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4일 목요일

[범용기 제2권] (4) 해방 직전 “일제”의 발악상 - 혁신교단과 전필순

혁신교단과 전필순

 

그 무렵에 일본에서는 일본 기독교 각 교파가 일본 기독교단으로 통합되었다.[1]

총독부 당국에서는 조선의 각 기독교파를 통합하여 조선 기독교단으로 단일화하고 다음에는 일본 기독교단과 연합하여 내선일체[2]를 실현하려는 방침이었다.

이 당국의 정책에 적극 협력하고 나선 분들이 전필순[3] 일파였다. 그들은 위선[4] 신학교부터 통합하려 한 것이었다.

그 당시 감리교 총회 총무는 이동욱이었는데 그는 전필순의 심복이었고 그 밖에도 감리교에 동조자가 많았기에 그는 감리교에 깊이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좀 더 자세하게 말할 필요가 있겠다. ‘혁신교단이란 이름의 운동이다. 이것은 조선 기독교 각 교파의 체질을 황도정신으로 개선하고 혁신교단이란 단일기구 안에서 호국종교의 사명을 다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발기총회에서 전필순은 창설통리로 취대[5]되었다. 그는 감리교를 혁신교단에로 흡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제 장로교만 가입시킨다면 통일천하진시왕[6]이 된다고 믿었다. 총독부가 밀어주기로 됐으니 순풍에 돛단 셈이다.

그는 감리교 신학교에 본부를 두고 용상[7]으로 꾸민 금색찬란한 보좌에 군림했다. 그러나 장로교 총회에서는 비웃다싶히[8] 백안시[9]했다. 남도에서의 평양이라는 대구교회 원로들이 거들어 주지 않는다. 궁지에 빠진 전필순은 자기가 서울노회장이고 조선신학원 이사장이고 윤인구가 이사회 서기라는 전직 등등을 고려하여 서울노회를 소집했다. 서울노회만이라도 혁신교단에 가입시키려고 강요했다. 임석[10]한 형사의 눈이 무서워서 모두 유구무언[11]이었다. 그러나 김영주만은 결사 반대였다 한다.

응답 없는 회의에서 표결할 도리는 없었다. 점심시간이라 휴회했다. 오후에 속회할 때에는 전필순 지지자만이 모였다. 김영주는 또 거기에 끼어 앉았다. 또 반대했다. 그러나 표결에서 김영주는 외토리[12]이었다. 서울노회는 해산하고 혁신교단에 가입한다는 내용의 결의였다 한다. 그러니까 명목상으로는 전필순이 서울노회를 끌고 혁신교단에 들어가 통리가 된 셈이다.

김영주는 장로교 총회에 서울노회 재조직을 청원했다. 총회는 청원대로 실시했다.

재조직된 서울노회는 김영주를 노회장으로 선출했다. 김영주는 혁신교단으로 넘어간 목사들을 제명하고 그 위임[13]을 해소시켰다.[14] 전필순의 연동교회에서만은 노회를 탈퇴하고 전필순을 지켰다.

결국 전필순은 감리교 전체와 장로교의 서울노회 목사 몇 사람을 지지세력으로 혁신교단 통리가 된 것이다.

 

장로교회는 교인수의 3분의 2가 황ㆍ평 양도에 있다. 그러므로 총회 때마다 서도에서 지배권을 갖는다. 경기 이남은 언제나 말발 안 서는 마이노리티[15].

바른 제안도 앞살[16] 당하기 일수다.[17] 이제까지 서울지방에는 종교교육부 총무인 정인과[18]가 있어 서북교권의 대사노릇을 했다. 교권주의자인 전필순은 즐겁지 않았다. 일제의 교회탄압이 시작됐다. 서북교계에는 일종의 치명상이었다. 선교사 세력도 갔다. 경기 이남에 교권이 장악될 절호의 기회는 왔다.

교권도 권력이니만큼 권력의 본산인 총독부를 껴야 한다. 그러려면 당국의 방침인 조선 기독교의 일본화, 황도정신에 의한 호국종교화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그래서 혁신교단 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감리교의 전부와 경기 이남의 장로교를 합하면 이북의 장로교보다 수로도 우세하다. 그 교단의 통리가 되면 조선교회 전체의 교권이 장악된다. 함경도는 경원(敬遠)[19]했다. 교세도 시원치 않았지만 그 사람됨됨이 의지적이어서 후석불이’(厚石不移)의 감이 있다. 그는 맨처음 나에게 함경도가 무섭다고 했다.

그러나 통틀어 말한다면 그런 얕은 재간의 패도(覇道)[20]는 오래가지 않는다.


[각주]

