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8일 월요일

[범용기 제2권] (40) 부산 피란 3년 - 프린스톤 학생들의 모금

프린스톤 학생들의 모금

 

14 후퇴 때 미국 선교사들이 부산과 대구에 모여 왔다. 선교사회가 조직되었다. ‘아담스가 총무, ‘킹슬러[1]가 회계였던 것 같다. 본부는 대구에 있다.

 

킹슬러가 부산에 와서 나를 보자고 했다. 만났다. 킹슬러는, 프린스톤 신학교 학생회에서, 한국의 신학생들에게 보내는 구호금이라면서 금일봉을 내게 수교한다. 아무 꼬리표도 붙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이 한신개강을 희망적으로 추진시킨 동력의 하나가 됐다. 학생들의 숙식을 마련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킹슬러는 엉큼하게 자기 나름대로의 조건을 붙여보려고 한다.

김 목사도 이제부터는 한국 교회의 화평을 위해서 우리와 의좋게 합해봅시다.”

 

당신은 프린스톤 신학생들의 뜻을 따라 무조건으로 그 금액을 우리 신학생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사명을 완수한 것이 아니겠소! 다음 얘기는 한국 교회 전체에 얼키고 설킨 복잡한 문제니 두고두고 풀어봅시다.”

킹슬러는 내가 프린스톤 있을 때 졸업반 학생이었고 한국 선교사 후보였기 때문에 내게는 무던히 친절했던 사람이다.

그의 신학은 Ulter-Fundamentalism이었다.


[각주]

  1. 킨슬러(Francis Kinsler, 1904~1992 권세열) - 1928년 프린스턴 신학교 졸업하고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평양선교부 소속으로 숭실전문학교에서 강의. 194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다가 1948년 재내한하여 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신약 신학을 강의하고 1952년 장로회신학교 교장 대리직 수행. 한국전쟁 당시 군목제도 창설과 운영에 공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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