교수, 1961년 한국신학대학 학장, 1963년에는 연세대학교 교목실장 겸 구약학교수, 1964년에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장, 1970년에는 한국신학대학 학장을 다시 역임하였다. WCC 세계신학교육기금(TEF) 한국대표, 대한기독교서회 편집위원장과 이사,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교회 신학과 교육 발전, 에큐메니칼 신학교육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는 관에서 나온 사나이라는 별명처럼 폐결핵으로 사형선고를 받고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도 했으며, 19812월 지병으로 소천했다.
  15. 가마귀 주로 문학 작품 등에서, ‘까마귀를 예스럽게 이르는 말
  16. 소이탄(燒夷彈) - 사람이나 건조물 등을 화염이나 고열로 불살라서 살상하거나 파괴하는 폭탄 또는 포난
  17. 사둔 - ‘사돈’(혼인한 두 집안 사이에 당사자의 부모들끼리 혹은 같은 항렬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부르는 말)의 비표준어
  18. 다구치다 - ‘다그치다의 방언
  19. 등속(等屬) - 두 개 이상의 사물을 벌여 말할 때, 그 마지막 명사 뒤에 쓰여, 그 명사들과 비슷한 부류의 것들을 묶어서 나타내는 말
  20. 김창준(金昌俊, 1889~1959) - 평안남도 강서 출생. 강서군 반석면의 소학교와 평양 숭실중학, 그리고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 아오야마학원을 수료하였다. 18세 때 미국인 선교사 문약한(文約翰, Moore,J.W.)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평양 중앙교회·박구리교회 등에서 시무하다가, 191931운동 때 33인 중 가장 어린 나이로 독립선언서 서명하고 참가하였다. 228일 함태영(咸台永)으로부터 이종일(李鍾一)이 인쇄한 조선독립선언서 900매를 받아, 이 중 600매를 이갑성(李甲成)에게 건네주고 나머지 300매는 경성화상점(京城靴商店) 사무원 이계창(李桂昌)을 시켜 평안북도 선천으로 운반하였다.
    이 사건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2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192112월 최린(崔麟함태영·오세창(吳世昌권동진(權東鎭이종일·한용운(韓龍雲) 등과 함께 가출옥하여, 주로 서울 감리교 중앙예배당에서 설교와 강연을 하였다. 1924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1926년 귀국하였다. 목사로 있는 중앙교회뿐만 아니라 서울 상동교회·성북동교회·석교교회 등을 돌며 설교를 계속하였고,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 순회강연 등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4512월에는 전국농민조합총연맹에 평안북도 대표로 참여하였고, 19462월에는 좌익계의 민족통일전선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상임위원을 역임하였다. 1948년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직에 올랐으며, 1950년에는 서울에서 남선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여 그 위원장을 맡았다. 625전쟁 후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묻힌 월북 목사였기에 대한민국에서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21. 꿇어앉는다의 오기인 듯.
  22. 백지엽 장로 1909년에 설립된 서울 안동교회에서 1941년 장로로 장립되었다.
  23. 최문식 목사는 1939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제34회 졸업생이다. 그는 이재복 목사와 함께 194610월 대구폭동을 주도했는데, 이재복 목사는 사형을 받았고, 최문식 목사는 살아남았다가 625 때 서대문 감옥에서 출감하였다. 최문식 목사는 당시 대한 YMCA 총무로 있던 고향 친구 김태묵 목사가 미군정에 호소해서 사형집행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민경배 교수는 최문식 목사가 서울에 북한군이 진입한 지 3일만에 나타나서 서울에 남아있던 목사들을 박해했다고 증언한다(2014년 한국장로신문). 김재준 목사는 최문식 목사의 후임으로 은진중학교 성경교사에 부임하였다. 고지수, 김재준과 개신교 민주화운동의 기원, 도서출판선인, 2016, 102.
  24. 졸렬하다 옹졸하고 보잘 것 없다
  25. 앞잡이의 오기인 듯.
  26. 통째로’(나누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덩어리로)의 비표준어
  27. 굉음(轟音) - 몹시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
  28. 언저리 둘레를 이룬 가나 그 가까이
  29. 너더분하다 뒤섞여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어수선하다. 듣기 싫고 번거롭게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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