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8일 월요일

[범용기 제2권] (36) 부산 피란 3년 - 동대신동에서

동대신동에서

 

부산 피난 초기였다. ‘부산이라는 가마솥’() 같이 옴폭한 밑굽에 이북, 서울, 일본 등지에서 수십만 인간이 몰려들었으니 거처할 집, 먹을 음식, 입을 옷, 모두모두 금싸래기였다.

 

하루는 거리에서 김의정을 만났다.

그는, 내가 20대 청년으로, 공부한답시고 서울에 있을 때, 서울에 왔었다. 경성(境城)고보 2학년에서 무슨 이유로였는지 퇴학했다. 그래서 서울에 왔다. 귀여운 소년이었다.

중앙고보에서 2학년 보결생을 뽑는다길래, 거기에 원서를 냈다.

편입시험 날짜가 다가온다. 암만해도 자신이 없단다. 내가 대리시험을 치기로 했다.

그 무렵에는 원서에 사진 붙이는 일도 없었다. 나도 물론 편입원서를 냈다. ‘의정군의 원서와는 번호가 다른 것뿐이다.

나는 시험장에 들어갔다. 시험문제는 어렵지 않았다. 대뜸 썼다. 번호는 내가 의정번호를, ‘의정은 내 번호를 적었다.

 

발표 날, ‘의정의 번호가 ’()에 붙었다. 그래서 그는 중앙고보 4학년까지 남 못잖은 성적으로 올라갔다. 또 무슨 이유였던지 4학년에서 중퇴했다.

 

그후 그는 청진의 신흥재벌인 김기덕[1] 상사의 무역부 전무로 등용되었고 지금도 그 직위에 있다가 부산에 내려온 것이었다. 얼굴도 잘났고 체구도 거대하다.

그는 나를 형님이라 부른다.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기에 근황을 얘기했다.

그럴 수 있느냐면서 거간꾼[2]을 불러 동대신동에 4조방 하나를 얻어준다. 집세는 전세로 여섯 달치를 그가 선불한다.

어느 소학교 선생 집인데 한 방을 세놓는 것이다. 우리는 꼬마 식구들과 함께 한 방에서 자고 신자는 벽장 다락에서 잔다. 아이들은 동대신동 공립소학교에 전입학했다. 부엌이 있으니 천생 숱불 풍로[3]로 세끼를 끓여 먹는다. 찐빵 따위로도 식사를 때운다.


[각주]

  1. 김기덕(金基德, 1892~1953) - 해방 이후 고려흥업주식회사를 창립한 실업가. 호향인 청진에 청덕학교와 청덕전기학교를, 서울에 한성실업학교를 설립하였다. 동생 김기도를 와세다대학에 입학시켰고, 후일 그를 통해 많은 독립운동자금도 헌상하였다. 광복 후 월남하여 고려흥업주식회사를 창립, 중석(重石)의 해외무역을 착수해 성공하였다.
  2. 거간꾼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 사이에서 흥정을 붙이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3. 풍로(風爐) - 화로의 한 가지. 석유나 전기 등으로 불이나 열을 내어 음식을 만드는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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