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뻔 했던 제주도
인민군의 총반격 때문에 피난민은 초조했다. ‘동’으로 단양까지, ‘중부’로 밀양까지, ‘서부’로 통영까지 인민군에게 점령됐다. 이제 부산 입성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피난교회의 ‘시국대책위원회’에서는 목사와 그 식구들은 제주도에 옮기기로 하고 당장 부두에 나오라고 급보한다. 그때 ‘안병부’도 부산피난 중이었다. 그의 주선으로 우리 식구는 너절한[1] 보따리를 꾸려들고 부두에 나갔다. 인간이 어찌나 많은지 그지없이 천해보였다. 장로들이 반발한다. “양떼를 버리고 저만 살겠다고 앞서 도망하는 목자가 어디 있느냐!”
안병부[2]와 나는 목사들 축에 끼어 서지도 못하고 변두리 높은데서 보기만 하고 있었는데, 안병부는 껄껄대며 말했다.
“선생님, 우리 도루 들어갑시다. 우리는 부산에서 새 길을 찾아봅시다. 제주도에 가면 귀양살이 같아서, 기회가 와도 놓치고 말겁니다….”
그래서 나는 부산서 신학교를 계속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각주]
- 너절하다 – 하찮고 시시하다. 깔끔하지 않고 허름하며 지저분하다.
- 안병부 목사는 조선신학교 제4회 졸업(1944년)하였고, 1954년 신암교회에서 이양학 장로를 모시고 성암교회를 창립하여 초대 목사(1954~1956년)로 사역하였다. 1956년에 소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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