  1. 일본은 1939년 종교단체를 통제하기 위한 종교단체법을 공포하였다. 미국을 상대로 1941년에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비상전시체제에 들어가자 종교단체법에 따라 일본 내 종교단체들을 통합하기 시작하였고, 1941년 일본 내 모든 기독교 교파를 일본기독교단이라는 단일 교단으로 통합하여 전시체제에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2. 내선일체(內鮮一體) - 1937년 일제가 전쟁 협력 강요를 위해 취한 조선 통치 정책. 일본과 조선은 한몸이라는 뜻으로 이후 조선에 대한 일제 식민 정책의 표어였다.
  3. 전필순(全弼淳, 1897~1977) - 장로교 목사, 총회장. 호는 일우(一愚). 189747일 경기도 용인군 외사면 석천리의 농가에서 출생.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장평리교회 교인 심문택이 설립한 봉양학교를 1912년에 졸업하였고 실업학교에 진학하여 1년간 잠업, 축산 등을 배웠다. 당시 연동교회에서 원세성, 박용희 등이 장평리에 내려와 농촌전도를 하고 있었는데 이 무렵 친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고 1914년 세례를 받았다. 1917년 서울 YMCA소년부 간사로 임명되었고 19191월 원세성의 추천으로 연동교회 조사로 부임하게 되어 목회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31운동 후에 독립운동을 추진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15월 석방되었다.
    1922년 일본에 유학, 코오베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 졸업하고 귀국하여 그해 4월 연동교회 조사로 취임하였다. 그는 그해 9월 연동교회 당회의 결의에 따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1개월간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가 평양에 가 있는 동안연동교회 안에서는 그의 동사목사 부임을 경계하는 당시 당회장 이명혁 목사와 장로들 사이에 의견충돌이 생기게 되자 결국 그는 연동교회가 아닌 묘동교회 조사로 부임하였고, 19276월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묘동교회 위임목사로 시무했다. 1927년 일본에서 종교단체 법안을 초안해서 국회에 제출하게 되자국내 교회에도 이의 영향이 클 것임을 감안, 그 대책을 강구하게 되자 그는 총회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대표자격으로 일본에 건너가 문부성을 상대로 반대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931년 묘동교회를 최석주 목사에게 인계하고 <기독신보> 기자로 새출발하였고 선교사들이 <기독신보>를 한국측에 양도하게 되자 그는 개인자격으로 이를 양도받아 발행인(사장)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윤치호, 정인과, 양주삼, 유억겸, 백낙준, 밀러(閔休) 등과 마찰을 일으켜 예수교서회(현 기독교서회) 건물을 떠나 운영하게 되었고 결국은 재정난으로 1937년에 이르러 폐간되고 말았다. 한편 1935년에는 승동교회에서 분립한 수송교회를 담임하게 되었고 19414월 그의 세 번째 부임지인 연동교회의 위임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 종교탄압 속에 일제의 강압에 끌려 1942년 종교지도자의 영ㆍ미타도좌담회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19434월에는 감리교측과 손을 잡고 일본기독교 조선혁신교단을 조직, 그 통리가 되기도 하였다.
    해방후 연동교회 당회에 사직원을 내었으나 반려되었고 19493월에는 반민법위반혐의로 마포형무소에서 30일간 구금되었다고 불구속으로 풀려났다. 625사변 중 부산으로 피난하였고 수복후 폐허가 된 교회를 재건하는 한편 1957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WCCNAE 대립으로 장로회가 분열되었을 때 증경총회장이던 그는 연동교회에서 총회속개준비회를 주재하였고 이로써 WCC중심의 연동측장로회가 탄생했으며 이것이 오늘의 예장 통합측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양측 합동을 위해 합동위원으로 활약하였으나 합동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두 개의 별개교단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19616월 연동교회 원로목사로 목회일선에서 물러났으며 이듬해에 정식은퇴하게 되었다.
    기독교연합운동에도 크게 활약하였고, 1977214일 서울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유족으로는 1928년 결혼한 부인 차사백(車士伯, 중앙유치원 사범학교 설립자) 권사와의 사이에 외아들 우용(雨用)이 있다.
  4. 위선(爲先) - 다른 것에 앞서서
  5. 추대’(推戴)의 오기인 듯
  6. 진시황(秦始皇) - 중국 진() 나라의 제1대 황제(BC 259~BC 210, 재위 BC 247~BC 210). 이름은 정()이며, 기원전 221년에 천하를 통일하고 자칭 시황제(始皇帝)로 군림하였다. 군현제(郡縣制)에 의한 중앙 집권을 확립하고,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일으켜 사상을 통제하는 한편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시켰다. 아방궁(阿房宮)과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7. 용상(龍床) - 임금이 정무를 볼 때 앉던 평상
  8. 비웃다시피의 오기
  9. 백안시(白眼視) - 사람이나 일 따위의 비중을 가볍게 보아 업신여기거나 냉대함
  10. 임석(臨席) - 행사 따위의 자리에 참석함
  11. 유구무언(有口無言) - 입은 있으나 할말이 없다는 뜻으로, 변명할 말이 없음을 이르는 말
  12. 외토리 - ‘외톨이’(의지할 데가 없고 매인 데가 없는 홀몸)의 비표준어
  13. 위임(委任) - 어떤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김, 당사자의 한쪽이 상대방에게 사무의 처리를 맡기고 이를 승낙함으로써 성립하는 계약
  14. 해소시키다 풀어서 없애다
  15. 마이너리티(minority) - 다른 사람들과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소수자
  16. 압살’(壓殺, 힘으로 짓눌러 상대편의 의지나 활동을 막아버림)의 오기인 듯
  17. 일쑤이다의 줄임말(일쑤다)의 오기, 일쑤(가끔, 곧잘 또는 흔히 그렇게 함)
  18. 정인과(鄭仁果, 1888~1972) - 일제강점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기독교신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 평북 순천(順川) 출신.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를 마치고, 미국의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한 뒤, 뉴욕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하였고, 미국에서 신학과 정치사회학을 공부하기도 하였으며, 귀국 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1932), 장로회 총회장(1935)에 선임되었다. 19376월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던 중 변절하여 친일 행위를 하였다.
  19. 경원(敬遠) -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꺼리어 멀리함
  20. 패도(覇道) - 인의를 저버리고 무력과 권모술수로 나라를 다스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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